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 알 것만 같은,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세계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이 세계의 안입니까 바깥입니까?
“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소설은 문득 도착해 있습니다”
“우리 시의 미래에 이장욱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 소설의 미래도 이장욱을 가졌다”(백지은)라는 평을 들은 지 2년, 이제 우리 소설의 ‘현재’가 된 이장욱의 두번째 소설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고백의 제왕』 이후 5년 만에 묶어낸 이번 소설집에서 이장욱은 확신 너머의 진실과 포착되기 어려운 삶의 틈에 주목한다. 인류와 개인, 진실과 허구, 이곳과 먼 곳… 말로 갈린 의미의 경계에서 묘하게 유머러스하고 건조하면서도 단정한 문장으로 “언제라도 되돌아와서 확인해야 할” “문학의 영원한 출발점”인 “아직까지 씌어져본 적 없는 삶”(김동식)을 끊임없이 더듬고 있는 것이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수록된 대다수 작품은 최근 몇 해 동안 거듭 김유정문학상,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 이효석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 본심에 올랐거나 최고상을 수상했다. 적확하고 다양한 평들이 이어졌다. 이장욱의 소설은 “침투력이 강한 정서적 밀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대상과의 정서적 거리를 흐트러뜨리지 않”(박혜경)으며,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역설 혹은 아이러니를 제시”(류보선)한다. 단편소설의 미학적 원칙에서 약간 비껴서 있지만 매력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불쑥 등장”하는 “미지의 시간에 대한 예감”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음(이광호)을 보여주고, 결국 “‘사라짐’의 정서를 통해서만 간신히 환기될 수밖에 없는” 삶의 진실에 다가선다(강동호). 풍성한 평 너머, 이장욱의 소설에는 끝내 포착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완벽한 기획 의도”와 어긋나는, 삶의 틈과 만나 소설 스스로가 이끌어낸 “생각하지 않았던 생각” “던지지 않았던 질문”들, 평론가에겐 즐거운 난제를, 독자에겐 영문 모를 위로나 쓸쓸한 재미를 안겨주는 빈 곳. 이장욱의 소설 전체를 안개처럼 리듬처럼 둘러싼 단언 불가능한 정서야말로 오늘의 문학을 말할 때 이장욱의 이름이 반드시 호명되는 이유일 것이다. 익숙함과 낯섦, 건조한 유머와 묘한 안도감, 확률과 우연이 교차되는 경계에, 우리의 표정을 닮았지만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얼굴―모두의 세계가 있다.
가능한 한 ‘완벽한 기획 의도’를 갖고 쓰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소설은 번번이 그 ‘기획 의도’를 배반합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소설은 문득 도착해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그 어긋난 도착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도착이나 착지에서 발생하는 오차나 미끄러짐이야말로, 소설 속의 인물과 사건이 지닌 ‘물질성’의 불가피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게 그것은 거의 맹목적인 확신에 가깝습니다. 그 ‘물질성’은 쓰는 사람의 ‘기획 의도’가 제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바라건대, 그 물질성이 이 세계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희망합니다._2014년 3월 문지문학상 ‘이달의 소설’ 선정 작가 인터뷰에서
가장 보통의 존재―평범한 삶의 수수께끼
그는, 이 세상에 자신이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과,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거리에 흘러넘친다는 사실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_「올드 맨 리버」
그것은 무관심도 아니었고 과도한 애정도 아니었다. 우리를 묘사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고 주인공으로 삼지도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냥 그녀와 내가 그의 글에서 숨 쉬고 있을 뿐이었다._「절반 이상의 하루오」
72억 4400만 분의 1. 30만 명이 태어나고 17만 명이 죽어가는 매일, 그 사이 13만 명 중의 하나로 살아가는 일. 태어나 누군가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고 희로애락을 겪다 결국 죽기로 정해진 것. 수치는 ‘인류’의 삶을 매끄럽게 정리한다. 살다가 문득 알아차리고야 마는 “인생의 대부분이 실은 반복적이며 기계적인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조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묘한 평화를 준다”. 마치 우주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 속 ‘창백한 푸른 점’이 안도감과 우울을 동시에 안겨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나와 같은데 왜 외로워지는 걸까?” 확률이나 수치 같은 “동사무소”식 단언은 ‘나’의 삶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인류의 운명과 개인의 유일한 삶 사이 어디쯤에서, 멀리 보면 비슷하지만 가까이 보면 너무나 다른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도시의 거리에는 도시의 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의 수만큼 많은 과거가 있”고 “서로 다른 삶들은 서로 다른 방식대로 흘러”간다(「올드 맨 리버」).
확신 너머에 대체 불가능한 삶이 있다. 이장욱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을 법하지만 어디에도 없다. 공식적인 기록들 사이의 헐거운 틈을 여러 사람의 기억을 빌려 채우면 어디에나 있는 삶은 어디에도 없는 삶이 된다.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은 서로의 희미한 삶의 궤적을 증명하는 증인이 된다.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을 때 “타인의 이야기가 요청”되고 “동시에 모두의 이야기가 교차하고 직조되면서 우리가 여태껏 몰랐던 삶의 진실을 얼핏이나마 살”(양경언)피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귀보(1972~2013)”의 삶을 각별하게 만드는 것은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으며 언제 죽었는지가 아니라 그와 관계를 맺었던 타인의 기억이다. 정귀보를 떠올리면서 무심결에 짓는 “표정”은 정귀보뿐 아니라 그들 각자의 삶을 “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사건”으로 만든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서 사람들은 삶을 배회하면서 곁에 있던 사람의 기억을 되짚는다. 가만히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나아가 초대장을 던지며, 소설을 읽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누군가가 삶의 비공식적인 증인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나’를 닮은, 나와 절대 같을 수 없지만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이장욱은 “아무렇게나 흐르지 않도록 사람을 붙들어두는 작은 닻 같은” ‘이름’을 불러주고 있는 것이다. 어쩐지 알 것 같으면서도 짐작만 하는, 모두에게는 그런 하나의 세계가 있다.
여기보다 어딘가에―공백을 메우는 공백
인류의 운명과, 관계로 재조명한 개인의 삶을 더한다면 한 인생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개인의 입장이 반영된 기억과 증언에는 한계가 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오히려 더 많은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모두’와 ‘홀로’의 세계를 더하고서도 삶에 영영 메워지지 않는 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때로 “볠다른 이유 읎”(「우리 모두의 정귀보」)이, 제멋대로 흐른다. 이장욱의 소설은 하나의 정답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애써 인과를 끼워 맞춰봐도 마주치는 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길고 복잡한 해안선을 가진,/그런 세계”(「칠레의 세계」)일 뿐이다. 이장욱은 생이 던지는 수수께끼와 끊임없이 “싸우고 사랑”해왔으나, 삶에 끝내 빈 지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 소설 역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느냐며 그 틈을 그대로 놓아둔다.
벌어진 틈은 억지 해석이 아니라 뉘앙스로 채워진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게 자연스럽게”(「절반 이상의 하루오」), “말의 의미보다는 그 말의 어조와 뉘앙스와 목소리 자체”가 “어둡고 이질적이며 매혹적인 하나의 세계”(「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만들어낸다. 이장욱의 소설 속 인물 몇몇은 여행자나 입양아이며, 타향에서 모국어도 현지어도 아닌 제3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바라나시나 이태원, 스례드니 거리에 있든 1801호나 마포대교에 있든 제 집 한번 벗어난 적 없는 히키코모리든, 대개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해 있다는 걸 낯설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들은 존재 자체로 경계를 상징하고 있다. 바흐의 음악,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배우 히스 레저, 얀 반 에이크의 그림, 기린불, 공포 소설의 클리셰 등 “어리둥절한 컬렉션”(「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에서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아우라를 빌려 오기도 한다. 틈을 틈으로 놓아두면서 뉘앙스, 아우라, 안개처럼 리듬처럼 확산되는 정서로 메우는 것이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 이상한 리듬”(「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그런 확신도 단언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를 위로하고 고양시키며 때로 겁에 질리게 한다. 굳이 의미의 영역으로 잡아넣지 않아도 될 모종의 정서가 안개처럼 맴도는 이장욱의 소설을 ‘경유’하여 바라본 인생은, 그리하여 “아주 복잡하고 난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배신감을 느낄 만큼 단순한 것”이 된다.
책 속으로
혹시…… 도를 믿으시나요?
하루오는 여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자신이 도를 믿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하루오는 자기도 모르게 빙긋, 웃음을 흘렸다. 여자도 하루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를 따라서 빙긋, 웃었다.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어쩐지 서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어진 듯한, 그런 기분이 된 것이다.
여자를 지나쳐 걸어가다가 하루오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가 한 말이 영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물론 일본어도 아니었다. 발음으로 보아—하루오는 그 발음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다고 했다—그것은 확실히 한국어였다. 자신이 아는 한국어라고는 김치와 불고기, 그리고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말뿐이라고, 하루오는 덧붙였다.
여자와 헤어지고 찬 공기가 흘러 다니는 거리를 걸어가면서, 하루오는 기이하게도 죽고 싶었던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하루오는 이렇게 표현했다. 말하자면 그건, 나라는 존재가 5센티미터쯤 다른 세계로 옮겨진 것 같은,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정말 도를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절반 이상의 하루오」에서
나는 모든 면에서 현명하고 건전한 여자들이 태연하게 또 하나의 인간을 생산하는 걸 이해하지 못해.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결혼을 하고 수컷을 사랑하고 아이를 낳는다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야. 그 모든 것이 유전자의 명령과 사회적 압력의 결과인데도, 그걸 위대하고 신비로운 생명의 탄생 운운하며 과장하다니. 그 탄생의 ‘신비로움’을 애벌레나 구더기에게서는 못 느끼는 거, 구더기나 바퀴벌레의 신비로움은 상상하지 못하는 거, 그게 인간이라는 종의 특징이야.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에서
코인 세탁소라는 곳은 하나의 우주 같아. 이 세상이 코인 세탁소의 일부가 아닐까 그런 착각이 들 정도라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모든 이들이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거야. 세탁소의 인류는 우선 빨아야 할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넣어. 자동판매기에 50센트를 넣고 세제를 뽑은 뒤 옷 위에 뿌려. 25센트짜리 동전 여덟 개를 코인슬롯에 넣고는 세탁의 종류를 선택하지. 그리고 잡지나 텔레비전 따위를 보며 기다리는 거야. 25분 정도가 지난 뒤에는 옷가지들을 꺼내 카트에 넣고 이동해야 해. 축축한 옷가지들을 건조기에 주섬주섬 넣고 다시 20분을 기다리는 거지. 끝으로 커다란 더플백에 깨끗이 마른 옷가지들을 개어 넣은 다음 우주 밖으로 나가는 거야. 상상해봐, 전 인류가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는 풍경을 말이야.
「올드 맨 리버」에서
아버지는 조용히 저잣거리로 돌아왔습니다. 늙은 어미의 집에, 내 할머니 말입니다만, 나를 맡겨둔 채 일을 나갔습니다. 공사장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도배 시다바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들이었죠. 아버지는 언젠가 말했습니다. 이 일들이 좋다. 이 일들은 단지 그것 자체일 뿐이다.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고 진실도 필요 없다. 사랑이니 열정이니 하는 것도 불필요하다. 그것이 좋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에서
전시가 끝난 뒤 작품들을 철거하면 미술관에는 흰 벽에 불과한 민무늬 구조물만 남았다. 백색 패널로 된 벽은 구불구불하고 길고 하얀 미로를 이루었는데, 정귀보는 그 텅 빈 미로를 천천히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같은 곳을 지나면서도 같은 곳인지 모르겠고, 다른 곳을 지나면서도 다른 곳 같지 않은 길을 그는 천천히 걸었다. 비가 내리는 날 아무것도 전시되어 있지 않은 그 미로를 거닐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깊은 상념에 젖어들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소 감상적인 톤으로 이렇게 덧붙였던 것이다.
아아, 이것이 곧 인생이요 세계가 아닌가.
「우리 모두의 정귀보」에서
한번 연결된 사건들은 마치 스스로 생장하는 괴물처럼 모든 사건들을 잡아먹었지. 사건들은 문득 의미심장한 원인과 결과의 사슬로 이어졌다네.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우연일 수 있는 사건들은, 그럴 수 없이 완강한 인과의 사슬 속에서 다시 태어났던 거야.
「칠레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자세로 앉거나 서 있지만, 가만히 보면 모두들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밀림에 사는 것은 똑같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처럼 말이죠. 누구한테 이 세상은 깊은 동굴이고, 누구한테는 가뭄 든 초원이고, 누구한테는 벌레들로 가득한 웅덩이 같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골똘히 사람들을 관찰하노라면 지하철도 흥미로운 우주가 되지요.
「어느 날 욕실에서」에서
제목도 상투적이고 내용도 보잘것없었지만, 그의 소설은 날개가 돋친 듯 팔려나갔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소설 속 어딘가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다는 소감을 인터넷에 올렸다. 소수의 독자들만이, 책에서 만난 인물이 자신인지 아니면 자신이 증오하는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적었다. 어떤 반대론자들은 이 모든 독후감들이 출판사의 마케팅이자 상술의 일환이며, 이반 멘슈코프라는 작가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비난 글을 게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비난하는 이들조차 진심으로 멘슈코프의 진위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에서
작가의 말
“세상은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에서 겨우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
한 술집 벽면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이라고 했다. 내가 이 문장에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의 ‘한 페이지’에 온 세상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소설 쓰는 일을 저 문장에 빗대어 말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세상은 책이다. 소설이란 그 책의 어떤 페이지, 어떤 문장에 그은 밑줄일 뿐이다.”
밑줄의 각도와 두께와 빛깔은 나의 것이지만, 그 밑줄이 기억하는 문장은 이 세상의 것이거나, 이 세상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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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이상의 하루오」를 생각하면 지금도 의문이 든다. 이건 인도에 대한 이야기일까, 오키나와에 대한 이야기일까? 하루오에게는 전 세계가 고향인 것일까?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이는 전 세계를 타향으로 느끼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하루오에게 매혹을 느끼는 나 자신이 의아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이 또 하루오라고도 생각하였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을 쓸 때는 왠지 예민해서 자꾸 혼자 중얼거렸다. 환하게 불을 켜도 방은 어두웠고 정신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때마다 소설에 나오는 바흐의 칸타타를 틀어놓고 주인공들의 결혼식을 상상했는데, 그게 묘한 위안이 되었다. 아르놀피니 부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얀 반 에이크에게도 감사를.
「올드 맨 리버」의 초고는 꽤 오래전 아이오와에 머물면서 썼다. 그때는 최대한 낙관적으로 소설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묵은 글을 꺼내 마무리할 무렵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이 거칠어졌다. 처음부터 다시 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느 소설보다도 오래 걸렸기 때문일까. 이 글을 생각하면 아직도 강을 건너고 있는 기분이 든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에 나오는 기린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로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때 나는 기린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저 기린이야말로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착시였겠지만, 지금도 거리에서 기린을 만나면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말 그대로 ‘우리 모두의 정귀보’라고 생각하면서 썼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해 써야 할 것이 있다고 느낀다. 그는 결코 소진되지 않는다. 무한하게 풍부해지는 것만이 정귀보인지도 모른다. 요즘도 혼자 술을 마실 때면 그를 떠올리고는 자못 골똘해지기도 한다.
「칠레의 세계」가 이 세계의 운명에 가장 가까울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잊었다. 지금은 그냥, 언젠가는 쿠바를 거쳐 칠레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소설집의 제목을 ‘칠레의 세계’로 하려고 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칠레의 밤』이 없었더라면.
「어느 날 욕실에서」는 몇 해 전에 출간한 시집 『생년월일』에 실려 있는 「늪」이라는 시와 연관이 있다. 늘 그렇듯이 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밤의 욕실에서 낯선 시신 한 구를 만날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을 쓰면서 제법 ‘그것’과도 친해진 셈이다.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은 모 문예지에 ‘자전 소설’의 형식으로 게재되었는데, 원래는 장편의 일부로 떠올린 것이다. 언젠가는 긴 소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안드레이는 오래전에 함께 지냈던 기숙사 룸메이트의 실제 이름이지만, 소설 속의 안드레이와는 관계가 없다. 그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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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많은 수수께끼가 풀리겠지.”
그러자 메피스토펠레스가 대꾸했다.
“아니, 더 많은 수수께끼들이 연달아 나오게 될 거야.”
세상에 밑줄을 긋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저 수수께끼들 앞에서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으로 좋았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했으니 다행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수수께끼는 푸는 것이 아니라, 겪고 사랑하고 싸워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장을 하나 덧붙여두고 싶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나 자신에게.
그리고 언제나 홀로이면서 모두인 우리에게.
“세상은, 책이 아니다. 삶과 사랑 역시 그러하다.”
창문을 열자 무인칭의 바람이 불어온다. 시제도 없고 이상한 마음도 없다.
2015년 봄
이장욱
차례
절반 이상의 하루오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올드 맨 리버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우리 모두의 정귀보
칠레의 세계
어느 날 욕실에서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