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겨울, 백수린

「시간의 궤적」(『자음과모음』 2018년 겨울호)

선정의 말

언니, 고마워요.

백수린, 시간의 궤적

 

가족처럼, 같은 공간 안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그 관계의 성격이 항상 같을 수는 없다. 대개는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리고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혹은 말 못 하고 쌓여온 감정들에 의해서, 우리가 맺는 여러 관계들은 수시로 그 무늬를 달리하게 된다. 분명 즐거웠던 관계가 갑자기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서운함을 느끼기도 하고, 미워했던 사람을 연민하게 되기도 하며, 의외의 사람이 고마워지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의 변화는 우리가 늘상 겪는 일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맺는 다양한 관계들은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주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자신이 맺는 관계에 대해 지속적인 확신을 갖기 힘들지도 모른다. 프랑스 파리에서 우연히 만나 단기간에 급속도로 가까워졌다가 이제는 연락마저도 두절되어 버린 어떤 “언니”를 회상하는 백수린의 「시간의 궤적」은, 만났다가 헤어지기도 하고, 좋았다가 어긋나기도 하면서, 그렇게 우리의 한 시절을 스쳐가버린 어떤 인연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남들은 안정을 찾아갈 나이인 서른에 자신의 꿈을 좇아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선택한 “나”의 눈에 비친 “언니”는 반짝거리는 사람이었다. “왜 그렇게 독하고 이기적이니?”라는 남자 친구의 말을 뿌리치고 서른 중반의 나이에 파리 주재원의 자리를 선택한 그 결심이 멋져 보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남자를 잊지 못해 외로운 밤마다 그에게 전화를 걸기도 하는 “언니”의 “바보스러운 면”이 인간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자음과모음』 겨울호, p. 61. 인용 시 페이지만 표기). 좋아하는 취향이 딱 맞는 것도 어쩐지 운명처럼 느껴졌다. “언니”는 여러모로, 낯선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나”의 불안과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적절한 상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 그곳에서의 정착을 선택하게 되면서, 그러니까 서로가 처한 상황이 결국 달라지며, 당연히 그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몸 가벼운 “언니”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 “나”의 두려움과 막막함을 어루만져줄 상대가 더 이상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간의 궤적」은 “언니”에 대한 이러한 감정의 변화를 매우 감각적으로 표현해낸다. ‘언니’와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 속 파리는, 흩뿌리는 비의 습기가 “얇고 부드러운 껍질처럼 우리를 감쌌”(p. 64)던 따뜻한 곳으로 기억되지만, ‘나’의 불안과 외로움이 커갈수록 그곳은 시원스레 비도 내리지 않는 그저 “차고 습한 곳”(p. 70)으로 변해버린다. 이러한 감각의 변화를 찾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재미 중 하나이다.

「시간의 궤적」은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는 그곳에 안정적으로 정착한 “내”가 오래전 만났다 헤어진 “언니”를 회상하는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어긋나버린 관계를 아쉬워하거나, 자신의 ‘불안’을 상대에 대한 ‘불신’으로 뒤바꿔 그 관계를 망쳐버린 스스로를 자책하는 소설로 읽히지는 않는다. “길을 잃었다는 느낌에 사로잡”(p. 70)혔던 그 시절 자신을 지탱해준 “언니”에게 오히려 뒤늦은 고마움을 전달하는 소설로 읽힌다.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는 비는, 아니 시원스레 비로 내리지 않는 습기는 “나”의 그런 먹먹한 마음을 아름답게 전달한다. 이름을 뺀 그저 “언니”라는 다정한 호칭에서도 그러한 마음이 전달된다. 우리가 맺는 어떤 관계는 우리를 외롭게 하기도 하고,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와중에도 우리의 일상을 스스로 의연하게 지킬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누군가가, 어느 시절에라도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 “언니”가, 남자친구인 “브리스”가, 그리고 자신의 아이가 그랬듯 말이다. 때마다 그 상대가 달라지더라도, 그런 관계들에 기대어 사는 것이 그렇게 이기적인 선택만은 아닐지 모른다고 이 소설은 위로하듯 말해준다. 누구에게나, 아니 “나”와 “언니”처럼 온갖 편견에 노출된 이 서른의 여성들에게는 어쩌면 더더욱, 한 줌의 위로마저도 없다면 견딜 수 없는 세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언니는 이내 우산을 접어 들더니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지금도 그날을 추억하면 빗속을 뛰어가는 언니와 나의 모습은 손끝에 닿을 듯 생생하고,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울고 싶어진다. (p. 78)

「시간의 궤적」의 이 마지막 구절을 읽으며, 나는 내 인생을 스쳐간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이 소설의 “나”처럼 어쩐지 울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저 ‘울고 싶은 마음’의 깊은 곳에 회한에 휩싸인 “차고 습한 기운”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안도의 온기가 촉촉하게 배어 있음을 알 것 같다. “언니”가 있었기에 그 시절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는 안도의 고마움 말이다. _ 조연정 (평론가)

관련 작가

백수린 소설가

백수린은 1982년 인천에서 태어나 연세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거짓말 연습」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폴링 인 폴』 『참담한 빛』이 있다. 2015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2018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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