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삶의 비밀들을 둘러싼 ‘있음’의 근거
숨기고 싶은, 숨길 수 없는
일곱 가지 비밀들
오늘의 작가, 패션을 쓰다
문학, 패션을 만나다
오늘의 문학과 지금의 패션, 두 극단의 접점을 찾는 뜻밖의 시도인 소설집 『THE CLOSET NOVEL―7인의 옷장』이 출간되었다. 시대가 소비하는 가장 고전적인 상품(이자 예술)인 문학과, 이 시대 가장 화려한 지점을 되비추는 거울인 패션은 어떤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까. 2013년 늦겨울, 그 사소한 질문에서 이 소설집은 시작되었다. 그간 패션지에 소설과 시가 실리고 부록으로 소설집을 제공하는 등 패션의 곁에 문학을 두려는 이런저런 시도가 지속되어왔지만 ‘패션’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직접 다룬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문학과 패션이 만나는 자리에, 한국문학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은희경, 편혜영, 김중혁, 백가흠, 정이현, 정용준, 손보미, 총 일곱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2014년 상반기 각각 ‘들다’ ‘쓰다’ ‘신다’ ‘입다’라는 주제 가운데 하나를 택해 소설을 썼다. 동시에 남성 패션지 『아레나옴므+』와 이 새로운 시도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더 클로짓 노블』은 그 결과물들을 모아 거르고 녹여낸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소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패션을 끌어안는다. 소설은 개인의 서사를 다루는 장르이므로, 『더 클로짓 노블』 속 일곱 편의 소설들은 패션의 일상 속 속성에 주목한다. 우리가 들고, 쓰고, 신고, 입는 것들로써 결핍과 상실을, 삶의 사소한 비밀들과 희미한 추억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간 속에 등장했던 옷과 가방과 안경이라는 사소한 기호들이 가지는 의미는 해독될 수 없다. 그러면 그것들을 보유하고 있다거나, 기억하고 있다거나, 혹은 그것들에 대해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 삶의 비밀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식. […] 어떤 물건들, 어떤 이미지들은 그것이 있었던 것만으로 삶의 비밀들을 둘러싼 ‘있음’의 근거가 된다. 보잘것없는 삶의 비밀들은 ‘보잘것없어서’ 삶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영원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지만, 하나의 구두, 하나의 안경이 만들어내는 시간, 그 물건 속에 새겨진 사소한 비밀들을 짐작할 수 있다. 오직 미적인 것만이 삶을 견디게 해준다는 명제는 완벽한 슈트를 입을 수 있는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_이광호(문학평론가)
옷장 속 비밀을 엿보다
―“삶에는 알 수 없는 시간과 지나간 시간, 돌이킬 수 없는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ootd(outfit of the day). SNS에 매일같이 자신의 착장을 공개하는 사람들이 있다. 늘 회색 티셔츠만 입는 젊은 CEO도 있다. 엊그제 입었던 옷을 또 입는 걸 부끄러워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각인시키려 혹은 단지 귀찮기 때문에 항상 같은 옷을 입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시대, 패션은 개인의 특별함을 꾸며주는 동시에, 그 특별한 내가 실은 어떤 무리에 속해 누구와 함께 얼마나 보편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밝혀주는 무언가이다.
『더 클로짓 노블』로 묶인 일곱 편의 소설에서 들고 쓰고 신고 입는 물건들은 스스로를 돋보이기 위해 개인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라기보단, ‘누군가’나 ‘무언가’를 떠오르게 하는 것들이다. 삶에서 이미 가졌다 놓쳤거나 영영 가질 수 없이 상실 혹은 결핍된 무언가. 있었다가 없어진 누군가의 흔적들, 그리고 그 모든 상징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자의 미래」(정이현)에는 과거에 “어린 연인 앞에서 한없이 다감”했다가 말년엔 “타인에게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태도를 완성시키는” 사람이 되어버린, ‘양’의 옛 연인 ‘박’을 상징하는 레이밴 보잉 선글라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새로운 남자 ‘장’. 그는 “누구와도 다른 남자였다”고 묘사되지만, 양이 장에게 매료된 것은 ‘장’이 안경을 벗고 레이밴을 쓰던 시점부터다. 레이밴을 “단숨에 알아보았으며 그와 동시에 박의 얼굴이 놀랍도록 생생히 떠올랐”던 그때 양을 휩쓴 “이상한 두려움”이야말로, 명확히 이해할 수도 쉽사리 해독될 수도 없으나 물건에 배어 있던 ‘기억’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선글라스는 곧 양이 거쳐온 시간들을 함축하는 ‘비밀’이다. 큐레이터가 술자리에 두고 나온 밤색 가죽 가방과 아티스트의 친구가 남기고 떠난 가방(김중혁), 스웨덴 시인의 한국인 친구가 만들어주려던 털모자(정용준), 친구와 바꿔 신은 운동화(은희경), 모든 것을 갖춘 듯 보이는 이웃집에 신발 대신 몰래 신고 들어간 깔창(편혜영),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남기고 간 신발과 굽이 부러진 하이힐(백가흠), 암흑가의 남자가 차려입은 슈트(손보미) 역시 과거와 현재를 겹치게 하고 흔적을 더듬어 기억하게 하는 것들이다.
‘CLOSET’이란 말 그대로 옷장이며, 숨겨져 있고 비밀이 가득하다는 의미 역시 품고 있다. 옷장 속에서 문학과 패션은 ‘비밀’이라는 키워드로 만난다. 일곱 명의 작가들은 자신의 소설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맞닥뜨리며 생겨나는 불안과 결핍, 상실을 이야기했다. 옷장 문을 열고 개인의 비밀과 추억을 되짚고 난 다음, 다시 닫은 뒤에도 남겨진 비밀들이 더 있다.
작가들의 세계에 매료된 독자들이 궁금해했을 목소리가 한데 묶였다. ‘IN THE CLOSET’에서는 작가들이 옷장 속 어둠을 빌려 짧게 속내를 비친다. 모든 소설가에게 쓴다는 것은 흥미롭고도 난해한 일일 것이다. “살아가는 한 이야기는 생겨”나므로 ‘시간’에 대해 쓰는 작가가 있다. “어떤 이야기에 도달하게 될지” 모르겠다는 작가도 있다. 소설을 쓰는 것은 또한 누군가에게 공 굴리듯이 생각을 굴리다 부풀리고 정리하는 일이다. “시간을 견뎌” “작가로서의 신뢰”를 쌓아 “말년까지 좋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로 남고 싶어 하기도 하고, “너무 숨 가쁘게 온 것 같아서” “앞으로 무엇을 쓸지 의식적으로 생각을 안 하려”고도 한다. 좋은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어찌 됐건 쓰고는 있을” 것이고 “진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인터뷰에서 추려낸 문장들은 어쩌면 그들이 신중하게 내놓은 ‘힌트’가 아닐까? 비밀이자 힌트로, 다만 그들의 소설을 짐작할 뿐이다.
작품 속으로―7인의 작가들, 들다, 쓰다, 신다, 입다
– 들다
가방 안에 뭐 들어 있어요?
별거 없어요.
가방 안에 든 것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예요?
글쎄요.
잃어버리면 절대 안 되는 거.
없을걸요.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건 가방에 안 넣죠.
그래요?
전 그래요.
―김중혁, 「종이 위의 욕조」
– 쓰다
양은 그들의 사랑이 불투명한 도기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청주 같은 것이었다고 의심해야 했다. 한 잔씩 따라 달게 홀짝이다 보면 이윽고 비어버리는 것.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술병은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 전에 박은 음모에 대해 말했었다. 공작에 휘말렸어. 그는 ‘적들’이라는 명사와 ‘저들’이라는 대명사를 병행해 사용했다. 정치인이라는 직업답게 전에도 종종 쓰던 용어였다. 적들이 이미 증거를 확보하고 있어. 저들은 덫에 걸린 짐승은 그냥 놔주지 않아. 그때까지 그녀는 오로지 시간만은 그들의 편이라고 믿었다. 모두에게 져도, 시간에만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정이현, 「상자의 미래」
1월의 어느 밤이었어. 겨울도 그쯤 되면 바위처럼 단단해지지. […] 뭔가 극복해야 하거나 이겨내야 한다는 마음조차 사라지거든. 순록이 자신의 무뚝뚝한 기질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은 저조한 감정에 대해 깊이 회의하지 않게 되지. 그런 나날들이 지나고 있었어. 그 밤은 이상하게 포근했던 것 같아. 우리는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었어.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만 이상하게 미명처럼 푸르게 느껴지더군. 그에게 물었어. 괜찮으냐고. 그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나쁘지 않아,라고 답하더군. 그도 내게 같은 질문을 했지. 나는 우는 시늉을 하며 말했어. 죽겠다,라고 말이야. 그와 나는 잠시 웃었던 것 같아. 그리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어. […] 그때 그는 내게 줄 모자를 만들고 있었어.
―정용준, 「미드윈터」
– 신다
작은 소년은 자기 신발을 벗더니 친구의 신발에 발을 집어넣었다. […] 그는 잠깐 도로 엉덩이를 붙인 다음 제 어깨로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이것 봐. 앉은키는 내가 더 커. 그런 다음 몸을 일으켜 지도교사의 자리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고개를 통로 쪽으로 기울인 채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비틀비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단단히 바닥을 딛고 버티는 자신의 신발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은희경, 「대용품」
유신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런 짓을 벌일 만큼 용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연은 불쑥 신발장 문을 열었다. 무엇이 그렇게 하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유신이 옆집 도어록을 두고 비밀번호로만 열 수 있다고 해서일까. 금은방 도어록을 설치했다고 거짓말을 해서일까. 하루 종일 제목도 모르는 올드팝을 듣고 가사도 모르면서 허밍으로 뭔가 따라 부르기 때문은 아닐까.
―편혜영, 「앨리스 옆집에 살았다」
혜진은 비를 흠뻑 맞으며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배수구로 쓸려 내려가는 빗물과 멀리 도망가 뒤집어진 가방을 번갈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더듬더듬 흩어진 여자의 낡은 구두를 가지런하게 모았다. 앞부리의 굵은 주름이 만져졌다. 한 번도 닦아 신지 않은 듯 보이는 구두. 먼지와 때가 굳어 가죽의 일부가 되어버린 구두를 그녀가 가슴에 움켜쥐었다. 그녀는 여자의 낡고 굽 낮은 구두를 신고 절뚝이며 골목길을 내려갔다. 굽이 나간 하이힐이 가방 안에서 서로 부딪히며 덜그럭거렸다.
―백가흠, 「네 친구」
– 입다
난 잘 차려입은 남자가 좋아요.
그녀를 처음 봤던 날, 그녀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1년 전의 일이다. 그녀는 케이의 새 여자였다. […] 그녀는 웃을 때 입을 벌리는 법이 없었다. 웃음 끝에는 한숨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피로한 웃음과 한숨. 그것이 그녀의 미소였다. 그녀의 얼굴은 어떻게 보면 열여덟 살로도 보이고, 어떻게 보면 마흔 살로도 보였다.
―손보미, 「언포게터블unforgettable」
여는 글
박지호, 패션이라는 파사주
들다
김중혁, 종이 위의 욕조
쓰다
정이현, 상자의 미래
정용준, 미드윈터
신다
은희경, 대용품
편혜영, 앨리스 옆집에 살았다
백가흠, 네 친구
입다
손보미, 언포게터블UNFORGET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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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보잘것없는 비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