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보다 망각이 비대해진 나이가 되었다.”
존재의 어설픈 운명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뼈아픈 자기 세대를 위한 ‘구리거울’ 닦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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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사회에 대한 백가흠식 탐문과 자기 성찰의 고행
백가흠의 네번째 소설집 『四十四』가 출간되었다. 일상을 날카롭게 해부하여 거친 폭력성의 심연에서 다부진 진실 탐문 작업을 계속해온 등단 15년차, 사십대에 이른 작가의 자기 성찰이 돋보이는 이번 소설집에는 2011년부터 발표해온 아홉 편의 작품이 실렸다. ‘어쩌다 어른’이 된 우울한 사십대들이 여러 작품 속 다양한 이야기들로 한 궤를 같이하는 이 책에서 앞선 세 권의 소설집을 통해 단계적으로 이룬 작가의 성숙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사람살이의 그늘을 포착해 ‘인간’ 안에서의 내부고발을 담당해온 ‘생체 정치적 상상’의 시기와, 자신을 둘러싼 혼란스런 현실에서 자신과 사회와의 결합할 수 없는 관계를 그린 ‘사회 심리적 상상’의 시기를 지난 지금 작가는 ‘한 박자’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생애 전환을 치르며 맞이한 사십대에 작가는 늦은 성인식을 치르듯 자기 세대에 천착해 극대화된 자기 연민을 세대의 연민으로 극화한다. 작가의 성숙이 ‘존재론적 성찰의 미학’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소설집 『四十四』는 작가 자신과 우리 세대의 자기 반성을 바탕으로 유기적이고 밀도 높은 완성도를 선보인다. 불편한 진실에 가닿는 고통스러운 일, 외면하고 싶은 모습의 속절없는 경험 등 진실 발견을 위한 특유의 고행이 계속되는 가운데 당대 한국, 당대 인간에 대한 작가만의 성실한 고백이, 소설을 쓰는 일이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것처럼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사사’ 세대의 비망록―눈 있는 삶의 거룩함
고등학생 때 88올림픽을 경험하고 이십대엔 외환위기를 경험하고 삼십대엔 고작 실존적 울분을 월드컵 응원전에서나 집단적으로 발산했던 사십대들의 이야기가 각각의 연결고리를 통해 이어진다. 세대 연구에서 발견되는 코호트 효과(비슷한 시기에 출생하여 역사적 사건들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유사한 가치관, 태도, 행위양식을 갖게 되는 효과)를 염두에 둔 듯 백가흠은 소설집 전 작품을 가로질러 자기 세대가 갖는 신산한 풍경을 끊임없이 되비춘다. 지향하는 가치와 누추한 현실 사이에서 존재의 어설픈 운명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이전 세대와의 특별한 변별점도 없고 자기 세대의 응집도 이루지 못한 ‘사사’세대에 대한 천착을 두고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과거 기억과 현재 실존 사이의 불안한 길항으로 얼룩진, 그 흉몽으로부터 혹은 모멸적인 삶으로부터 수직적 초월의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백가흠이 그린 ‘사사’(四十四)들은 일정한 성취라든가, 안정이라든가 지천명(知天命)을 예비하는 차분한 성찰이라든가, 하는 부류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이 정녕 문제인데, 그 문제를 풀어나갈 개인적 사회적 방정식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질병보다 더 심한 절망을 앓고 있다”고 말한다. 바쁘게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잘못된 인생이라는 좌절을 경험할 때, 마주하게 되는 사십대들의 면면은 그만큼 뼈아프다. 「더 송The Song」은 무례하고 이기적인 ‘장문철’의 기억 속에서 대학 시절 개 주인에 대한 미움으로 흰 개를 거리로 내몰아 죽게 한 일을 끌어올리며, 「흰 개와 함께한 아침」에서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제와 오늘이 왜 다른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주인공이 달리는 차에서 흰 개를 창밖으로 버림으로써 자기 인생을 구원하려 하지만, 어제와 다른 오늘을 끝내 인식하지 못한다. 「四十四」와 「네 친구」에서는 사십대에 괜찮은 직업, 오래된 친구가 있지만 잘못된 연애의 기억, 불의의 사고로 인한 아픔, 상처를 주고 받는 관계 때문에 ‘명품 구두’와 어울리는 삶을 살지 못한다. 이러한 백가흠식 탐문은 자기 세대를 고백함과 동시에 구리거울을 닦는 듯한 성찰의 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입술 없는 삶의 비애
「아내의 시는 차차차」의 화자는 백화점 문화센터 ‘시 창작 교실’에서 드러난 실업자와 실패자의 이미지를 극복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알려지지 않은 시를 짜깁기해 등단을 하고 다른 수강생들에게 ‘시 선생’ 대접을 받게 된다. 「흉몽」의 주인공 역시 유능한 편집자가 되었지만 문청 시절의 동지였던 친구 작가를 모함해 곤경에 빠뜨리는 등 오만을 거듭하다 어느 날 잠든 사이 입술이 도려내지는 사고를 당한다.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홀로인 이 애처로운 사십대들은 ‘문학’과 관련된 일에 몸담고 있지만 ‘시적 정의’를 잃은 사람들이다. 문학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지금처럼 무의미할 수 없지만, 결국 문학은 삶의 의미 없음의 밑바닥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 아닐까. 작가는 “자기 세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어쩌다 길을 잃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길에서 밀려난 모멸감이 얼마나 자심한지,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시커먼 심연’에 갇힌 세대의 불안과 공포가 얼마나 큰지,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우찬제) 이렇듯 진실에 대한 충성으로 현실의 배반과 딜레마, 함정 등을 고발하는 일에 성실했던 작가 백가흠이 현단계 우리 문학의 어떤 수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입술 없는 자’, 말하지 못하는 자의 표상은 백가흠이 작가로서의 자신을 벼랑 끝에 세우고 있음을 증명한다. 작가는 그렇게 삶을 구원하기 위한 글쓰기를 지속할 것이다. 그것이 희망 없는 곳에서 희망을 찾는 문학만의 방식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왔고, 그를 보자 오래전의 일이 떠올랐고,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난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사실은 그를 한 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외면하고, 망각하려 애쓰던 과거의 시간이 우연히 만난 그 때문에 너무나 선명해졌다. 나는 왜 내 인생이 그렇게 삐뚤어졌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한 박자 쉬고」, p. 36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이 모든 일이 30년 전 그 흰 개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장구에 대한 부채감, 그것이 지금까지도 자신을 되돌릴 수 없는 인생으로 살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속으로 ‘죽은 미현을 찾아서라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더 송The Song」, pp. 55~56
스무 살, 그때도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덕분에 그는 살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법을 일찍 체득했다. 자신을 잊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자기의 주장도 없어야 했고, 정치나 그 밖의 사회에 대한 인식 같은 것도 불필요했다. 그에겐 생존만이 필수적인 것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쓸모없고 쓸데없는 일이었다.
「흰 개와 함께하는 아침」, pp. 95~96
그는 사람이 때로 설렁설렁해 보였지만 시에 관한 한, 특히 읽는 것에 관해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안심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뭘 알아야 비싼 것을 훔칠 텐데, 나는 시에 무지했다. 나는 주로 1960년대에 발간된 잡지를 뒤적였다. 잡지 한 권에서 시 한 편씩, 복사를 했다. 시가 좋아 보여도 인터넷으로 시인 이름이 검색되면 버렸다. 무명의 시인으로 남은 사람의 것만 추렸다. 시 한 편에서 근사해 보이는 한 구절씩을 발췌해서 짜깁기했다.
「아내의 시는 차차차」, pp. 146~47
그가 돌아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나는 커터 칼을 꺼내 그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나는 누구의 입술이라도 베어야만 했다. 그가 얼굴을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이런, 미친 새끼.”
나는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제 입술은 필요 없다. 집에서 경찰을 기다렸지만 나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름이 되어도 친구나 경찰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철저히 혼자였다.
「흉몽」, p. 188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해서 부모님의 시신을 경찰로부터 인도받았다. 차가 절벽을 굴렀다고 했지만 시신은 깨끗했다. 평온하게 누워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자 남매는 그나마 조금 안도했다. 타고 갔던 배에 부모님의 시신을 싣고 다시 포항으로 돌아왔다. 슬퍼할 겨를 없이 둘은 다시 멀미 때문에 녹초가 됐다. 울다 토하다 쓰러져 잠들었다. 포항을 떠난 지 열두 시간 만에 포항으로 되돌아왔다. 시신을 싣고 서울에 올라오니 다음 날, 새벽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7일 만에 장례를 마쳤다.
「四十四」, pp. 224~25
기억 속에 가라앉은 시간의 끝은 뾰족한 바늘처럼 생겨서 복원해내면 따끔하게 마음의 가장자리를 찌르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카로운 시간의 기억을 다시 찾지 않을 만큼 깊숙한 곳에 숨겨놓는다. [……] 그 끝을 기억하지 못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왜 상처받고 상처 주는지 모른 채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간다.
「네 친구」, pp. 244~45
“봤어? 나이는 곱절이나 처먹어서. 애만큼도 삶의 철학이라는 게 없어. 바로 그거야, 차이. 저들이 버티는 이유, 인간으로써 권리 어쩌고 하는 거 말이야. 그런데 아니거든, 세상은. 시바, 이런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거잖아. 시바, 이 세상은 원래 졸라, 불평등하거든. 그걸, 아니까 민주주의 하자고 난리인 거 아니야. 민주주의 그건 언제나, 미래의 일이란 얘기야. 자본주의에서 무슨 평등이야, 시바. 자본주의에서는 자본만 평등한 거야. 알겠어?”
「사라진 이웃」, p. 278
천길 낭떠러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깊이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거대한 홀, 마치 시커먼 심연을 바라보고 선 것 같았다. 그가 슬금슬금 옆으로 걸음을 옮겨보았지만, 왔던 길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 좋지 않았다. 바위가 그가 있는 쪽으로 치우쳐 있고 경사도 심해서 아예 넘어갈 수조차 없었다.
돌계단을 오른 지 두 시간여 그는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돌아오지도 못한 채 절벽 위에 서 있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구름을 몰고 오는 바람에게 살려달라 외치는 일뿐이었다.
「메테오라에서 외치다」, pp. 333~34
한 박자 쉬고
더 송The Song
흰 개와 함께하는 아침
아내의 시는 차차차
흉몽
四十四
네 친구
사라진 이웃
메테오라에서 외치다
해설_‘한 박자 쉬고’. 그 시간의 대화/우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