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현의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산책하듯 어떤 마음의 주변부를 헤아리며 우리의 취약한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가 무엇인지를 섬세하게 발견해나가는 소설이다. 특별한 사건과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이 작품에서 일어나는 일은 기은과 준영 사이에서 오가는 조용하지만 독특한 형태의 대화이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대화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동네의 작은 교회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의 내력을 지니고 있는지 등을 밝히지 않으면서도 관계를 이어나간다. “기은에게는 꼭꼭 감춰두었다가 불시에 톡 까놓을 만한 비밀이 없었다.” 사정은 준영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준영은 기은이 잠시 다니고 있는 교회 목사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것이 둘 사이의 관계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마치 두 사람이 함께 하는 탁구처럼, 둘이 주고받는 말들은 대화의 “고요한 리듬”을 형성하면서 투명한 관계를 이어나갈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둘에게 모종의 고백할 만한 사연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지만 이 작품을 감싸고 있는 슬픔의 정서는 기은과 준영의 삶 이면의 어떤 그늘진 내막을 암시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대화는 이러한 일련의 과거에 대해 토로하지 않은 채 각자의 감정과 정서를 세밀하게 주고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좀더 주목을 해야 하는 것은 대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 대화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토대와 그 원리이다. 서울의 외곽고속도로를 지탱하는 기둥에 새겨져 있는 낙서들처럼, 삶을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될 불행은 무수히 많은 적의·분노·슬픔 등의 어떤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은 지나치게 취약해서 때로 그것에 의해 일순간 무너질 수 있지만, 영원히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함께 있음을 느끼하게 하는 대화의 나눔을 통해 모종의 회복의 감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기현의 소설에서 ‘슬픈 사람’과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슬픈 사람’이 슬픔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슬픔에 종속되어 있는 사람에 가깝다면, ‘슬픈 마음 있는 사람’에게 슬픔은 자신이 잠시나마 소유한 어떤 것, 그리하여 세심하게 돌봐야 할 자신의 주체적 상태에 가깝다. 기은이 마침내 정체 모를 슬픔을 감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아늑함’을 느끼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기은은 준영과의 대화 속에서 마침내 타인의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자신의 슬픔과 결별할 수 있는 계기를 되찾는 것처럼 보인다. 손쉬운 공감과 위로가 강요되고 있는 시대에 정기현의 인물들이 전하는 대화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돌봄과 연대의 감각이 무엇인지를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이 소설을 윤리적으로 섬세하고, 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토대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_강동호(문학평론가)
2024년 가을, 정기현
정기현 「슬픈 마음 있는 사람」 (『문학과사회』 2024년 여름호)
선정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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