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랄리아스, 언어메아리,
결코 잦아들지 않는…… 메아리…… 언어
금세기 가장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학자 대니얼 헬러–로즌의
언어의 상실과 망각, 그리고 인간 본성에 관한 21편의 에세이
아기 옹알이에서 바벨탑 전설에 이르기까지
탐스러운 지식으로 가득 찬 철학적 여정
언어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태어나 성장하고 변화하며 늙어 죽기도 하는 생명체와 같다. 고대인들이 쓰던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소멸하거나, 그 언어를 쓰던 민족이 전쟁에 패해 멸망하면서 다른 민족의 언어로 흡수되기도 한다. 아기들은 자라면서 옹알이의 기억을 잃게 마련이며, 사람들은 이민이나 망명으로 인해 모국어를 잊거나, 뇌질환이나 정신질환으로 실어증을 겪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형식의 언어 상실, 나아가 언어의 삶과 죽음에 관한 깊고 넓은 성찰을 담은 『에코랄리아스: 언어의 망각에 대하여Echolalias: On the Forgetting of Language』(조효원 옮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의 제목인 ‘에코랄리아스’란 ‘언어메아리’ ‘메아리어’ ‘반향어’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저 자신은 망실되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마치 메아리처럼 ‘다른’ 언어의 틈새에서 살아남아 그 존재의 ‘지층’이 되는 언어의 특성을 암시한다. 21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은 고대, 중세, 근대를 넘나들며 신화에서부터 현대 언어학 이론까지 다양하고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말과 글, 기억과 망각 사이의 관계를 탐색해나가는 동시에 ‘망각’이야말로 언어의 본질적 특성이라는 저자의 특별하고 독창적인 통찰을 전해준다.
이 책의 저자 대니얼 헬러-로즌은 프린스턴 대학 비교문학과 교수로, 현재 가장 촉망받는 40대의 젊은 학자이다. 『에코랄리아스』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그의 저작으로, 언어의 천재로 정평이 나 있는 헬러-로즌의 강점이 또렷이 드러난다. 그는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는 물론, 고대 언어인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랍어, 라틴어, 프로방스어까지 구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헬러-로즌은 아감벤의 대표 저작들을 영어로 처음 번역, 소개함으로써 ‘아감벤 번역자’로 유명해졌는데, 저자 자신의 폭넓고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기반으로 독보적일 만큼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침으로써 최근 더욱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국민국가와 법치 등에 대한 통찰을 담은 『만인의 적』은 문학과지성사에서 근간 예정이다.
‘잊음’에 대한 ‘이즘-ism’,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
언어학자, 시인, 언어 애호가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에코랄리아스』는 총 21편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포리즘적이고 문학적인 각각의 글이 유기적으로 한데 어우러져 지적 유희를 즐기게 하는 동시에 언어 망각에 관한 지식 정보의 탑을 차곡차곡 쌓아나가게 해준다. 쉽게 접할 수 없는 분야와 소재를 활용하면서도, 깊은 식견이 담긴 함축적이고 단단하며 아름다운 문체로 읽는 맛과 재미를 주는 독보적인 책이 아닐 수 없다. 각 글의 배치 역시 흥미롭다. 아기들의 옹알거림에 관한 통찰로 시작한 이 책은, 아무도 발음할 수 없는 히브리 철자 알레프에 관한 전설, 혀가 없는 아이의 소통 방식에 대한 연구, 학살에서 살아남은 토착민 여자와 아이 들의 혀를 모조리 잘라버린 정복자 아르모리카족의 이야기,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유사성과 히브리어와 아람어 및 아랍어의 유사한 음성적 형태에 관한 분석, 호흡만을 지시하는 묵음이자 대기음 ‘H’의 존재 이유를 둘러싼 부단한 부침의 역사, 정신분열증 환자 루이스 울프슨이 모국어인 영어를 참을 수 없어서 시도한 타 언어로의 독특한 개조 방식 등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이처럼 때로는 발음법이나 철자, 때로는 언어 체계 전체에 해당하는 언어 망각의 다양한 형식을 고찰한 뒤, 마지막으로 바벨탑(혹은 옹알이의 탑) 전설을 통해 발터 벤야민의 “망각할 수 없음”이라는 테제 또한 이끌어낸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언어의 끝없는 혼란 속에 내던져진 채, 끝내 그 사실을 망각한 채로, 바벨탑 속에 머무르는 셈”이다.
실패한 언어들을 위한 장송곡
혹은 바벨탑의 후예들을 위한 철학적 에세이
언어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을까? 고대 언어는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저력을 발휘하면서 잔존한다. 예컨대 ‘skin’ ‘shirt’ ‘cake’ ‘egg’ 같은 영단어들은 북유럽인들이 앵글로색슨족과 싸우며 공존하던 시기에 스칸디나비아 언어에서 비롯된 단어들이다. 마찬가지로 켈트인들의 언어는 일부가 살아남아 라틴계 후계자들에게 계속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저자는 고유한 단일 언어란 없으며, 그 형식과 중요도는 다를지라도 어휘나 음운 차원에서 큰 영향을 끼치는 ‘지층’ 언어들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현존하는 언어들을 풍성하게 해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언어의 죽음’이라는 표현은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쓰였을까? 오늘날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이러한 생물학적 비유는 고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서 언어로 쓰인 고대 히브리어의 쇠락을 기록하면서 유대인 학자들은 이 언어를 필멸의 피조물로 묘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희귀 언어가 종말에 처하는 순간은 언제인가라는 흥미로운 질문 역시 던져진다. 예컨대 우비흐어語의 마지막 화자인 테브피크 에센치가 숨을 거둘 때 그 언어의 죽음이 공식 선언되었는데, “만약 당신이 한 언어의 최후의 화자라면, 당신의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점에서는 이미 죽어 있는 셈”이라는 것이다. 즉 언어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보기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언어가 살아 있다고 말하려면 최소한 두 사람은 있어야 할 것이다.
중세 문학이건 근대 소설이건, 고전 아랍 시 혹은 프랑스어의 탄생이건, 아니면 구조주의 언어학이건 실어증에 관한 프로이트의 저작이건, 그 주제가 무엇이 되었든 헬러-로즌은 정확한 식견을 가지고서 언어가 사라지고 잔존하는 형식, 효과, 그리고 그 궁극의 귀결에 대해 숙고한다. 언어 안에서 해체와 구성은 종종 분리 불가능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언어 공동체에게 한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다른 언어가 출현한다는 뜻이며, 본질적으로 언어는 완전히 소유될 수도, 완전히 상실될 수도 없는 것이다. “언어는 언제나 이미 망각된 것이므로 결코 기억될 수 없다.” 더욱이 언어의 형성과 변형, 발생과 소멸, 탄생과 죽음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서 기억과 망각 역시 불가분하게 엮여 있다.
아기들의 옹알이에서 바벨탑 전설에 이르기까지, 유대교 및 이슬람교의 신성한 언어에서 오늘날 추방되거나 멸종 위기에 처한 언어가 가진 정치적 함의, 그리고 언어의 죽음이라는 개념에 이르기까지, 『에코랄리아스』는 탐스러운 지식들로 가득 찬 철학적인 여행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말하는 동물’의 본성에 관해 새로운 방식으로 성찰하게 해준다.
■ 추천사
“언어에 관한 마법 같은 책. 언어의 삶과 죽음, 언어의 끝없는 변덕, 언어의 틈새에서 망실된 옹알이, 인쇄 기호의 역사, 동물의 소리와 언어 장애에 관한 미스터리, 망각된 언어와 모[국]어, 언어의 역설과 비극, 이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들이 탁월한, 그야말로 마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같은 강렬한 인상을 뿜어낸다. _수전 스튜어트(시인)
“대니얼 헬러-로즌의 책을 읽는 것은 특별한 지적 모험이다. 새로 알게 되는 사실이 너무 많아서 매순간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아포리즘의 예봉을 놓치는 법이 없다. 그의 글은 많은 것을 말하면서도 훨씬 더 많은 것을 암시한다.” _마이클 우드(프린스턴 대학 비교문학과 교수)
■ 책 속으로
옹알거림이 사라진 자리에, 이제 하나의 언어와 이 언어를 말하는 존재가 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불가피한 일이다. 무한한 소리의 무기고를 상실하는 것은 어쩌면 아이가 단일 언어의 공동체에서 시민권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낳아준, 무한히 다양했던 옹알거림 중에서 혹시 어른의 언어가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다만 메아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존재하는 곳이란 아이의 옹알거림, 적어도 아직 말 못하는 아이의 입에서 나오던 옹알거림이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1장 「극치의 옹알거림」, 12쪽)
신의 계시는 시나이 산에서 토라 텍스트로 전수되는 것에서 출발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들은 첫 두 계명을 표현하는 하나의 소리인 “나”라는 단어를 거쳐, 다시 이 단어의 첫번째 철자 알레프로 압축되는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 즉 전체 계시가 아무도 그 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하나의 철자로 환원된 것이다. 혹시 이 사실을 신학적인 견지에서 다시 고찰한다면 당혹감이 다소 눅여질지도 모르겠다. 신께서 당신 스스로를 인간들이 언제나 이미 망각한 단 하나의 철자로 나타내신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신의 말씀의 유일한 재료인 묵음 철자는 모든 언어를 출현시키는 망각을 표시한다. 알레프는 모든 알파벳이 시작되는 망각의 처소를 지킨다. (3장 「알레프」, 30~31쪽)
파리에 도착한 직후 이곳 프랑스에서 나의 독일 이름 ‘하인리히Heinrich’는 곧장 ‘앙리Henri’로 번역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결국 나 스스로를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인리히’라는 단어는 프랑스인들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고 또 프랑스인들은 뭐든지 자기들이 편하고 쉬운 대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앙리 하이네Henri Heine’란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 이름은 앙리 엔Enri Enn 씨였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걸 줄여서 ‘앙리엔Enrienne’으로 부르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나를 엉 리엉[무無]Un Rien 씨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5장 「H와 친구들」, 43쪽)
언어 역시 기원의 장소에서 추방당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언어는 한때 그것이 가졌던 부유함을 완전히 잃은 후에도—어쩌면 잃었기 때문에—여전히 성스러운 것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어 시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가 이슬람 점령기의 스페인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즉 히브리어 작가들이 자신들의 고향 땅을 제 의식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때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추방이 언어의 진정한 고향이며, 언어를 망각할 때가 [오히려] 언어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인 셈이다. (6장 「추방」, 64~65쪽)
이것은 언어학자들이 해당 언어를 사용한 공동체보다 먼저 소멸 여부를 판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록 외부 관찰자가 보기에는 이미 오래전에 그 언어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렇다. 예컨대 골 지방의 주민들이 더 이상 라틴어를 쓰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스스로 표현하기 전까지, 역사학자들은 그들이 이미 프랑스어를 쓰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고전어와는 아주 이질적인 표현들로 기록된 자료들을 찾았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기준은 역사적인 연구에서는 기껏해야 근사치 결과를 제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오늘날 우연히 우리 손에 들어온 자료들에 기록되기 전에 먼저 그 사람들에게 언어 변화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8장 「문턱」, 87쪽)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헤엄칠 수 있다. 다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예전에 내가 헤엄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한때 헤엄칠-수-없었음]. 그러나 이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헤엄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결국, 나는 헤엄칠 수 없다.” 이 짧은 텍스트의 익명의 화자는 프로이트의 실어증 환자가 언어의 영역에서 취한 것과 똑같은 입장을 수영에 대해 취하고 있다. 카프카의 표현을 비틀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실어증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혹은 있었다. [……] 즉 그들은 “예전에 그들이 말할 수 없었다는 사실”(혹은 “한때-말할-수-없었음”)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의 기억력은 엄청나게 좋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억은 모든 개인의 삶의 시작을 알리는 옹알이하던 갓난아이 시절까지 가닿는 것이니 말이다. (14장 「부족한 동물」, 179~80쪽)
카네티의 삶의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비밀은 아마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무엇이든,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언어를 배우고 잊어버리든 관계없이 다른 언어에 열려 있지 않은 언어는 없다는 사실, 완전히 ‘네이티브’인 언어는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언어도 진정 ‘모[국]어’일 수 없다. 심지어 그것이 [진짜] 내 어머니의 언어라 해도. (16장 「후드바」, 218쪽)
이븐 알-카리의 주해에 따르면, 이 시의 세 개 연이 두 가지 형태로 전승되었다. 둘 중 다수 판본의 형태는 접속사 “그리고” 없이 시작되는 반면, 이라크어 교정본은 이 접속사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둘 중 ‘어떤 게 맞는 것인가?’라는, 편집자와 학자로서는 피해갈 수 없는 당혹스러운 이 물음은 오직 저자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임루 알-카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께서 바그다드의 학자들을 없애주시기를! 그들은 내 작품의 전승을 망쳤다. 그따위로 시를 읽는다면, 대체 시와 산문이 구별될 수 있겠는가?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시에 대한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 운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일 것이다.” (20장 「천국의 시인들」, 256쪽)
바벨의 거대한 “혼동”은 더하거나 빼는 행위 혹은 창조하거나 파괴하는 행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기억상실에 따른 것으로서, 이로 인해 말하는 존재들은 “하나의 언어 그리고 하나의 말”을 잊어버리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이 망각 속에서 그들은 수다한 언어들을 만들어냈고 이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 그러나 혼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혼란은 우리가 언어[혀/어]라고 부르는 가변적 존재의 불변적 중심, 언어의 모든 변화를 관장하는 변하지 않는 핵심이다. 이전 언어에 대한 망각으로 규정됨으로써, 모든 언어는 자신보다 앞선 언어의 상실을 “보수하는” 동시에 그 언어의 부재가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 모든 언어는 앞선 언어의 재구성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 언어의 탈-구성이다. 요컨대 우리는 말을 함으로써 언제나 이미 잊어버리기 시작한다. 심지어―아니, 어쩌면 특히―우리가 이 사실을 모를 때 [더] 그렇다. (21장 「바벨」, 281~82쪽)
1장 극치의 옹알거림
2장 감탄사
3장 알레프
4장 멸종 위기의 음소들
5장 H와 친구들
6장 추방
7장 끝장
8장 문턱
9장 지층
10장 변환
11장 작은 별
12장 별빛 돌아오다
13장 글 쓰는 소
14장 부족한 동물
15장 아글로소스토모그래피
16장 후드바
17장 언어분열증
18장 아부 누와스 이야기
19장 “페르시아어”
20장 천국의 시인들
21장 바벨
미주 |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언어메아리 언어수줍음
출간 소식을 읽다가, 작가 소개에 오류가 있어 적어둡니다. 다니엘 헬러-로즌의 박사 논문은 <Fortune’s faces: The "Roman de la Rose" and the poetics of contingency>이고, 동명의 책이 바로 이 논문을 펴낸 것입니다. 즉 ‘장미 이야기’라는 중세 프랑스어 문학 작품에 대한 연구이므로, “중세 프로방스 문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소개는 잘못된 정보입니다(프로방스어는 현재 프랑스 영토 내에서 쓰인 언어이지만, 프랑스어의 한 방언이나 옛 형태가 아니라, 이탈리아어처럼 그와 구별되는 다른 언어입니다). 일단 인터넷상의 공지 형태로라도 수정되기를 바랍니다.
세심한 지적 감사드립니다. 웹에 올라간 저자 정보는 수정하였으며 책에서도 2쇄에는 꼭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