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젊은 영화학도가 겪는 현실적인 갈등과 근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결합되어 있는 울퉁불퉁한 소설이다. 젊은 예술가들의 우정과 연대, 반목과 배제, 질투는 (지금도 있을 법하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이다. 젊은 예술가들이 겪는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과 업무상의 부조리, 집념과 외로움, 동료의 죽음도 현실적이다. 반면 엄청난 성능의 AI 프로그램이 시뮬레이션만으로 그럴듯한 영화를 완성해내는 것은 아직은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상상이다. 이 소설에는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이 역동적으로 뒤섞여 있다. 속도감 있는 문장이 이 역동성을 한층 강렬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하와이 사과’는 무엇일까? 아마도 영화 「매트릭스」에 나왔던 빨간 약과 반대되는 작용을 하는 약이 아닐까 싶다. 꿈을 깨게 하는 약이 아니라 꿈속에서 살게 해주는 약인 것이다. 그런데 현실이 이미 악몽 같은 것이라면 꿈속의 꿈과 꿈 밖의 현실이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AI가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낸 영화가 현실을 촬영한 것과 구분되지 않을 때, 고전적인 의미의 ‘리얼함’은 포르노에서만 보존될 수도 있다. 소설에서 영완 선배는―아마도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그러한 ‘리얼함’을 선택했지만, ‘나’는 하와이 사과를 먹고 차라리 다른 꿈을 지속하기를 선택한다. ‘리얼함’은 모니터 속에 있고 꿈속의 꿈은 ‘실재성’을 갖고 거리에 나타난다. 이 소설의 재귀적 구조는 그렇게 꿈과 현실의 전도된 관계를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재귀적 구조는, 어쩐지 고전적인 ‘영화적’ 느낌을 소설에 부여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영화는 흔히 꿈에 빗대어졌고, 또 하나의 현실을 ‘창조’하는 일에 빗대어지기도 했다. 근대에 예술은 기술과는 다른 것, 기술보다 우월한 어떤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고도로 발전한 기술―AI처럼 스스로 학습하는 기술―이 예술을 압도하게 된다면, 그리하여 ‘산업적’인 것과 ‘작가적’인 것 사이에 어떤 질적 차이도 없게 된다면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술이 예술성을 위협한다는 생각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 위협은 챗GPT 같은 발전된 AI가 보급되면서 새삼 생생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 소설 역시 그러한 위협을 다루고 있지만, 젊은 예술가들의 생활, 인간관계 속 심리적 갈등,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의 고뇌, 예기치 못하게 얽히는 사건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림으로써 위협을 새롭게 경험하고 고찰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