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따라 살기 - 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

김수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4년 10월 31일 | ISBN 9788932026503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20쪽 | 가격 16,000원

책소개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책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
삶과 예술의 경계, 책과 현실 간의 거리를 거부하고
삶의 현장을 역사의 실험대로 바꿔놓으려 했던 러시아적 태도! 

‘책에 따라 살기’에서 ‘대화적 주체’ 개념까지,
로트만의 사유를 통해 본 러시아적 문화 유형의 매혹과 위험

 

 

유토피아적 이념의 현실화는커녕 유토피아의 가능성 자체를 믿지 않게 된 오늘날,
책에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리 로트만은 18세기 러시아 문학의 위상을 논하는 한 저술에서, 18세기 러시아인들이 책을 대하는 독특한 태도를 “책에 따라 살기”라는 말로 표현했다. 당대 러시아의 문학 텍스트는 실제 독자들이 아니라 이상적으로 구축된 독자의 형상을 지향했으며, 실제 독자들 역시 이런 이상화된 모델을 일종의 규범으로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에, 사실상 독자들에게 단순히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책에 따라 살 것’이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삶과 예술의 경계, 책(이념)과 현실 간의 거리를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삶의 현장을 끝없는 역사의 ‘실험대’로 바꿔놓으려 했던 이러한 극단적으로 원칙주의적인 태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저자는, 이제 더 이상은 아무도 ‘책에 따라’ 살려 하지 않는 우리 시대, 유토피아적 이념의 현실화는커녕 유토피아의 가능성 자체를 믿지 않게 된 이 시대에, 무한한 가능성과 현실적 위험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책에 따라 살기’라는 러시아적 태도를 다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유리 로트만 연구자 김수환,
로트만과의 동시대적인 대화를 시도하다

『책에 따라 살기: 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학과 김수환 교수의 두번째 로트만 연구서이다. 유리 로트만은 미하일 바흐친과 더불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현대 러시아 지성계의 대표적 학자이자 문화기호학의 창시자이다. 김수환 교수의 첫번째 저작 『사유하는 구조』(2011)가 로트만에 관한 10년간의 연구결과를 집대성하여 로트만의 세계를 총체적으로, 온전하게 그려내려 했다면, 이번 책은 로트만의 시선과 언어를 그대로 되살리면서도 그의 문제의식을 우리 시대를 사유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물음으로 재구성해낸, 저자의 개성이 두드러진 역작이라고 하겠다. 저자는 ‘책에 따라 살기’라는 러시아만의 독특한 태도로부터 도시와 영화에 대한 해석, 그리고 ‘대화’와 ‘주체’ 개념까지, 로트만의 사유를 통해 본 러시아적 문화 유형의 매혹과 위험을 흥미롭게 서술해나간다. 이 책은 학문적 깊이를 가진 연구서이지만, 로트만의 개념과 질문 들을 현재의 문제들을 사고하기 위한 흥미로운 좌표로 전유해내려는 저자의 노력과 유려한 문체가 결합되어, 일반 독자들에게도 로트만과 동시대적인 대화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새로운 세계, 그것은 오직 과거의 철저한 파괴를 통해서만
구축될 수 있다! (로트만의 2원 모델)

로트만은 러시아 문화의 특징을 서구의 3원 모델과 구별되는 2원 모델로 규정한 바 있다. 저자는 ‘책에 따라 살기’라는 태도가 로트만이 말한 2원 모델의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서구 가톨릭에서 내세는 천국-지옥-연옥으로 구성되는데(이때의 연옥은 일정한 시험을 거친 후 내세에서의 구원이 허용되는 중립적 행동의 영역으로, 과거와 미래 사이의 연속성을 보장해준다), 러시아 정교에서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라는 중립 개념을 만들지 않았다. 이 모델은 새로운 것을 ‘연속’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것의 종말론적 ‘교체’로서 사고한다. 새로운 세계는 오직 과거의 철저한 파괴를 통해서만, 말하자면 구세계의 종말론적 폐허 위에서만 구축될 수 있다. 어정쩡한 중간 항, 절충과 타협의 결과로서의 제3항을 거부하는 이러한 입장은 책과 현실 간의 거리를 거부하는 러시아적 태도와 맞물려 있다.

로트만에 따르면 ‘책에 따른 삶’의 경향, 이상적 이념의 영역과 실제 삶의 영역을 섞어놓으려는 경향은 18세기만이 아니라, 러시아 문화사의 각 단계에서 불변적 항수로서 유지, 강화되어왔다. 19세기 독일 관념론이 실질적인 사회 개혁의 프로그램으로 진화한 곳은 러시아였다. 마르크스의 이념이 혁명의 과업으로 실현된 것도, 또 과격하기로 유명한 20세기 아방가르드의 예술 프로그램이 현실 구축의 강령으로 실험된 곳 역시 러시아였다. ‘범인凡人들의 도덕률을 초월할 수 있는 초인은 가능하다’라는 니체식의 명제를 19세기 러시아의 법대생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라. 그는 그와 같은 가설적 명제를 현실 속에서 ‘실험’하기 위해 직접 도끼를 손에 쥐고야 만다.

러시아에서 문학은 언제나 ‘문학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것은 철학적 사유의 시험대이자 사회 변혁을 위한 프로그램이었으며, 민족의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이자 미래를 향한 예언의 기초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및 작가)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역할은 문학 창조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단지 작품을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그런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는 문화 자체를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했다. “작가는 문화적 상황을 뒤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창조한다. 그는 텍스트를 창조해야 할 필요성뿐 아니라 그것을 읽을 독자들, 나아가 그런 문화 자체를 창조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한다.”(유리 로트만)

로트만은 러시아 문학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이야기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고도의 원칙주의적인 러시아적 태도가 정치적 현실의 영역에 적용되었을 때의 위험성, 이념의 거친 현실화가 야기하게 될 불행한 결과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년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없는 삶이란 도덕적, 정신적으로 빈곤한 것이 되겠지만,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따르는 삶이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끔찍한 것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 김수환은 로트만을 따라, ‘책에 따라 살기’라는 유토피아적인 모델의 매혹과 위험성을 동시에 언급하면서도,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화보다는 오히려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쉬워진” 오늘의 시대, 더 이상 아무도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믿지 않게 된 이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총 3부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이론과 문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문화기호학자’ 로트만이 아니라 ‘러시아 이론가’로서의 로트만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중심은 러시아 문화의 유형학적 특징에 천착하는 러시아적 유형의 사상가, 즉 이론(가)의 문화적 정체성이다. 이 글들을 통해 러시아 문화/이론의 지형과 그 흥미로운 특징들을 파악할 수 있다.

제2부에는 영화와 도시를 주제로 한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로트만은 단행본 『영화기호학』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도시기호학과 관련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 묶인 글들을 통해 독자들은 ‘러시아 이론’의 맥락 바깥에서 훨씬 더 자유롭고 풍부하게 ‘다른’ 사유들과 접속하는 사유의 확장성을 경험할 수 있다.

제3부 ‘대화와 주체’는 다시 러시아 이론의 유형학적 특수성 문제에 집중한다. 문화 상호작용과 자아 모델을 다루는 두 글을 아우르는 키워드는 ‘대화적 주체’의 개념이다.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주체에 관한 러시아적 관점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걸려 있는 만큼 여기서는 로트만과 더불어 또 한 명의 사상가, 20세기 러시아 사상의 한 축을 담당하는 미하일 바흐친의 사유가 동원된다. 대화 개념을 중심으로 한 바흐친의 사유는 로트만의 사유와 나란히, 때로는 엇갈리게 배치되면서 ‘주체의 유형학’이라는 대 주제의 러시아식 판본을 제공한다.


본문 속으로

나는 로트만이 말한 2원 모델의 개념이 텍스트를 대하는 독특한 러시아적 태도(“책에 따라 살기”)와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어정쩡한 중간 항, 절충과 타협의 결과로서의 제3항을 거부하는 그들의 입장은 삶과 예술의 경계, 책과 현실 간의 거리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그들의 태도와 맞물려 있다. [……]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것’에 머물지 않고 직접 그들을 ‘따르려는’ 삶, 그 실험적 삶이 동반해야 했던 온갖 구체적인 고통들을 생각했고, 구세계를 밑바닥까지 파괴한 후 그 폐허 위에서만 새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2원 모델이 러시아의 역사에 남긴 지속적인 상흔을 떠올렸다._19쪽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듯,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화보다는 오히려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쉬워진” 오늘날, 다시 새롭게 “유토피아를 발명”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더 크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금 곱씹게 되는 것은 러시아의 역사를 관통해온 저 도저한 원칙주의의 태도다. 문학을 대하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특징을 지적하면서 이사야 벌린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러시아인들의 공로로 생각하는 부분은 대단히 윤리적인 그들의 태도이다. 삶과 예술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서로 일치하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윤리적이다.”_20쪽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제 더 이상은 아무도 ‘책에 따라’ 살려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는 유토피아적 이념의 현실화는커녕 유토피아의 가능성 자체를 믿지 않게 된 것처럼 보인다. 부분적인 보완과 개선은 가능할지라도 현실의 근본적인 변혁이란 절대 불가능하며, 그런 변혁의 시도는 더욱더 끔찍한 파국과 불행(가령, 파시즘)을 가져올 뿐이라고 굳게 믿게 된 시대,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_21쪽

일찍이 로트만은 18세기 러시아 문화의 맥락 속에서 문학의 역할과 위상을 논하는 한 저술에서, 당대의 문학과 독자들의 관계 양상을 “책에 따라 살기”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그는 당대의 문학 텍스트가 현존하는 실제 독자가 아니라 이상적으로 구축된 독자의 형상을 지향했으며, 또한 실제 독자들 역시 이런 이상화된 모델을 일종의 규범으로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에, 사실상 “독자들에게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책에 따라 살 것이 요구되었다”고 주장했다._23쪽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작은 인간’(가령,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주인공 제부슈킨)은 같은 계급의 프랑스인과 달리, 사회적 신분의 상승을 꿈꾸지 않는다. 그 대신 그가 꿈꾸는 것은 훌륭한 글쓰기(의 재능)이다. 러시아에서 작가는 언제나 일종의 비공식적 권력, 말하자면 ‘두번째 정부’로 간주되어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의 통치자들(예카테리나 2세부터 레닌에 이르기까지) 역시 부단하게 스스로를 문학가로 표상하려 시도해왔다. 레닌은 문학비평가, 스탈린은 언어학자였으며, 흐루쇼프는 현대예술 비평가였고, 브레즈네프는 직접 소설 3부작을 썼던 작가였다._25~26쪽

라디시체프의 수수께끼 같은 자살이 공포로 인한 맹목적 선택이 아니라 오랫동안 숙고된 ‘지성적 행위,’ 곧 나름의 ‘저항 방식’이었다는 점을 밝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반드시 애디슨의 비극 『카토』라는 코드(모델)를 경유해야만 한다. 황제와의 독대 이후 많은 이들의 예상을 거스르며 돌연 퇴직했던 차다예프의 행위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밝혀내려면, 그가 ‘러시아의 포자 후작’(실러의 비극 『돈 카를로스』의 등장인물)을 연기하려 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고작 석 달을 함께 산 남편을 따라 고된 시베리아 유형에 함께했던 12월 당원의 아내 마리야 볼콘스카야의 이해하기 힘든 행위 역시, 그녀가 릴레예프의 시를 읽고 거기서 제시된 영웅적 행위 프로그램을 따르고자 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온전히 해명된다._33쪽

18세기 러시아 근대 문학의 시작과 함께 나타난 이 태도는 낭만주의-리얼리즘-모더니즘을 거치면서도 일종의 불변적 항수로서 ‘유지’되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 문학의 유기적 성장과 더불어 점점 더 강화되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애초에는 일정 정도 비유적인 양상을 띠었던 ‘책에 따른 삶’이라는 행위 모델이 러시아 모더니즘의 끝자락(미학적 아방가르드)에서 가장 극단화된 형태로 탈바꿈하는 것, 말하자면 그것의 ‘글자 그대로’의 실현을 마주하게 되는 일은 지극히 의미심장하다. 세기 전환기에 전 유럽을 물들였던 ‘끝’과 ‘시작’에 대한 첨예한 감각이 마침내 눈앞에서 현실화된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 ‘새로운 문화’의 창조라는 명제는 더 이상 예술 운동의 영역에 한정된 미학적 구호가 아니었다._34~35쪽

그렇다면 문제는 ‘예술 텍스트의 프리즘을 통해 삶을 바라보려는’ 이런 독특한 지향과 의도가 실제로 해당 시기 인간들에게 가져다준 결과, 다시 말해 이런 태도가 수반했던 문화적 ‘기능’이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 일이다. 예술적 잣대를 통해 삶을 바라본다는 것, 삶 속에서 예술을 ‘산다’는 것은 18~19세기 초반의 러시아 귀족들에게 무엇을 의미했을까? ‘삶이 예술을 서둘러 모방했던’ 이 시기 인간들은 일상적 삶을 “마치 무대 위에 선 것처럼” 살아갔다. 무대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의식적으로 ‘연출’해낸다는 것, 자신에게 특정한 ‘배역’을 부여하고 그 자신이 ‘등장인물’이 됨으로써 결국 스스로의 삶을 ‘플롯’을 지니는 것으로 ‘창조’해낸다는 것을 뜻한다._34쪽

1977년에 우스펜스키와 함께 발표한 「러시아 문화의 역동적 전개에서 이원적 모델의 역할 」에서 로트만은, 중세로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러시아 문화사의 전개를 원형적 모델의 역동적 변형 과정으로서 제시한다. 이때 원형적 모델이란 원칙상 대립되는 두 문화 영역, 즉 성聖과 속俗의 ‘양극적 배치’로서 실현되는 중세 러시아 문화의 ‘2원 구조’를 가리킨다. [……] 하지만 러시아 중세 문화의 이런 특징은 독립된 자족적 실체라기보다는 그에 대립하는 서구적 유형과의 유형학적 비교의 산물이다. 중세 러시아 문화의 원칙적인 2원론, 즉 ‘천국 대 지옥의 2원 구조’는 서구 가톨릭 세계의 ‘3원적’ 세계 모델(천국-연옥-지옥)과의 비교를 통해 모델화된다.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의 중간 단계인 연옥을 지니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러시아 문화의 2원 구조가 의미화되는 것이다._106~107쪽

‘페테르부르크 텍스트’의 정점이자 가장 잘 알려진 무대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다. “7월 초순, 굉장히 무더운 저녁 무렵에 한 청년이 S골목의 세든 조그마한 자기 하숙방에서 한길로 나와, 뭔가를 망설이듯 천천히 K다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죄와 벌』은 페테르부르크가 만든, 그리고 페테르부르크에 바쳐진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페테르부르크의 빈민가 센나야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진 거리를 한 청년이 걷고 있다. “벌레만도 못한” 인간인 전당포 노파의 집에 당도하기 위해, 그는 정확히 730보를 걸어간다. 찌는 듯이 덥고,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한 악취가 풍기는 거리, 라스콜리니코프의 위대한 망상과 살인은 바로 ‘이 거리에서’ 생겨나고 실행되었다. 『죄와 벌』은 19세기 러시아 대도시의 실상에 관한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한 사회적 기록이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빼어난 임상보고서이다._182쪽

로트만은 나-나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적 특성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번째는 “말을 축약하려는 경향”이다. [……] 그와 같은 압축형이 전달되는 메시지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을 때에만 해독이 가능한 일종의 ‘지표적’ 암호의 성격을 띠게 되리라는 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의 원칙은 “알아볼 수 있는 사람만 알아보게 하라”인 것이다. 이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가 바로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사랑 고백 장면이다. 남자 주인공 레빈은 문장을 이루는 단어들의 앞 글자만을 사용해 사랑을 고백하는데, 여주인공 키티는 단박에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 에피소드가 상징하는 바는 명백하다. 그것은 키티와 레빈이 이미 정서적으로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 사실상 자기커뮤니케이션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_247쪽

목차

서문
로트만, 나의 동시대인 4

제1부 이론과 문화
1장 책에 따라 살기: 러시아적 문화 유형의 매혹과 위험 16
1 책에 따른 삶 23
2 문학의 신성화 혹은 문학중심주의 25
3 행위시학: 삶의 예술 32
4 ‘유토피아적’ 미학주의와 ‘미학적’ 유토피아주의 38
5 2원적 모델의 매혹과 위험 48

2장 문화시학의 길: 로트만의 ‘행위시학’ 방법론 52
1 텍스트의 이론과 행동의 이론 60
2 행위시학: 문학연구와 문화이론의 ‘사이’ 62
3-1 문학과 삶의 변증법: 러시아 형식주의와 소비에트 구조주의 66
3-2 문화론적 접근: 행위시학의 관점 71
3-3 행위시학의 방법론: 기호학과 시학 사이 78
3-4 행위시학의 입장: 신화와 이데올로기 사이 86
4 예술(문학)과 현실(권력)의 문화적 모체 91

3장 러시아 이념과 러시아 이론: 로트만 이론의 문화적 정체성에 관하여 96
1 반성적 성찰 102
2 문화기호학: 현대의 마스크를 쓴 역사철학인가 106
3 내 것과 남의 것: 마법적 시스템 대 종교적 시스템 112
4 내 것과 남의 것: 분절적 모델 대 비분절적 모델 118
5 러시아 이념 대 러시아 이론 124

제2부 영화와 도시
4장 영화기호학과 포토제니: 로트만의 ‘신화적 언어’ 133
1 포토제니: 영화기호학의 ‘외부’ 138
2 영화와 신화적 언어: 고유명사의 문제 146
3 클로즈업: 고유명사로서의 얼굴-기호 152
4 영화와 의식의 이종성: 이분법에서 혼종성으로 159

5장 문화사와 도시기호학: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162
1 기호학과 역사연구: 문화사의 기호학 167
2 로트만의 도시기호학과 상트페테르부르크 169
3 도시명의 기호학: ‘베드로’의 도시에서 ‘표트르’의 도시로 174
4 도시 공간의 기호학: 페테르부르크 신화와 텍스트 177
5 19세기 페테르부르크: 저개발의 모더니즘 187

제3부 대화와 주체
6장 문화 상호작용과 글로컬리티: 바흐친과 로트만의 ‘대화’ 개념 194
1 합성어 글로컬리티가 의미하는 것 201
2 바흐친의 자아 모델: 경계적 실존과 대화 204
3 로트만의 기호계: 혼종성과 비대칭성 210
4 영향에서 대화로: 문화적 대화와 변형의 메커니즘 215
5 글로컬리티, 대화적 동의 혹은 다시 쓰기 225

7장 러시아적 주체: 바흐친과 로트만의 ‘자아’ 개념 228
1 바흐친과 로트만의 자아 모델 233
2 바흐친의 내적 발화: 비공식적 의식과 내적 대화성 237
3 로트만의 자기커뮤니케이션: 인격의 재구성과 통사론적 축약 242
4 바흐친과 로트만: 자기를 초과하는 인격 대 자기조직화하는 체계 249
5 자아에 관한 러시아적 모델 254

미주 258
원문출처 284
참고문헌 285
찾아보기(인명) 299
찾아보기(작품명) 306
찾아보기(용어) 310

작가 소개

김수환 지음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문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책에 따라 살기』 『사유하는 구조』 등이, 옮긴 책으로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코뮤니스트 후기』 『영화와 의미의 탐구』(공역) 『문화와 폭발』 『기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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