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희
못 하게 하는 언어는 간결하다. 붉은 동그라미에 빗금 그은 금지 표지판, 막대 두 개 사이 길게 늘어진 출입 통제선, 주차 공간 한가운데 놓인 주황색 고깔. 구구절절하지 않을수록 단호해 보이고, 꼭 지켜야 할 법처럼 혹은 도덕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선진의 「밤의 반만이라도」는 열세 살 아이들이 책상에 그어놓은 금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스물아홉 살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 시간을 관통하는 것은 너와 나를 구분하고 네가 머물러야 할 영역을 정하며 영역을 벗어난 행동은 배제하는 간명한 직선들이다. 사람들은 금에 근거하여 말하고 행동하며, 벌을 주거나 암시하는 방식으로 그 효력을 단단히 한다. 소설은 그런 가운데 물렁한 두려움이 만들어지는 시간과 그것이 깊이 고이는 장소를 비밀스럽게 펼쳐낸다. 비밀은 내내 말할 수 없게 하는 힘의 강도만큼 깊다.
이 이야기에는 금에 구애되지 않고 언제나 그것을 가볍게 넘어버리는 ‘너’가 있다. 소설은 ‘나’가 ‘너’에게 말을 걸며 기억을 짚어가는 방식으로 쓰이지만, ‘너’는 추억을 공유하는 대상이나 편지의 수신자처럼 가까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의 풍경에서 계속되고 있는 ‘경찰과 도둑’ 놀이에서 ‘너’가 도둑이라면 ‘나’는 도둑인 동시에 경찰이어서, ‘너’를 대하는 방법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나’에게 ‘너’는 어떤 금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기도, 전혀 다른 금 앞에 있는 타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장애, 퀴어, 청소년, 가족 서사를 다루면서 장애, 퀴어, 청소년, 가족을 특정한 문법과 독법 안에 가두지 않는 힘은, 이것이거나 저것이지 않음, 어느 한쪽을 ‘전부’로 만들어버리지 않는 ‘미숙’의 그러한 시점으로부터 나온다. 「밤의 반만이라도」는 너와 나를 자르듯 구분하고, 네가 머물러야 할 영역을 정하며, 영역을 벗어난 행동은 배제하는 그런 간명한 선들에 계속 지우개를 문지른다. 비록 그것이 지우개 똥을 뭉쳐 만든 지우개라 아무것도 정말로 지우지 않는 듯 보이더라도, 그래서 결말 없이 이어지는 미숙(未熟)의 상태, 미수(未遂)에 그친 이야기로 보일지라도.
이 소설에는 보는 일과 관련한 표현이 자주 나온다. 눈으로 보거나 보지 않고, 보는 듯 상상하거나 실제로 목격하며, 서로를 눈감아주고 못 본 체하거나, 누군가의 눈이 되어주기도, 누군가의 속을 들여다보기도, 무언가를 보는 눈을 갖기도 잘못 보고 판단하기도 한다. 조용히 무수해지는 표현들 속에서 ‘보다’라는 말은 어떤 금을 건드리고, 경계처럼 강화하고, 흐리게 만든다. 그 모든 말들이 있는 방식은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 모든 말들이 여기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다만 마주 보게 하기도 한다. 소설 속에는 ‘있다’와 ‘하다’가 서로 다른 말이 아니게 되는 장면이 있다. 이선진의 소설이 하는 일이 있다면, 우리가 언어에 그어놓은 금들을, 혹은 언어로 긋고 있는 금들을 오래 모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그런 소설이 여기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그 언어와 함께 나아갈 힘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간결하고 명료하지 않은 방식으로. 비밀은 만들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