이서아의 「방랑, 파도」는 바닷가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요양원 일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 어떤 특별한 사건도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이 한적한 마을에 내가 이르게 된 사연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의지와 욕망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는 우울하고 무료한 분위기, 무력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다만 관조하는 것 같은 소설적 시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랑, 파도」의 제목에 제시되어 있는 ‘방랑’이라는 어휘는 이 소설의 전체적인 기조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본래 방랑하는 주체는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 그 과정에서 통과해야 하는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는 사람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반면, 소설의 ‘나’를 비롯하여 ‘백’과 ‘반’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며 여생을 보내는 요양원 노인들은, 삶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일렁일렁 몰려오는 파도”에서 무의미하게 부유하거나 표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처럼도 읽힌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토로하는 것이다. “내게 좋은 파도란 없다. 죄다 견디기 힘들고 고달픈 파도일 뿐이다”(p. 79).
소설이 말하는 것처럼 “신의 관점에서” 이러한 인간들의 일상적 삶은 전혀 아름답지 않으며, 오히려 초라하고 납작해 보일 수 있다. 「방랑, 파도」의 ‘나’가 중간중간 신의 입장에서 인간의 무의미한 삶이 얼마나 하찮고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서아의 소설이 단지 의미 없는 삶에 대한 패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결론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방랑, 파도」에 특별히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종의 소소한 ‘배움’의 계기들이 번뜩이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 과정이 원활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배움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향자 할머니로부터 화투를 배우고, ‘백’과 ‘반’으로부터 서핑을 배운다. “나는 아직 배우는 중이었다―” “기회를 주세요. 아직 배우는 중이잖아요.” 여기서 내가 호소하는 배움은 다만 화투나 서핑이라는 구체적인 활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울러 나의 배움은 뚜렷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강화하는 훈련과도 동일시될 수 없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나’에게 일어나는 작지만 분명한 내면적 변화는, 분명한 의미 없이도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주인공이 점차 터득해나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거대한 존재는 내 슬픔을 주워주지 않는다. 거둬 가주지도 않는다. 보살펴주지도 않는다. 슬픔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이처럼 ‘무의미의 주체화’로도 정의될 수 있는 배움의 서사는 삶의 무의미성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형언하기 어려운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방법을 익혀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새파란 바다가 나를 감싸안아주었다. 눈을 뜨자 일렁이는 해초들이 보였다. 초록빛 해초들. 춤추는 생명들.” 「방랑, 파도」는 무의미의 바다 위에서 방랑하듯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나가야 하는, 인간적 삶의 근원적 비극성과 고귀함을 향한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헌사이다. 강동호(문학평론가)
2025년 여름, 이서아
이서아 「방랑, 파도」 (『자음과모음』 2025년 봄호)
선정의 말
관련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