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강동호
성인 수영 기초반에서 우연히 만난 곽주호와 문희주는 수강생들 중에서도 유독 수영에 재능이 없는 인물들이다. 문제의 발단은 주호가 수영에 소질이 없을 뿐만 아니라 눈치마저 없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시작된다. “자기가 잘한다 싶은 사람은 알아서 앞줄로 나오시고, 못하시는 것 같으면 뒤쪽으로 서세요.” 주호는 강사의 지시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앞줄에서 연습을 계속하고, 의도치 않게 매시간 수업의 흐름을 방해하기에 이른다. “잘하는 사람은 앞줄, 못하는 사람은 뒷줄. 그건 딱히 수영 클래스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뭘 하든 단체 활동의 당연한 규칙이었다.” 단체 활동에만 적용되는 규칙이 아닐 것이다. 역량과 능력에 따라 자리와 위치가 결정되는 것은 경쟁과 투쟁으로 가속화된 이 세계의 엄연한 질서이다.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면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조롱받고, 결국 세계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다. 이른바 눈치는 능력에 따라 위계와 서열이 부여되는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 감각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주호가 애초부터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가 나름 유능한 직장인이었지만 외국인 노동자 카샤의 죽음 이후 설명할 수 없는 책임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요컨대 주호의 ‘눈치 없음’은 자본주의적 생산 체계로부터 이탈한 주체에게서 발견되는, 일종의 실존적 징후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한편 희주 역시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주호와 사정이 그리 다르지 않다. 학창 시절의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선망하는 의대에 진학하기를 거절하는 희주, 최소한의 지출만으로 삶을 이어가다 결국 교단을 떠나게 된 희주 역시 자신의 역량을 최대로 발휘해야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부합하는 존재가 아니다. 주호에게 없는 것이 눈치라면, 희주에게 결여된 것은 바로 욕망이다. 그를 사로잡는 유일한 사안은 기후 위기로 꿀벌이 멸종하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인류가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확신뿐이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다. 잘하면 30년 뒤에. 다 같이 죽는 거지.” 기후 위기로 인해 우리 모두가 죽을 운명이라면,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노력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 의미에서 희주의 ‘욕망 없음’은 자본주의의 끝을 확신하고, 그것을 바라는 주체들의 어떤 우울증적 공통감각을 반영한다고 해야 한다.
이처럼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는 주호의 ‘눈치 없음’과 희주의 ‘욕망 없음’을 통해 자본주의가 불러온 위기의 두 측면, 즉 경제적 불평등과 생태학적 위기의 중첩 속에서 촉발된 정동을 흥미롭게 형상화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21세기적 바틀비에 가까운 주호와 희주의 만남을 계기로, 새로운 정치적 연합의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탐구된다는 사실이다. 수영 강사의 폭력과 수영장의 불합리한 운영 방침에 항의하는 수강생들의 예기치 못한 봉기는, 자본주의적 생존 투쟁과 욕망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정동이야말로 새로운 정치적 감수성의 근본 토대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는 브루노 라루트가 ‘생태학적 계급’(ecological class)이라고 명명한, 새로운 정치적 네트워크의 출현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예고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과연 이들의 규합이 폭주하는 자본주의를 멈춰 서게 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우리들 사이에서 배회하는 반자본주의적 정동이 다음과 같이 은밀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21세기의 바틀비들이여, 단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