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긴 눈 속으로 또 한 번 눈을 감으면 죽은 것도 살아날 것 같아.”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한 대사처럼 어떤 이야기는 눈을 감았을 때, 그리하여 깊은 잠에 들었을 때야 다시 재생된다. 함윤이의 「천사들」의 얼개는 함께 영화인이 되는 꿈을 키워왔던 친구 항아를 만나러 가는 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간명하다. 부산까지 밤새 달려야 하는 무궁화호 열차에 앉아 거꾸로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항아와 보냈던 10여 년의 시간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항아를 떠올리며 동시에 눈을 감는다. 감긴 눈 속으로 또 한 번, 눈을 감았을 때 현실에서 끝내 이루지 못한 장면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구현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항아의 미완성 시나리오 「천사들」의 오디션 현장으로 나타난다. 오디션에 참여한 배우는 모두 열 명, 익숙한 얼굴들의 공통점은 모두 ‘나’와 항아가 함께 아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한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을 사람들이건만, 어째서인지 그들은 세 명씩 짝을 이뤄 맡은 배역을 충실하게 연기한다. 이별 위기의 연인 그리고 천사가 등장하는 항아의 시나리오에서 주목할 만한 건 아무래도 천사다. “관계에서 태어난 존재”이기에 관계가 끝나면 죽어버리고 마는 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심경의 변화 정도”의 “미묘한 영향”밖에 줄 수 없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연인이 헤어지지 않게끔 애쓴다. 흥미로운 점은 꿈속 오디션에서 연인의 이별을 막아보고자 고군분투하는 세 명의 천사가 실제로 ‘나’와 항아의 관계가 10년이 넘게 지속될 수 있도록 미묘하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너희가 죽어도 뒤에 길이길이 남는 거”를 만들라던 목 이모님, “나와 항아가 논쟁할 때”마다 등을 두 사람의 등을 쓰다듬어주던 선배, 졸작으로 여겨진 영화제 출품작에서 조금의 “가능성”도 “미래”도 발견하지 못했던 우리와 달리 “몇 달 내내 그 영화를 쓰고 찍고 편집하면서도 전혀 알지 못했던 어떤 미덕, 혹은 우리가 몰랐기에 만들어낼 수 있던 어떤 반짝임“에 대해 말해준 재우는 ‘나’와 항아에게 있어 진실로 눈에 보이는 천사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때로 주춤거리면서도 열여덟부터 지금까지 같은 방향으로 걸어올 수 있었다.
기차가 부산을 향해 가는 동안 꾸는 세 번의 꿈, 그러니까 세 번의 오디션이 치러지는 동안 잊고 있던 부분이 있다면, 오디션장에 입장한 배우는 열 명이지만, 실제 오디션을 치른 건 아홉 명뿐이라는 점일 테다. 자취를 감춘 한 명은 누구인가. 그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여러 의문을 남기지만, 그는 항아의 시나리오 속 천사처럼 ‘여기’에 있다. 보이지 않는 존재로, 그 안에서 “미묘한 영향”을 끼치며. 그렇다면 그가 태어난 관계는 배역을 나눠 가진 아홉 명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 ‘나’와 항아의 사이일 것이다. “너도나도 다 알 만한 얘기”로 10년을 만난 연인이 주인공인 시나리오는 감은 눈을 뜨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두 사람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세 번의 오디션이 끝난 뒤, 사실 이것은 우리의 무대이기도 하다는 걸 눈치챈 ‘나’는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해야 돼요?”라고 묻지만 “답 또한 들리지 않으므로,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한다”. 꿈속에서도 고집을 부리는 너의 말에 못 이긴 척 수긍하고, “나 한번 안아줄래?” 마지막 청을 하는 것으로.
긴 밤과 꿈을 지나 부산에 가야 했던 까닭은 소설에 말미에 이르러 해소된다. 항아를 만나러 가는 길은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예고된 헤어짐은 항아의 죽음으로부터 이어지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천사는 완전히 소멸해버렸을까? 함윤이는 잔잔한 슬픔 속에서 ‘나’와 항아의 영화에 있던 것과 같은 “어떤 반짝임”을 꺼내 보인다. 영원하지는 않을지라도, 어쩌면 내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연신 솟아오르고, 터지는 모양새로. 반짝이고 부서지는 움직임으로, 천사는 아직 우리의 곁에 있다. 이를 우리가 여전히 이어져 있다는 반증으로 삼을 수 있다면, 사실 관계라는 건 대상의 현존이 아니라 기억으로 지속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부재를 기억하고 그를 잊지 않는 것으로, 관계는 계속될 수 있다. 우리를 이루는 기억들이 희미해지는 어느 날에는 또 관계의 유효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반짝임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걸,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다. _소유정(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