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여는 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459

김형영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4년 9월 30일 | ISBN 9788932026626

사양 변형판 128x205 · 112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나 없는 내가 되어 가슴으로 듣는 말
일상 속 영성의 무한한 파동들

일상 속 신성을 맞이하다

시력(詩歷) 50년을 앞둔 시인 김형영의 아홉번째 시집 『땅을 여는 꽃들』이 출간되었다. 2009년 『나무 안에서』 이후 5년 만의 시집이다. 5년간 써온 시 가운데 53편을 추려 시기별로 부를 나누어 묶었다. 1부는 2013~14년, 2부는 2012년, 3부는 2011년, 4부는 2009~10년에 쓰인 시들이다. 간결하고도 응축된 시어로 관악산 자락 자연에서 얻은 몸과 마음의 여유를 담담히 담아낸 그간의 시적 경향이 여전하다. 한편 자신의 정서를 직접 드러내기보다 일상을 품어 안아 자연이나 주변 사물과의 소통을 시도하면서 교감을 꾀하고, 사물의 존재 형식에서 생의 본질을 찾아내려 애쓰며 근원적 깨달음을 구하는 김형영 특유의 ‘일상 속 신성’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선연하다. ‘말 너머’에서 소통하는 새나 꽃과 한몸이 되어 느끼는 영적 교감의 숨은 기쁨, 태어나 자랐다 사라지고 마는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누구나 여지없이 맞닥뜨리는 죽음이라는 보편적 비극을, 김형영은 단아하고 정갈한 시로써 모두와 나누려 한다.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희원하는 시인의 품과 격은, 때로는 단아한 서정으로 때로는 순간의 격정으로 나타난다. 우리 시단의 대표 중진 시인으로서, 김형영은 오랫동안 자신이 축적해온 종교적 사유를 더욱 단출하고 응집력 있게 보여주며 심미적 감각을 통한 정갈하고 산뜻한 관찰과 묘사의 힘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시집은 그러한 사유의 깊이와 감각의 구체를 통해 가닿은 미학적 결정(結晶)이다._유성호(교수, 문학평론가)


말 너머의 말, 교감(交感)이라는 성스러움
나 없는 내가 되어 가슴으로 듣는 말

지난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다. 신드롬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행보마다 눈길을 끌었다. 왜 사람들은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교황에게 그토록 열광했을까. 마음에 닿는 것은 ‘말’이 아니다. ‘지금 여기’의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보잘것없고 낮은 모든 것에서 관심을 거두지 않은 몸짓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존재들을 품어 안는 행동, 그것이 오늘날의 성(聖)스러움일 테다. 말 너머에 교감이 있다.

독실한 종교인으로서 끊임없이 영성을 좇아온 김형영 역시 거대한 관념이 아니라 일상에 주목한다. 꽃들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하루와…… 시인은 매일 맞닥뜨리는 소소한 자연에서 ‘말 너머’의 소통 방식을 발견한다. 온전한 소통을 위해선 “눈도 귀도 입도 닫고” “품어”서 안아들여야 한다(「땅을 여는 꽃들」). 비록 “나무가 아는 것을 나도 알고 싶어/나무를 안고 얘기를 나누면/저 사람 헛소리한다고 수근거”리지만, 품어 안는 것은 “없는 것을 본 것이 아니고/안 보이는 것과 교감”(「하늘에 바람을 걸고」)하는 일이다. “담장 밑에 민들레며/겁 없이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은 “한참을 그냥 마주 서서/속사정”을 나누는 “말벗” 같고(「말벗」), “나무를 안으니/내 몸속에 수액이 흐”(「回春)르는 듯하다. “나 없는 내가 되어 가슴으로 듣는 말”(「교감」)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어 견딜 수 없”(「지금 여기에」)던 김형영은 “생명의 리듬이 만져지고 보이는 ‘음악’이요, 숨결의 형식이 선연하게 들려오는 보이지 않는 ‘그림’”(유성호)인 시로써 그 ‘영성’을 채록하고 전달한다.

운명을 견뎌내느라
꿋꿋이 서 있는 너를 볼 때마다
내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내 생각은 너무 가벼워
몸 둘 바를 모르겠기에
나는 때때로 네 앞에서 서성거린다.
너를 끌어안고서
네 안으로 들어가려고,
너를 통해서
온전히 네가 되어보려고.
                                  ―「나무를 위한 송가」 전문

프란치스코와 새는
무슨 말로 대화했을까.
그야 영적 대화겠지,
무심코 대답했는데
옆에서 누가
그걸 영적 교감이라는 거여,
단숨에 고친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들은
의미가 깊다 해도
영적 교감은 아니다.
새가 무슨 말을 하는지
꽃은 왜 웃다 말다 하는지
바위는 정녕 침묵만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비라면 혹 알까?)

영혼이 오가는 순간을
어찌 귀와 입으로 붙잡겠는가.
눈도 아니다.
생각도 아니다.
나 없는 내가 되어
가슴으로 듣는 말,
사랑의 숨결이다.
                             ―「교감」 전문


이 세상과 저세상의 깊이를 동시에 탐구하는 시
사라졌도다,/온다 간다 말 한마디 없이

김형영은 또한 태어나 자라고 융성했다 스러지는, 살아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맞이하기 마련인 생사(生死)를 만물에서 발견하고 사유하여 ‘생명체’로서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신성한 법칙에 순응한다. 이번 시집에는 시인이 떠나보낸 사람들을 그리는 사우곡(思友曲)이 수록되어 있다. 생각 날 때마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바치는 화살기도처럼, 먼저 세상을 떠난 박재삼, 오상순, 최인호 등의 선후배 문우(文友)들과 마음으로 존경하던 김수환 추기경 등 이 세상을 함께 살다 간 이들의 흔적을 더듬되 격정에 빠지진 않는다.

신성을 쉼 없이 사유하고 성찰하며 체화하는 일은 자칫 지칠 수 있는 과정이다. 시인 역시 스스로 ‘헛것’을 좇고 있다며 자책 섞어 이야기하지만, 비록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살아왔더라도 “내가 만물과 함께 주인”임을 알아간 시간이므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김형영에게 ‘신성 찾기’란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피로감 없이 거듭 주변의 사물과 삶의 지표를 견고하게 결속시킬 수 있는 것이리라.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산다.
내가 꽃인데
꽃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내가 바람인데
한 발짝도 나를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울안에 갇혀 산다.

내가 만물과 함께 주인인데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평생도 모자란 듯 기웃거리다가
나를 바로 보지 못하고
나는 나를 떠나 떠돌아다닌다.

내가 나무이고
내가 꽃이고
내가 향기인데
끝내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헛것을 따라다니다
그만 헛것이 되어 떠돌아다닌다.

나 없는 내가 되어 떠돌아다닌다.

* 「열왕기 하권」 17장 15절.
                                         ―「헛것을 따라다니다*」 전문

바라던 것을 버리고
아는 것을 버리고
가진 것을 버리더니
마침내 자신까지 버린 이여.
당신이 버리고 떠난 흔적마다
온통 꽃이 피었습니다.

나비 날고
벌들 찾아드니
바람은 덩달아 불고
몇백 년 닫혀 있던 가슴이 열립니다.
문을 여는 이는 안 보여도
여기저기서
너도 나도 다투듯 저절로 열립니다.

―「흔적—문득 김수환 추기경 생각이 나서」 전문


뒤표지 글(시인의 글)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산다.
내가 꽃인데
꽃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내가 바람인데
한 발짝도 나를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울안에 갇혀 산다.

내가 만물과 함께 주인인데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평생도 모자란 듯 기웃거리다가
나를 바로보지 못하고
나는 나를 떠나 떠돌아다닌다.

내가 나무이고
내가 꽃이고
내가 향기인데
끝내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헛것을 따라다니다
그만 헛것이 되어 떠돌아다닌다.

나 없는 내가 되어 떠돌아다닌다.


시인의 말

1부는 2013~14년에
2부는 2012년에, 3부는 2011년에
4부는 2009~10년에
쓰거나 발표한 것들 순으로 엮었다.
엮고 난 지금의 내 느낌은
시 쓰기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 시집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시란 ‘눈에 보이는 음악’이어야겠다는 것이다.

2014년 가을
김형영

목차

시인의 말

1부 지금 여기에
옆길
땅을 여는 꽃들
교감
지금 여기에
봄·봄·봄
내가 나다
쉬었다 가자
無에 대하여
시인 박재삼
공초 오상순
I love you
조금 취해서
回春
한통속
수평선·7
하염없어라
철조망에 묶여
마지막 꿈
작은 생각들

2부 오늘은 당신 없이
오늘은 당신 없이
눈이 오시는 날
짝사랑
인간의 말에는
초범
화살기도
오늘의 기도
사는 날같이
낙엽

3부 햇빛 밝은 아침
말벗
햇빛 밝은 아침
꿈을 찾아서
앵무새를 기리는 노래
양파와 쪽파
제비
林立
산꼭대기에 올라
봄나비처럼
하늘에 바람을 걸고
이런 法案
월명암 낙조대

4부 헛것을 따라다니다
회오리바람에
한강을 바라보며
나무를 위한 송가
수평선·6
베드로의 고백
흔적
죄의 뿌리
바위
사랑의 외침
없이 계시는 님
검단산 시산제
너 어디 있었나
헛것을 따라다니다

해설 | 서정과 영성의 파동들 . 유성호

작가 소개

김형영 지음

시인 김형영은 1944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1966년 『문학춘추』 신인 작품 모집, 1967년 문공부 신인예술상에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칠십년대’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 『침묵의 무늬』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다른 하늘이 열릴 때』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새벽달처럼』 『홀로 울게 하소서』 『낮은 수평선』 『나무 안에서』 『땅을 여는 꽃들』 『화살시편』, 시선집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 한영 대역 시집 『In the Tree』가 있다.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육사시문학상, 구상문학상, 박두진문학상, 신석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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