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시인

두보杜甫(712~770)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으로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이백(李白, 701~762)과 더불어 중국 최고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 두심언(杜審言)의 손자로 7세 때부터 시를 지은 그는, 독서와 유람으로 견문을 쌓으며 벼슬길에 나아갈 준비를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735년 진사 시험에 떨어지자 다시 유람을 떠나고, 이백, 고적(高適)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755년 마침내 작은 벼슬을 얻었으나, 한 달 뒤 안녹산의 난으로 당 제국은 붕괴 위기를 맞는다. 이때 떨어져 살던 가족을 만나러 간 두보는 어린 아들이 굶어 죽은 사실을 알고 장시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며 회포를 읊어(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남겼다. 반군에 억류되었던 두보는 목숨을 걸고 장안을 탈출해 숙종(肅宗)을 배알한 공을 인정받아 벼슬을 얻었으나, 정쟁 속에서 파직당했다. 지방 관리로 좌천된 두보는 벼슬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떠난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 사회시로 유명한 「삼리(三吏)」와 「삼별(三別)」이다.

엄무(嚴武)의 추천으로 다시 벼슬을 받기도 했으나, 끝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혼란스러운 세상과 피폐한 서민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 열성적으로 시를 창작했다. 768년 이후 그는 주로 선상에서 생활했고 궁핍한 가운데 건강이 악화되어 배 위에서 사망했다.

두보의 시는 사회 현실을 잘 반영하여 ‘시로 쓴 역사’라는 의미에서 시사(詩史)라고도 불리며, 침울비장(沈鬱悲壯)한 풍격의 시가 많다. 여러 시체에 능했으며, 특히 율시(律詩)와 고시(古詩)에 탁월했다. 두보는 중국고전시사에서 집대성적 성취와 창신(創新)의 업적을 겸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시성(詩聖)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