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을, 전하영

전하영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릿터』 2023년 6/7월호)

선정의 말

조연정

‘3가구 중 1가구가 혼자 사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1인 가구 담론은 청년 세대나 노년 세대에 집중되어 있고 중년 1인 가구의 경우에는 주로 이혼이나 ‘기러기 아빠’로 혼자가 된 남성의 사례로 다루어지곤 한다(김희경, 『에이징 솔로』, 동아시아, 2023). 곧 50대를 앞두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줌마’라는 단어에 불편함을 느꼈으나 이제 주변의 친구들이 실제로 누군가의 할머니가 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중년의 독신 여성으로서 느끼게 되는 여러 혼란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전하영의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는 그런 점에서 특별하게 읽히는 소설이다. 흥미로운 점은 숙희에게는 자신을 보호해줄 안전한 둥지가 없다는 불안보다 오히려 자신이 누군가의 공식적인 보호자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심적 불편함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중년의 여성이 어떤 식으로든 돌봄 노동의 주체가 되지 않은 채 스스로 독신의 삶을 편안하게 즐기고 누린다는 것이 어떤 결핍처럼 느껴질 만큼, 여성의 생애주기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이 견고하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어리고 젊은 여성은 대상화되고 나이든 여성은 누군가의 조력자로 주변화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거칠게 이런 식으로 요약될 수도 있다.

“자신이 나뭇조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선을 끌지 않으려 노력했다”라는 소설 속 숙희의 말처럼 한국 사회에서 나이든 여성은 대부분 잊힌 존재에 가깝다. 공식적인 사회적 역할 속에서도 많이 배제되고 그녀들의 다양한, 그래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노동은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 여성이 특정한 방식으로만 대상화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 나이든 여성은 점점 없는 존재에 가까워진다. 경제적인 불편함 없이 자신의 삶을 멋지게 잘 꾸려가는 숙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평온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는 듯 보이는 것은 한국 사회의 고정된 여성적 삶의 패턴으로부터 일탈해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혼자 사는 중년 여성의 삶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공통된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인식될 만큼의 다양한 참조점이 그녀에게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 남자와의 연애가 부끄럽다든가, 아이를 필사적으로 원했던 시기가 있다든가, 이 소설의 어떤 설정들은 다소 전형적이고 나아가 보수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중년 독신 여성의 내면을 공적으로 확인할 기회가 적었다는 점에서 날 것 그대로의 숙희의 마음을 읽는 것이 오히려 반갑기도 하다.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모성’ 욕망으로부터 탈피하여 같은 또래 독신 여성 윤미를 만나러 15년 만에 비행기에 오르는 숙희의 결단은, 그녀가 위태로운 ‘싱글’의 삶을 청산하고 완전한 ‘솔로’의 삶을 편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결심을 드러내는 듯도 하다. 이러한 모범적인 결론도 다소 전형적일 수 있지만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든다.

숙희와 유사한 삶을 살았던 그리고 현재 살아가고 있는 많은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숙희가 자기 삶에 안심하고 만족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서로에게 보여지지 않아서였기 때문일 수 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수만큼 우리에게 가능한 삶의 양태도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어떤 성별인가로 결혼의 유무로 자녀가 있고 없음으로 나이가 많고 적음으로 어떤 일을 하는가로 성한 몸인가 그렇지 않은가로, 우리 모두가 똑같이 정해진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누구의 삶도 예상대로 흘러가서 정해진 대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우연히 마주한 지금 나의 현재와 관련하여 특별히 자만할 것도 특별히 절망할 것도 없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불안할 것도 충분히 안심할 것도 없다.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겸허한 마음 그 자체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 어떤 상태이건 우리 모두는 숙희처럼 열린 결말의, 특별한 공식이 없는, ‘실험영화’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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