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박되지 않은 정신의 온전한 가벼움
비스듬히 존재하는 그림자들을 향한 애틋한 시선
1965년 『현대문학』으로 데뷔한 정현종 시인이 등단 50주년을 맞는 2015년, 열번째 시집 『그림자에 불타다』를 상자했다. 정현종은 한국의 “재래적인 서정시의 전통을 혁신”하고 현대 시에 새로운 호흡과 육체를 만들어내온, 말 그대로 “한국 현대시가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 중 하나로 꼽히는 시인이다. 정현종은 지칠 줄 모르는 시적 열정으로 생동하는 언어, 새로운 시적 영역의 가능성을 무한 확장해왔다. 이번 시집은 시인의 최근작 58편을 묶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그림자에 불타다』는 다양한 맥락과 의미를 가진 ‘그림자’들이 등장하여 시집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시인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헛것이며 덧없고 경계마저 흐리마리한 그림자들이지만 이러한 특성 덕분에 이들은 땅 위에 속박되지 않는다. 이 해방된 정신들은 명백한 세계 이면에 은유로서 존재하며 폭력과 소음에 대항하는 신선하고 고요한 언어로서 재탄생된다. 산업화된 시대에 속도와 효용의 논리로 생명마저 단순하게 수치화·자본화되는 세태 속에서 정현종의 그림자는 휘고 두루뭉술한, ‘비스듬한 존재’의 절실함을 우리에게 일깨우며 하얗게 불타고 있다.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어 궁극의 생명력에 가닿은 시력 50년
1960, 70년대 정현종의 초기 시가 시단에서 어떤 위치와 영향력을 가졌는가에 대해서 평론가 김현은 이렇게 설명한다.
정현종의 시사적 자리는, 오십 년대를 휩쓴 서정주의 토속적 여성주의를, 유치환·박두진·김수영의 한문투의 남성주의와 서구적 구문법에 의지한 개인주의에 의해 극복한 곳에 있다. [……] 정현종은 유치환·박두진·김수영 등의 시적 전통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그는 이 세계가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세계이며, 이 세계에서의 삶은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믿는다는 점에서 비관적 현실주의자이지만, 이 세계 내에서 이 세계의 무의미성과 싸울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는 낙관적 현실주의자이다. 그의 현실주의는 개인의 자유 위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며, 자기의 세계관을 억압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이다. 그가 유치환·박두진·김수영 등과 갈라지는 곳은 그곳이다. 그곳에서 정현종은 칠십 년대에 가장 아름답게 흐른 물길 중의 하나를 판다.
김현, 「술 취한 거지의 시학」에서
이렇듯 정현종은 초기 시에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피폐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과 죽음에 집중하였으나, 이후 점차 어법 자체가 밝아지고 단순해지며 천진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특히 시적 관심이 실존주의에서 문명 혹은 생명의 차원으로 옮겨가며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시인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저절로 자신도 모르게 씌어졌다”는 점과 “도시 생활의 기본적인 생존 조건이 어려워지고 산업화에 따른 문제가 자꾸 생기니까. 더구나 우리의 경우 산업화와 함께 정치적 폭력 때문에 생명에 대한 관심이 심화된 것이다. 그래서 크고 작은 생명들에 대한 촉각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그런 위기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생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이광호·정현종 대담, 「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고 이야기한 바 있다.
또한 시인이 1974년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참여하던 당시 발견한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의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시인의 산문에서 종종 등장한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천진스럽게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것이었고, 그 깨달음은 실존주의와 존재의 죽음에 대한 의식으로 가려져 있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자연에 대한 친화력, 그리고 영원한 진리를 그리워하는 그의 종교적 심성을 일깨웠다. 또한 이 깨달음은 시어에 대한 새로운 자각, 특히 ‘침묵으로서의 말’이 갖는 가치를 알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시력 50년에 이른 정현종의 시의 총체를 관류하는 ‘생명’이라는 주제는 실제로 온전한 생명력을 얻은 언어로서 독자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또한 쉽고 가벼우며 단순한 정현종의 시어들은 읽는 이의 머릿속에 술술 스며들어 마치 시 전체가 의미 이전에 하나의 파동이나 숨결처럼 물결쳐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정현종이야말로 생명과 생태 시의 궁극의 경지에 가닿은 시인이자 생명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담은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흐린 존재들의 분투, 불타며 살아가는 생에 대한 고찰
욕망-구름 그림자
마음-구름 그림자
몸-구름 그림자에
일생은 그을려,
너-구름 그림자
나-구름 그림자
그-구름 그림자에
세계는 검게 그을려.
– 「그림자에 불타다」 부분
시간은 항상
그늘이 깊다.
[……]
심원한 협곡,
살고 죽는 움직임들의
그림자,
– 「시간의 그늘」 부분
순간에서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협곡이 있고
산맥이 있다.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그림자들,
무거워, 한숨과도 같고
가벼워, 웃음과도 같은
그림자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그림자들
– 「그 사이에」 전문
앞서 말했듯 이 시집에서 그림자는 명백한 세계 이면에 존재하는 은유적 존재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각 시마다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표제작 「그림자에 불타다」는 시인이 카파도키아를 여행하며 밀밭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다가 얻은 삶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다. 밀밭의 일부가 까맣게 탄 것처럼 보였는데 그 부분이 구름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알고 난 뒤, 헛된 것들을 가지고 씨름하는 우리의 삶을 돌아본 내용을 시로 노래했다. 그림자는 ‘찰나 속에서 광대하게 존재하는, 없지만 있는 역설적 세계’(「그 사이에」)를 의미하기도 하고, ‘시간의 변화, 움직임의 이면에서 숨 쉬는 우수’(「고비」 「시간의 그늘」) 등을 암시하기도 한다. 조금씩 맥락은 다르지만, 아른거리는 불명확한 존재를 가리킥 있다는 점에서 시인이 보여주고자 한 세계가 무엇인지 가늠해보게 한다.
시인은 시집 말미에 덧붙인 산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상의 말은 아직 발설되지 않은 말이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말, 미래의 말. 말이 신선하려면 고독이라는 오크통과 침묵이라는 효모가 필요하다.” 이번 시집에서 그림자란, 바로 아직 말하지 않은 말의 세계 자체를 암시하기도 한다. 『그림자에 불타다』는 양지마다 쏟아지는 현란한 언어들에 매혹되지 않고, 가장 신선한 언어로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림자의 존재를 느껴보게 하는 시집이다.
<차례>
시인의 말
이 느림은/산길에서/지난 발자국/이끼를 연주하다/인사/그래서 즐거웠는지/보석의 꿈 1/보석의 꿈 2/보석의 꿈 3/보석의 꿈 4/한 비전/샘을 기리는 노래/글쓰기의 무위/새의 은총/여행의 마약/이뻐 보이려고/시간의 그늘/시선을 기리는 노래/황금태/장엄 희생/여기도 바다가 있어요!/그 사이에/저녁 시간/음악에게/고비/왕후들이 보내주는 햇빛/적막/빛공장 방사광에 부쳐/석탑의 공기/기분이 좋다는 것이다/석양 신비/준비/연애/그 마음 그립습니다/자기를 빨아가지고/어떤 풍경/풍탁/찬미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촉매/돌배꽃/아, 시간/그림자에 불타다/세상의 모든 색깔로/이른 봄볕/이게 무슨 시간입니까/에코의 휘파람/허공의 속알을 손에 쥐다/밤바다 항해/구름층/산골짝에 등불 비칠 때/꿈이 올라오는 것이었다/모든 말은요/여운-알/찬미 나윤선/결핍 쪽으로/책상은 살아 있다/새벽 3시에 깨어/익어 떨어질 때까지
산문 |세상의 영예로운 것에로의 변용 정현종
<뒤표지 글>
앞에서 노래했으니 이제 입을 닫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