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호
김기태의 「보편 교양」에 등장하는 ‘곽’은 통상 우리가 기대하는 교사로서의 면모를 완벽하게 구비한 존재처럼 보인다. 대학 입시가 최우선인 고등학교 교육 현장에서 그는 인문학 고전을 통해 학생들의 보편적인 교양과 바람직한 인성 함양을 꿈꾸는, 즉 진정한 교육에 대한 이상을 품은 드문 인물이다. “‘지문’이 아니라 ‘책’을 다루고 싶”(p.193)다는 ‘곽’의 포부는 철저하고도 꼼꼼한 수업 준비로 계획되며, 특유의 인문학적이고 개방적인 수업 분위기를 통해 구현된다. 그렇다고 그를 단순한 이상주의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곽’은 정치적 올바름에 민감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신념이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될 수 없는 현실을 잊지 않는 인물이다. 자유주의자이자 평등주의자인 곽의 이러한 균형 감각은 자신이 탐독한 명저들의 내용을 스스로의 삶에 일관되게 적용하려는 실천적 노력, 그리고 그것이 야기할 수 있는 폐해까지도 유머러스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반성적 자의식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곽’의 이상이 대한민국의 교육 현장이라는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그가 개설한 ‘고전읽기’ 수업은 학생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받았는데, 이러한 냉정한 현실 속에서도 교육에 대한 신념을 어떻게든 지키려는 ‘곽’의 자의식으로 인해 거듭 웃픈 내면 풍경이 연출된다. ‘곽’의 희극적 고군분투를 바라보며 우리가 모종의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은재’의 말처럼 곽의 지나친 ‘진심’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곽’의 진정성을 냉소하거나 조롱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상을 향한 그의 신념(“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이 직면하게 될 근본적 아이러니이다. 수업 시간에 『자본론』을 가르친다는 학부모의 우려 섞인 항의로 인해 발생한 긴장이 은재의 서울대학교 합격으로 급격히 해소되는 순간 ‘곽’은 성공의 기쁨을 누리는 대신, 더 큰 패배의 덫을 직감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을 ‘파괴’시키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동시대의 힘, 푸코라면 자본주의적 통치성이라고 불렀을 바로 그 메커니즘이다. 곽이 맛본 파괴 없는 패배의 경험은 어쩌면 파괴를 통한 자기 증명도 허용하지 않는 시대, 비판적 저항의 토대가 붕괴된 시대에 처한 우리의 보편적 형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곽은 패배한 것이고, 앞으로도 거듭 파괴 없는 패배를 경험하게 될 것인가. 김기태 소설 특유의 위트 넘치는 거리 두기의 시선 속에서, 곽의 진정성이 처하게 될 아이러니의 미래에 관심이 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소설은 마지막을 이렇게 결론짓는다. “나는 『자본론』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수업을 했다.” 소설은 곽의 자기반성이 『자본론』 읽기로 이어질 것이고, 진정한 교육에 대한 곽의 진심이 재정립될 것임을 예고한다. 그렇다면 곽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무엇일까. 그는 여전히 파괴 없는 패배를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끝내 파괴로서 자신의 진정성을 비극적으로 증명할 것인가. 어쩌면 적절한 질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보편 교양」이 그리고자 했던 것은, 일견 통속적이고 빤해 보일 수 있지만 파괴나 패배로 온전하게 환원되지 않는 삶,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지속에 대한 지지와 경의처럼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극히 현실주의적이면서도 이상주의적인 이 소설의 지적인 이중성을 통해, 우리의 동시대적 조건을 아이러니하게 되비추는 탁월한 거울 하나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