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무덤을 보살피다」는 사촌인 수동의 제안으로 고향 선산의 할아버지 묘소를 찾았던 화수가 산속에서 길을 잃고 위태롭게 헤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기만 따라오라며 앞서가던 수동은 어느 틈엔가 사라져버리고 화수는 산비탈을 헤매다가 물소리를 따라 낯선 장소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에서 화수는 낯선 사람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는 바로 “가족에서 완전히 지워진 사람”인 막냇삼촌이었다. 할아버지의 무덤을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던 민석은 화수가 어른들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존재만 알고 있던, 한때는 집안의 자랑이었으나 어쩌다 “집안에 먹칠하는 놈”이 되어버린 삼촌이었다. 길을 잃은 화수와 수동에게 도움을 줄 것 같았던 그로 인해 오히려 곤경에 처한 그들은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곳에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삼촌과 마주하게 된다. 가족에게 지워진 사람이었던 삼촌의 재등장으로 인해 과연 가족의 어떤 비밀이 알려질 것인가라는 독자의 궁금증과는 상관없이 삼촌이 앉아 있는 화수의 집 거실 풍경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며 소설은 끝이 난다.
다소 미스터리하게 그려지는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실상 죽은 할아버지에 대한 화수의 회상이다. 화수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받았던 넘치는 “사랑”이 그에 대한 ‘실망’과 “원망”으로 뒤바뀌는 과정과도 같다. 베트남 참전 용사였던 할아버지가 실은 마약에 손을 댄 범죄 이력으로 명예와 보상을 박탈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정치에 별 관심도 없이 온실 속 화초처럼 지냈던 화수가 처음 맞이한 대선에서 할아버지의 당부대로 “부모를 다 비극적으로 잃은 가여운 여자”를 뽑았던 것이 “너는 레즈비언이라는 애가 어떻게 새누리당을 뽑아?”라는 여자친구의 힐난과 더불어 수치로 되돌아오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품 속 화수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에 관심을 기울일수록 기존에 자신이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고 “자신에게 선했던 세계가 패배했다는 것을 [……]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모호한 채로 끝나는 김지연의 「무덤을 보살피다」에서 우리가 또렷하게 확인하게 되는 것은 세계란 알면 알수록, 삶이란 살아낼수록, 패배자가 된 듯한 서러움과 가해자가 된 듯한 수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죽기 직전 병상에서 “제발 죽여줘”라며 “나 좀 살려다오”라고 말했던 할아버지의 삶도, 그 할아버지의 무덤을 지키던 삼촌의 ‘도피인 듯 속죄인 듯’한 삶도, “자기의 일이 이렇게까지 잘 안 풀리는 것”을 엉뚱하게 “생전에 할아버지와 맺힌 것을 잘 풀지 못”한 탓으로 돌려보는 화수의 삶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미래가 기대되는 “총명한 아이”였던 화수가 부족할 것 없이 예쁘게 자라 결국 수치와 서러움 속에 놓이게 된 것이 그저 불가피한 삶의 속성이라고 말하고 말기에는 그녀는 자신의 불행이 좀더 특별하고 그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제발 죽여줘’라는 말이 결국 ‘살려달라’는 말일 수밖에 없듯 우리는 누구나 계속되는 불행과 해결이 불가능한 고난 속에서도 자기 삶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쉽게 체념할 수 없는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것이 “세계가 한 번 더 패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일지라도 말이다. 조연정(문학평론가)
2025년 여름, 김지연
김지연 「무덤을 보살피다」 (『자음과모음』 2025년 봄호)
선정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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