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봄, 강보라

강보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문학과사회』 2022년 겨울호)

선정의 말

강보라의 소설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인간관계에서, 특별하거나 일상적인 순간들에서,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일생 내내, 우리가 구별 짓고 또 구별 지어지기 위해 얼마나 빼곡하게 애쓰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만든다. 모두가 ‘게스트’로서 머무는 여행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서술자인 ‘나’와 몇몇 인물들은 어떤 방을 쓰는가, 어떤 연령대인가, 어떤 성별인가, 어떤 소지품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지역의 언어와 어떤 종류의 어휘를 쓰는가 등을 기준으로 끊임없이 타인을 판단하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들이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과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하는 말 조각들은 언제나 구별 짓기의 결과로서 선택된다. 이때 겹겹의 구별들은 선명한 우월감이나 동질감 혹은 모욕감 등의 감정으로 모양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원주민’으로, 누군가는 ‘외국인’으로 구분하여 부르는 것처럼, ‘조련사’와 ‘관광객’과 ‘탈 것’으로서의 ‘코끼리’를 구분하는 것처럼, 무엇을 느낄 필요 없는 마땅함으로 구별은 감추어지기도 한다. 서술자인 ‘나’는 ‘놀이’처럼, 습관처럼, 스스로를 ‘인정’하기 위한 방법처럼 가장 적극적으로 구별을 만들고 느끼고 읽어낸다.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를 읽는 일은 그처럼 항시적으로 빽빽한 자기의식과 타인에 대한 의식의 편향을 내내 마주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서사를 더 적극적으로 이끌어가는 마음은 구별하고자 하는 마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나’가 “그들 사이에 섞이고 싶은 마음과 그들 사이를 엉클어뜨리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거듭”(p. 34)할 때, 혹은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기를 “맹렬히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깨달”(p. 46)을 때, 그에게는 구별 짓기를 통해서만 자신을 승인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불안한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문득 만져진다. 그것은 타인과 구별 없는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이나 온전한 자기 자신을 찾고자 하는 욕망보다는, 우붓으로의 짧은 여행처럼 다만 구별 짓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자 하는 욕구에 더 가깝다. ‘애나 패서디나’의 ‘동적 명상 프로그램’ 영상과 ‘동적 명상 워크숍’에 대한 ‘나’의 욕망 역시 그와 멀지 않다.
여행의 계기이자 이례적 경험의 배경이 되는 패서디나의 워크숍은 ‘나’에게 벗어남의 방법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구별 짓는 습관과 구별 짓기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나’의 안에서 조합되어 있는 방식을 보여주는 일종의 ‘예술적’ 구현물로서 역할을 다한다. 예술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타인에게 인정과 신뢰를 받는 한국에서의 생활과 “그런 미술”(p. 45)과는 ‘다른’ 미술에 관해 책을 집필하는 작가로서 대우받는 발리에서의 생활을 ‘나’의 언어로 겹쳐두는 자리로서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애나 패서디나의 프로그램을 경유하여 결국 ‘나’의 구별 짓기의 조건이 되는 예술계의 구별 짓기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문학 텍스트-작품으로서 이 소설이 스스로 놓이는 위치에 관해 질문하게 한다.
패서디나의 영상은 소리와 화면과 영상 안팎에서 움직이는 몸으로 구성된다. 이때 몸은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하는 말처럼 “타인의 움직임까지 사심 없이” 받아들이며 “숨은 충동”을 찾아 “즉흥적으로”(p. 15) 움직일 것으로 기대되고, 소리는 몸을 추동할 조건이자 구별을 무화할 배경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화면은 그 반대의 역할을 수행한다. ‘나’가 말하듯 영상은 소리에만 집중하기를, 그것과 조응하는 마음가짐에 집중하기를 제안하는 와중에도 ‘패서디나’라는 이름만큼이나 미국 특유의 장소성을 전면화하면서 프로그램의 차별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에 몰두한다. 구별 없음을 추구하는 자리에서도 구별이 작동하게 하는 이 화면의 방식은 ‘나’가 ‘춤추는 원주민 소녀 그림’에서 읽어내는 시선이나 그 스스로 ‘송기호’의 사진을 ‘예술적’인 사진들과 구분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워크숍 현장에서 소리에 따라 즉흥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대신 패서디나의 움직임을 ‘보고’ 따라하는 것처럼, ‘나’에게 보이는 것, 화면의 방식은 가장 이질적인 환경에서도 경험의 근간이 되고, 대상의 특성을 읽어내는 시선이 되며, “뱀과 양배추가 있는 그림”이나 “가장 좋아하는 사진 한 장”(p. 59)처럼 기억과 사람을 차별화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서디나의 영상도, 워크숍도, 그 현장성에 함께 하기를 기도하는 ‘나’도 스스로가 구별을 무화하는 움직임을 지향한다고 믿는다는 것, 그리하여 화면 없이도 충실히 몸을 움직이는 ‘호경’ 같은 인물을 그 믿음을 지속시켜줄 장치로 요청하게 된다는 것이 이 소설 속 구별 짓기의 핵심일 것이다.
소설의 서술자인 ‘나’가 호경이라는 인물을 자기 안에 위치시키는 방식은 ‘나’에게 호경을 그처럼 무게감 있는 인물로 여기게 함으로써 이 소설이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자 하는가를 판단하는 일과 멀리에 있지 않다. 늑대 흉내를 내 원숭이를 쫓고, 늑대가 되어 워크숍의 분위기를 바꿔내며, ‘나’가 하지 못하는 요가 자세를 할 줄 알고, 자신을 경계하는 ‘나’에게 거듭 신체 접촉을 하던 우붓의 호경이 사람들이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도는 현장을 촬영하여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 ‘서호경’으로 연결될 때, ‘나’가 호경의 움직임과 호경과의 접촉의 순간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호경이 연관된 그림과 사진에 무게감을 부여하며 전시회에서 호경이 보여준 시선에 무력감에 젖을 만큼의 추를 올려놓을 때, ‘나’는 호경을 구별된 자리에, 구별되는 사람으로 위치시킨다. 그렇다면 ‘나’가 호경을 차별화하는 방식에 이 소설은, 소설을 쓰는 작가는 동의하고 있을까. ‘나’에 대한 작가의, ‘나’가 보는 호경에 대한(‘나’가 보지 않는 호경은 소설 안에 없다) 작가의 시선의 위치는 어디일까.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을 이번 계절에 함께 곱씹어 읽어보고자 선정한 배경은 멀리 돌아 바로 이 물음에 있다.
일인칭 단수의 서술자가 이야기를 쌓아나간다는 점이나 ‘나’의 이야기가 예술계의, 여행지의, 일상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옮겨놓고 있다는 점이 ‘나’의 시선과 작가의 시선을 동일한 것으로 상정할 수 있는 자동적인 조건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동시에 작가가 무대를 구상하고 그것을 화면에 담고 제목을 붙여 자신의 이름 위에 쌓여갈 작품으로 발표할 때, 작가 스스로 자신으로부터 독립된 작품의 고유성을 염두에 두든, 뜻하는 바에 닿기 위한 방법으로서 작품과 자신을 밀착된 관계로 보든, 자신의 의도 안에 우연성과 불연속성이 개입되게 하여 작품과의 관계를 헐겁게 하든, 작품은 결국 작가 자신이 어느 위치에서 어떤 언어를 획득하여 발화하는 자인가의 문제와 무관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각각 “예술의 순수성”(p. 19)을 옹호하거나 예술이 “세상을 변화시키리라 기대하는”(p. 36) 믿음을 간직하거나 “소통의 불가능성” 속에서 느끼는 “일시적인 감흥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p. 57)이라는 입장에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동안, 그들을 구별하고 구별된 것들 사이에 차등을 두어 무게를 부여하는 소설 쓰기의 과정에서, 제목이 이미 구별을 드러내는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을 쓰는 작가 강보라는, 문학 텍스트-작품으로서 이 소설의 위치와 창작자로서 작가의 위치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그가 만들어갈 문학의 세계는 앞으로 그러한 화면을 어떻게 마주하고 감당해 갈까. 그것을 신중히 헤아려보려는 마음은 마찬가지로 어떤 위치에서 ‘보는’ 일을 반복하는 문학의 독자로서 나의, 우리의 자리를 가늠해보려는 마음과도 무관하지 않다. 문학을 둘러싸고 우리가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움직이고 있다고, 움직임을 추구하고 있다고 믿을지 모른다. 그 믿음의 윤곽을 이 소설과 함께 더듬어볼 수 있을까. _홍성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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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라 소설가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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