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소연의 「그 개와 혁명」은 애도를 다루고 나아가 애도를 수행하는 소설이다. 이 애도는 우선 한 아버지에 대한 딸의 애도이다. 하지만 소설에 드러나는 맥락들을 고려하면 학생운동 세대, 혹은 ‘86’이라고 불리는 세대에 대한 애도로 보이기도 한다. 세대 간 차이와 얽힘, 정치적 감수성의 변화, 한 세대의 공과, 역사적 사건 등 크고 굵직한 맥락들을 환기한다. 그렇지만 소설의 애도는 결코 추상적이지는 않다.
화자의, 혹은 이 소설의 애도 방식은 독특하다.
장례식장에서 화자는 희극적인 역할을 연기한다. 태수 씨의 ‘지령’이라는 규칙을 스스로 부여하여 단독적인 연극을 진행하는 것이다. 장례식이 오래된 관습과 규칙으로 촘촘히 짜인 모종의 연극이라면, 주인공은 그 무대 위에서 자기만의 연극을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일반적인 장례 절차에서는 보전되거나 가시화될 수 없는 진실을 수복하는 셈이다. 여성은 상주(喪主)를 할 수 없다는 관습에 맞서 화자가 수행하고자 하는 진실은 “누구보다 태수 씨를 잘 알고 사랑했던 맏딸이 여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증명할 길은 달리 없”기에, 그 사랑은 자신의 수행 속에서 지탱될 수 있을 따름이다. 태수 씨를 간호하면서 화자가 오래 준비한 것은 바로 그 수행이다. 이 연극 연출은 ‘자신의 과거’를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어떤 관계들을 매듭짓는 일이다. 가령 화자는 태수 씨의 지인인 ‘성식이 형’을 연극 속으로 끌어들여, 아버지와의 관계에 남은 몫을 자신에게 결산하도록 한다. 화자가 기획한 연극은 법적이지 않은, 비공식적인 상속과 증여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소동과도 같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 진돗개 유자의 등장은 이 드라마가 만들어낸 귀결이다. 주인공이 진행하는 단독적 연극이, 장례식이라는 일반적 의례를 완전히 침범하는 순간이다. 서로 다른 규칙을 가진 두 연극의 얽힘이 전면화되는 순간.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전혀 다른 연극을 수행하는 인물과 상황의 ‘불일치’는 희극의 유서 깊은 요소다. 따라서 이 소설에는 (부모의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라는) 가장 오래된 비극의 소재와 강한 희극적 요소가 함께 있다고 볼 수 있다. 문득 튀어나오는 연극적 대사에 읽는 사람은 웃게 되고, 울다가 웃는 감정적 파고에 이끌려 다음의 질문들을 마주하게 된다. 살아가면서 겪는 오욕과 고됨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의 명암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를 끝없이 고민하게 하는 이 모든 모호함을 어찌해야 할까? 예소연은 쉬운 판단이나 규정을 물리치고 지연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소설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룬다. 이 지연은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로써, 애도 대상의 존엄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애도하는 자신의 남겨진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입체적’이라는 흔한 말에 담긴 모종의 진실을 극히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정서적 입체성 덕분에 많은 독자가 이 소설에 속절없이, 감정적으로 연루되고 말 것이다.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는 법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고 애도하는 일은 그 ‘미워할 수 없는’ 입체성 속으로 더 깊이 연루되는 과정일 것이다. 그것은 삶의 끔찍한 모호성과 다중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혹은 견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_이희우(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