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산다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인 것 같다.”
현대인의 불안과 고통이 담긴 아홉 편의 작은 광기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르 클레지오 문학의 본령을 만난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리르 지 선정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의 소설집 『열병』이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31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23세에 첫 소설 『조서』로 르노도상을 받으며 문단에 혜성같이 등장한 르 클레지오는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개인이 겪게 되는 존재 위기와 소통 단절이라는 주제를 치열하고 긴장된 소설 언어로 탐색하며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한 작가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현실 모방에 기초한 전통적 소설 구성을 거부하는 실험적 글쓰기를 통해 세계와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으나, 방콕에서 불교와 선의 세계를 접하고, 멕시코와 파나마에서 원주민의 삶을 지켜본 이후부터는 서구적 사유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존재 방식을 모색하고, 소박하고 평온한 언어로 정신적 구도의 색체를 띤 작품을 발표한다.
이 책은 초기 중단편 9개를 엮은 책으로, 현대 도시의 일상에서 물질적 ‧ 기능적 존재로 축소된 한 개인이 겪게 되는 병적 징후를 통해 삶의 이면을 조명한다. 르 클레지오 초기 문학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주제 의식과 혁신적인 서술 기법을 이 소설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구에서 태어났지만 서구 문화에 갇히지 않은 작가, 끊임없이 변방을 탐색하며 풍요한 시적 세계를 일구었다는 찬사를 받는 작가 르 클레지오 문학세계의 원형을 만날 기회다.
병든 세계 속의 아픈 개인
_“갑작스레 화가 치밀었다. 광기 같은 분노가 정신을 마비시켰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아프다. 뜨거운 여름 낮 발열로 폭력적이 되거나(「열병」), 한밤중에 시작점도 위치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 통증에 시달리거나(「보몽이 자신의 고통과 처음 마주친 날」), 누군가에게 폭행당한 채 방치되기도 한다(「노년의 어느 날」).
르 클레지오의 시선에서 이 세계는 합리적 이성이라는 허구로 포장되어 폐쇄회로를 도는 병들어 마비된 세계이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 역시 아픈 게 당연하다. 세계는 문명과 공동체에 둘러싸인 안정된 외관을 보이지만 표피 아래에는 이기적 욕망이 들끓는, 광기와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물질문명이 야기하는 정신적 굶주림과 소통 부재, 누적된 모순과 결핍의 병적 징후가 구토, 현기증, 오한, 발열 같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신음하는 세계에서는 개인도 병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통 불능의 상황에서 이런 징후는 개인이 외롭게 떠맡을 몫이다. 개인은 위기를 감지하면서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기에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의 민낯을 세밀화를 그리듯 섬세한 언어로 드러낸 『열병』은 르 클레지오 초기 문학의 결정(結晶)을 보여준다.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는 소설 언어
_떠도는 언어를 통해 삶이라는 폭력을 헤쳐 나간다. […] 언어가 지닌 응시의 힘으로
첫 출발의 장소, 최초의 리듬,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르 클레지오 문학을 이야기할 때, 그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빼놓을 수 없다. 작가는 “오래전부터 모든 생각을 말로 전달하는 일을 포기했다”며, “오로지 글쓰기”, “언어를 통해 대상을 더듬어보는 글쓰기, 세밀하게, 깊게, 탐색하고 묘사하는 글쓰기, 현실에 천착하는,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글쓰기”가 그의 목표라고 했다.
그렇기에 르 클레지오의 소설은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응시하는 눈, 바라보는 시선이다. 하지만 역자에 따르면 병든 세계의 징후를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시선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소설 언어라는 외피를 입으면 다른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작가는 마이크로 촬영을 하듯이, 세밀화를 그리듯이 인물들의 행동과 세상 풍경을 묘사하는데, 신경이 감지하는 물질적 감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물의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내면 의식에 침투하여 개인과 세계의 관계를 탐색하는 것이 바로 르 클레지오의 소설 언어다.
익숙한 경험일지라도 언어로 주목하는 순간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 되면서 정신의 긴장과 각성을 불러온다. 르 클레지오의 언어는 피상적 현실에 안주한 독자들의 환상을 깨뜨리고, 균열과 소외를 눈앞에 들이민다. 『열병』의 글쓰기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삶의 이면을 응시하고, 소소한 일상 너머 현실의 민낯과 맞닥뜨리려 한다. 사물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봄으로써 표면 아래 감춰진 낯선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에게 당혹감과 참담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그의 목표는 아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을 돌아보고 세계를 돌아보게 하는 글의 힘을 믿는 것이다.
서구에서 태어났지만 서구 문화에 갇히지 않은 작가
_“나는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이다.”
2008년 스웨덴 한림원은 “지배적 문명 너머와 그 아래 있는 인간을 탐구한 작가”라며 르 클레지오의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를 밝혔다. 서구인이었으나 시선을 항상 서구 저 너머에 던져놓았던 아웃사이더 르 클레지오. 영국과 프랑스, 두 개의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면서도 정작 자신은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말하는 르 클레지오.
르 클레지오는 어린 시절 몇 년을 군의관인 아버지의 근무지 나이지리아에서 보내며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청년기에는 기계문명의 대척점에서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멕시코와 파나마 원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서구적 사유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존재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체험들이 “지배적 문명 너머”를 보는 작가 르 클레지오를 낳은 것이다.
르 클레지오는 자신의 글쓰기 원천은 서구문화가 아닌 ‘떠돌기’에 있다고 말하며 오늘날에도 라틴아메리카와 사하라 사막, 아프리카 등지를 떠돌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언어를 통해 존재의 근원을 찾던 그가,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찾아, 혹은 본원적 감수성을 찾아 직접 나선 것이다.
■ 본문 속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로 인해 빚어지는 갖가지 자잘한 고통들은 감수해야 하고, 그러면서 너무 힘들어 하지는 말아야 한다. 삶은 불합리한 것들, 터무니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소소한 광기일 뿐이지만, 눈을 좀더 가까이 대고 들여다보면 무시무시한 것들이다. _「서문」 중에서
오래전부터 나는 모든 생각을 말로 전달하는 일을 포기했다.(생각이라고 부를 만한 뭔가가 정말 있는 것인지 이따금 미심쩍기까지 하다). 나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데 만족하고 있다. […] 글쓰기, 오로지 글쓰기만이 남는다. 언어를 통해 대상을 더듬어보는 글쓰기, 세밀하게, 깊게, 탐색하고 묘사하는 글쓰기, 현실에 천착하는,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글쓰기 말이다. 예술을 하면서 학문에서처럼 앎을 얻고자 하는 건 무리다. 한 1,2백년 더 살 수 있다면, 뭔가 앎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_ 「서문」 중에서
■ 차례
서문
열병
보몽이 자신의 고통과 처음 마주친 날
배는 섬을 향해 가는 것 같다
뒤로 가기
걷는 남자
마르탱
세상은 살아 있다
평온한 잠을 이루기 위한 조건
노년의 어느 날
옮긴이 해설 ‧ 르 클레지오와 『열병』
작가 연보
기획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