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아주 위험한 시기였고,
그래서 침묵은 절반의 배신이었습니다.”
근대시민사상이 정착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사회주의가 움트는
19세기 중엽의 파리, 루테치아
혁명 시인 하이네가 전하는 생생한 역사 현장의 기록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가 망명 시절 독일 일간지 『아우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게재한 보도문을 엮은 『루테치아—정치, 예술 그리고 민중의 삶에 대한 보고서』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30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우리는 흔히 하이네를 서정시인으로 기억하지만, 하이네는 사회 변혁을 부르짖고 정치적 이유로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마르크스와 교유하며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혁명 시인이었다. 이러한 모습이 가려진 채 낭만적인 사랑 시 작가로만 인식되어온 것이다.
『루테치아』는 파리에 머물던 하이네가 1840년부터 8년여에 걸쳐 파리의 중요한 정치 ․ 사회 ‧ 경제적 사건과 인물, 문화 ‧ 예술계 및 학계의 동향, 민중의 일상을 기사화한 보도문을 엮은 책으로, 하이네는 신문 연재가 끝나고 6년 뒤인 1854년에 기사를 선별하여 보도 당시 금지되었거나 검열에 의해 변형된 부분을 복원한 다음, 부록을 첨부하여 출간했다. 이 책이 ‘파리’라는 도시와 그 속의 다양한 삶을 조명하고 있기에, 파리가 실질적으로 이 책의 주인공이기에, 하이네는 책의 제목을 6세기까지 통용된 파리의 라틴어 이름인 ‘루테치아’로 정했다.
시장경제의 대두와 산업혁명으로 인한 자본주의적 시민사회의 발전, 무엇보다도 황금만능의 사유방식이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19세기 파리에 대한 풍자와 탄식, 이 과정에서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민중의 고통과 분노와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에 대한 깊은 우려가 이 책의 기저를 이루는 문제의식이다.
인명과 지명만 바꾸면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인 듯 착각할 만큼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19세기 유럽에 대한, 더 나아가서는 19세기 세계에 대한 총체적 보고서이면서, 자본주의 태동 이후 인류 역사서의 첫번째 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회 변혁을 꿈꾼 혁명 시인 하이네
하이네는 독일의 대표적 서정시인으로, 강의 요정과 뱃사공의 비극적 사랑을 노래한 「로렐라이」,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에 실린 시들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인생 후반기 25년을 망명생활을 할 만큼 정치 문제에 민감하고 사회 변혁의 의지가 강한 참여문학 작가이기도 하다. 전 생애를 통해 절대주의 국가 체제와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는가 하면 사회적 억압과 도덕적 인습을 비판하고, 개인과 언론 사상의 자유, 여성 해방 등을 부르짖었다.
1831년 귀족 계급을 비판하는 글을 쓰고 지식인 사회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지자 정치적으로 발전하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으며, 1840년부터 『아우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통신원으로서 프랑스의 선진 문화를 독일에 전했다. 이 보도문은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으며, 1843년 하이네는 독일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파리로 온 마르크스와 친교를 맺게 된다.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지만 우정을 나누며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구체적인 강령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둘 다 공통적으로 봉건 타파, 속물 부르주아 비판, 혁명의 필요성, 종교 거부를 주장했다.
『루테치아』는 흔히 ‘정치적 투쟁의 시기(1840~47)’라 부르는 시기에 하이네의 핵심 저작인 보도문을 엮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검열에 의해 훼손된 부분을 저자가 직접 수정 복원하여 묶은 것으로, 하이네의 앙가주망(사회 참여) 작가로서의 면모를 정확히 보여주는 문헌이다. 사회 비판적인 성향으로 인해 독일 연방의회는 1835년 하이네를 비롯한 청년 독일파 작가들의 저작에 대한 금지령을 시행했으며, 또한 하이네가 유대인이자 독일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저술가이기에 그의 사후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는 그의 작품이 모두 금서가 되기도 했다.
19세기 유럽에 대한,
19세기 세계에 대한 총체적 보고서
『루테치아』는 단순히 사건 보도문의 종합이 아니다. “정치, 예술 그리고 민중의 삶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19세기 세계의 수도인 ‘파리’라는 거대한 종합적 현상의 다양한 모습을 다양한 측면과 다양한 시각으로 묘사한다.
사회
어떤 의미에서 『루테치아』는 미래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대한 예언서다. 하이네는 산업혁명과 시장경제의 대두로 자본주의적 시민사회가 발전하면서 생겨난 물질만능주의의 문제점들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19세기 중반, 현대 계급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민중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며 사회 최하층으로 전락한다. 민중의 고통과 분노,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을 인지한 하이네는 사회 정의의 측면에서 혁명의 필연성에는 공감하나, 혁명의 과격함과 폭력성 및 ‘절대적 평등’이라는 이름하에 나타날 획일적이며 집단주의적 문화에 대한 우려도 동시에 드러낸다.
정치
당시 불완전한 민주주의 제도의 실상과 모순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일정 액수 이상 세금을 내는 사람들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불평등 선거, 산업 부르주아지의 권력 투쟁과 이로 인한 상시적 정치 불안, 이익 추구에 급급하여 프랑스 혁명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도 혁명의 이념과 정신을 내던진 부르주아지 지배층의 추악한 실상을 분석하고 비판한다. 국제정치적으로는 프랑스와 독일의 각축으로 인한 범유럽적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 그리고 중동을 둘러싼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쟁탈 정책의 배경과 실상이 하이네 특유의 세계사적 관점과 시각으로 분석되고 있다.
문화․예술
활짝 피어난 시민 문화의 정체성과 특성을 조명했다.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지는 왕과 귀족 대신 예술가의 후원자가 되었고, 유럽 각지에서 예술가와 학자들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찾으러 파리로 왔다. 그러나 하이네는 돈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예술의 순수성과 자율성이 훼손되고, 예술도 상품화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날카롭게 꿰뚫어보았다.
‘고급’ 문화에 가린 민중의 소박한 문화에도 관심을 보였다. 하이네는 민중의 애환이 서린 소박하고 단순한 문화가 도시 문화의 지나친 인위적 기교화와 데카당스적 경향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소박함이 ‘무지함’의 또 다른 표현이며, 무지로 인해 민중이 쉽사리 이념적 ․ 정치적 ․ 종교적 선동의 대상이 되고, 무비판적 집단 광기에 빠져들 수 있음도 인식했다.
“돈은 우리 시대의 신(神)이다”
기록과 해석, 문화 연구서로서의 『루테치아』
『루테치아』는 단순히 다양한 분야를 다채로운 시각으로 관찰한 기록물이 아니라, 특유의 예술적 기법으로 각 사건의 조각들을 맞추어 19세기 중엽의 파리라는 총체적 현상에 대한 하나의 선명한 그림을 보여주는 문화 연구서다.
다양한 조각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완성된 모자이크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조각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원칙, 즉 각 기록들 사이에 질서를 부여하고 연결해 하나의 완결된 전체를 만드는 근본적 시각이 필요한데, 『루테치아』에서 이 근본적 시각을 구성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시민 사회의 발생, 성장, 그리고 예견된 몰락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흐름에 대한 하이네의 인식이다.
평등선거와 민주주의 실현을 둘러싼 당파 간의 알력, 계급 생성과 계급 간의 투쟁, 유럽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 고급 부르주아지 문화의 생성과 예술의 상품화 등, 19세기 파리라는 사회의 모든 현상의 배경에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라는 원칙이 있으며, 따라서 그 문화의 근원과 본성은 ‘자본주의적’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생시몽주의 등의 반자본주의적 또는 자본주의 비판적 현상들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생성물인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에 따르면 문화 연구는 “의미를 찾으려는 해석적 학문”이다. 이에 따르면 『루테치아』는 사실의 기록이자 문화 연구서다. 하이네는 생생한 역사적 현상을 기록한 동시에, 이 개개의 기록을 “돈은 우리 시대의 신(神)이다”라는 자본주의적 원칙에 의거하여 해석하기 때문이다. 문화의 기록과 해석, 이 두 가지 본성에서 『루테치아』의 문화학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저널리즘적 산문의 명문집” 『루테치아』
『루테치아』는 수준 높은 문화사적 텍스트일 뿐 아니라 높은 수준의 예술성을 보여주는 문학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예술가적 필치로 이루어져 전통적인 기록 ‧ 증언과는 다른 독특한 문체와 형식을 보여준다.
『루테치아』에 수록된 보도문들의 가장 대표적인 형식적 특징은 예술적 통일성이다. 각각 개별적 사건과 정보로 이루어진 보도는 저자의 인위적인(즉 예술적인) 배합과 조합을 통해 서로 연계되고, 그 결과 하나의 완결된 전체로서 통일성을 획득했다.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이 저자의 개입을 통해 동일한 문제의 다양한 현상들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저자의 예술가적 개입을 통해 각 보도문이 내적 통일성이 있는 하나의 전체로 재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루테치아』는 기록문의 외양을 지닌 하나의 ‘문학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루테치아』의 독특한 글쓰기 양식 또한 이 작품의 문학적 특성을 보여준다. 보도문은 필연적으로 당대의 생존 인물들, 그것도 고위 권력자, 귀족, 사회 저명인사 등의 실명을 거론하며 그들에 대한 비판과 질책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직간접적인 보복의 위협에 노출되기도 한다. 더욱이 하이네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정치 ․ 문화 ․ 사회적으로 선진화된 도시 파리의 소식을 언론에 대한 통제가 엄격하고 보수적인 독일에 알려야 했기에, 그의 기사가 검열관에 의해 삭제되어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을 경우도 고려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이네는 간접 표현 기법을 택했다. 그래서 『루테치아』는 반어(아이러니), 비유, 은유, 위트, 해학 등 수사학적 기법들의 일대 경연장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수많은 간접 표현 기법은 그 당시 사건을 모르는 오늘날의 독자가 정보를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평생을 연구해온 하이네 전문 연구자의 상세하고 명확한 친절한 주석의 도움으로 당대의 상황을 무리 없이 독해할 수 있다. 오히려 아쉬운 점은 글의 참된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숨겨진 신호를 인지하는 지적 행위를 거쳐야 하는 수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이와 같은 글쓰기로 민중의 갈증을 해소해줄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 본문 속으로
이 책의 내용은 대부분 꽤 오래전에 내가 『아우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실었던 일간 보도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 상당 부분의 초고를 나는 보관해왔고, 이제 새로운 출판에 즈음해 금지되었거나 변형된 부분들을 이 초고에 의거해서 복원하고 있습니다. [……] 문체가 이상하고 의미는 더욱더 이상하게 보이는 부분에서는 이런 의심스러운 부분을 완전히 제거해버림으로써 최소한 예술적 명예를, 즉 아름다운 형식을 구원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제정신이 아닌 붉은 연필이 지나치게 날뛰었던 부분의 삭제는 다만 변두리의 것들에만 해당될 뿐, 사물과 인간에 대한 판단들은 삭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있던 그대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래의 시대적 색체가 상실되지 않습니다. 나는 검열을 받지 않은 상당수의 발표되지 않은 보도문을 조금도 변형하지 않고 추가함으로써 모든 보도문을 예술적으로 통합했고, 이 통합을 통해서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 내놓았습니다. 이 전체는 매우 중요하고 또 흥미로운 한 시대의 모습입니다.
_「헌정 서한」9~10쪽파리로부터의 내 보도는 2월 24일의 파국에까지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보도문의 모든 페이지에서 이 파국의 필연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필연성은 예언자적 고통으로 예언되었습니다.. [……]
나는 아주 미세한 음영에서도 나타난 시대의 그림을 제공하려 했습니다. 정직한 다게르식 사진은 파리 한 마리도 아주 위풍당당한 말과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 묘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 기사들은 매일매일이 그 자체 내에서 묘사된 다게르식 사진의 역사책입니다. 그뿐 아니라 배열하고 정돈하는 예술가의 정신이 이 그림들을 배합하고 편성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으며, 이 작품 안에서 묘사된 것들은 스스로 그들의 사실적 객관성을 신빙할 수 있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내 책은 자연의 작품이자 동시에 예술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지금은 아마 독서계의 대중적 욕구를 충족시키겠지요. 그러나 후세의 역사가들에게는 틀림없이 역사적 자료로서 소용될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일상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보증을 자신 안에 간직한 자료로서 말입니다. _「헌정 서한」12~14쪽
■ 차례
헌정 서한
1부
2부
부록
옮긴이 해설 ‧ 『루테치아』와 예술적 다큐멘터리 문학의 가능성
작가 연보
기획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