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의 「스무드」는 세계적인 미술가 제프의 에이전트이자 한인 3세대인 ‘나’(듀이)의 시선을 중심으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횡행하는 명백한 정치적 거짓들의 기원을 폭로하는 인류학적 탐구처럼 읽힌다. 이 소설의 문제적 성격은 제프의 작품 전시를 위해 처음 방한한 ‘나’의 한국에 대한 철저한 무지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나’는 한국을 “뱀술이나 개고기를 파는 상점이 즐비한 우범지대”가 가득한 곳으로 상상하는 인물이다. 물론 한국에 대한 그의 시대착오적인 인식이 단순한 앎의 부재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과의 연관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그의 의도된 자의식은,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 같은 ‘나’를 증명하고 싶은 욕망,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의 의지를 통해 관철될 수 있는 확고한 정체성을 향한 욕망과 긴밀하게 연동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가 처음 방문한 한국은 실제로는 상상과는 다른 곳이었다. “갤러리가 딸린 아파트가 있고, 그 갤러리에 큐레이터까지 상주해 있”는 고도로 자본화된 사회, “매끈한 세계”에 대한 속물적 욕망으로 가득한 한국은 ‘나’가 상상하던 낙후된 이미지와 어긋난 시공간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불일치가 도리어 ‘나’의 (무)의식적인 무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이런 나라인가.” 자본주의의 종주국에서 자란 나는, 그보다 더욱 자본화된 한국의 동시대적 일상을 보면서 모종의 혐오가 함축된 냉소를 표현한다. 이른바 한국의 자본주의적 풍경은 종주국(원본)을 모방하려는 욕망으로 탄생한 일종의 복사품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다음과 같은 발화 형식으로 무지의 앎을 완성한다. “한국은 이런 나라구나.”
그런데 흥미롭게도 한국에 대한 ‘나’의 무지, 또는 자기부정에 기반한 앎의 확고함은 종로로 향하면서 모종의 혼란으로 대체된다. 종로는 예측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과 낙후된 건물들, 그리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골목들과 현대식 고층빌딩이 공존하는 혼종성의 시공간에서 ‘나’는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한국은 이런 나라인가.” 현기증에 가까운 혼란을 느끼던 ’나‘가 다시 안도감을 찾는 것은 익숙한 앎과 대면하면서, 즉 종로의 “도로 한복판에서 성조기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들고, 뭔가를 격렬히 주장하는 사람들의 무리 한가운데에서 ‘미스터 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과 조우하며 한국에 대한 ‘나’의 앎은 조금 교정된다. “한국은 이런 나라인가.” ‘나’에게 한국은 이제 이런 나라이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낯선 사람을 따뜻하게 환대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다소 고령화되었지만 애국심으로 충만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좋은 사람들이 가득한 곳. “한국은 이런 나라구나.” ‘나’는 “성조기와 ‘타이극기’가 포개진 배지”를 선물받으며, 극우 집회에 한가운데에서 모종의 안도감과 소속감 그리고 귀향에 대한 감각을 얻게 된다.
어째서 이러한 오인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 앎의 층위, 즉 지식의 차원에서 이러한 오인은 쉽게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저 지금 이승만 광장에 있어요. 아주 좋은 사람들과 함께요] 광화문 광장을 이승만 광장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극단적 시각과 동조화된 ‘나’에게 그 어떤 정치적 악의도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정치적으로 명백한 거짓과 극단주의적 믿음이 근거하고 있는 무지의 진정한 본질일 것이다. 「스무드」는 오늘날 점차 확산되고 있는 극단화된 정치적 주장들의 정신분석학적 기원이, 무지의 앎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_강동호(문학평론가)
2025년 봄, 성해나
성해나 「스무드」 (『현대문학』 2024년 10월호)
선정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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