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지독해져버린 운명들의 이야기
회복 불가능한 상처와 약속되지 않는 미래
물기 빼앗긴 삶이 흘리는 메마른 눈물들
이미지들의 강렬한 상징적 압축미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붉은 코끼리」를 통해 ‘뛰어난 상징적 압축미’를 보여주며 등단한 이은선(32)이 그간 꾸준히 발표한 작품 10편을 모아 첫 소설집 『발치카 No. 9』(문학과지성사, 2014)을 내놨다. 데뷔작에서 호평을 받은, 이미지를 함축해 제시하는 그의 문법은 이후 소설의 무대를 달리할 때마다 현란하거나 진지한 보폭으로 자기만의 동선을 확보해왔다. 등단한 해에 신춘문예 당선자 특집으로 『현대문학』 4월호에 발표한 「카펫」은 문단으로부터 단숨에 신뢰를 받아 바로 다음 계절에 『문학과사회』에 재수록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까롭까」로 경기도가 주관하는 “2011년 우수예술프로젝트 선정사업”에서 지원금을 수혜하는가 하면 표제작인 「발치카 No. 9」은 1년 동안 발표된 신인 소설가들의 작품 중 우수한 작품을 가려 묶는 『2012년 젊은소설』(문학나무)에 수록되기도 했다. 이렇듯 이은선을 향한 문단 안팎의 관심이 컸다곤 하지만 소설을 묶기까지 걸린 4년은 그다지 짧지 않은 편이다. 작가는 카펫의 수를 놓듯 정교하게 이미지를 배치하고 그 사이를 메울 언어를 찾기 위해 수많은 밤을 새웠다고 한다. 자기만의 소설을 고집하느라 걸음이 다소 더뎠던 것은 아닐까. 이은선의 첫 소설집이 더 반가운 이유다.
우리 소설사에서 보기 드문 공간
이은선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조금 특별한 나이테가 몇 겹 발견되는데, 소설가가 되기 전에 한국국제협력단(KOICA) 단원의 자격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세계언어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를 지낸 시기가 그중 하나다. 이은선의 작품 제목들에 등장하는 이채로운 단어들 ‘까롭까’ ‘톨큰’은 러시아어로 각각 러시아어로 상자, 파도라는 뜻이고 ‘발치카’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맥주 브랜드이다. 이는 두말할 것 없이 작가의 당시 견문이 빚어낸 제목이다(우즈베키스탄은 공식적으로 우즈벡어를 사용하지만 민족 간의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는 러시아어라고 한다). 소설의 배경도 물론 우즈베키스탄의 어느 마을들인데 채도 높은 색상과 피부에 와닿는 온도 등으로 생생하게 묘사된다.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대목이 있다. 우리는 미대륙이나 유럽의 어느 곳을 끌어다놓는 작품은 더러 봐왔다. 중국이나 일본도 이제 독자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낙후된 곳(「카펫」 「까롭까」 「톨큰」 「발치카 No. 9」)이나 눈사태와 크레바스의 위험을 안고 사는 고산지대(「라, La」) 혹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커피 재배지(「분나」)를 그린 소설은 드물다. 이은선의 소설들은 한국 소설이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해나가고 있다는 징후로 볼 수 있으며 나아가 그 성취에 있어서도 이 신예 작가의 기여는 의미 있게 평가될 것이다.
도무지 바깥으로 내질러지지 않는 구조요청
소설집 앞쪽에 연달아 배치된 「카펫」 「까롭까」 「톨큰」은 ‘수로(水路)’ 3부작에 해당하는데 부제가 말하듯 물이 작품의 중심핵을 이룬다. 우즈베키스탄 북쪽과 카자흐스탄 남쪽이 만나는 접경지대에 위치한 아랄 해는 한때 세계 4대 호수라 일컬어지는 내해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사람들이 면화 재배를 위해 아랄 해로 유입되는 강물들을 중간에서 끊어 관개용수로 사용하는 바람에 이 풍족한 바다는 현재 70% 이상 사라지고 말았다. 목화산업과 정치와 군의 결탁은 아랄 해를 둘러싼 생명들이 말살되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방치했다. 물이 사라진 땅은 메마르고 염도마저 높아 작물이 자라지 않고 인근 주민들은 물 부족과 빈혈, 폐질환, 갑상선 질환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카펫」의 어린 화자 ‘슈흐랏’이나 ‘샤흐노자’는 얼굴이 붓고 눈이 튀어나오는 병에 걸려 있는데 이는 갑상선항진증의 증상이며 ‘바세도우씨 병’이라고도 한다. 「까롭까」의 대령은 한 지역의 독재자인데 이곳의 재화와 노동력, 그리고 젊은 여자들은 모두 대령의 소유다. 「톨큰」은 이제 막 관개 사업이 시작되려는 마을에서 군인과 주민들이 대치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독자는 이 세 편을 통해 한 세계가 폐허로 변해가는 과정을 역순으로 읽게 되는데, 완벽하게 황폐해질 때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바깥으로 내질러지지 못한 구조요청들을 곳곳에서 확인하며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 경험을 할 것이다.
가능성을 빼앗기는 순간 견고해지는 일상의 방어막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해설 「제사장이 없는 세계의 신화」에서 이은선의 소설들의 결말을 읽는 일은 ‘가혹’하다고 했다. 이은선은 인물들을 비극으로 몰아가면서 단춧구멍만 한 출구도 마련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수로 연작이 그렇거니와 코리아드림을 기대하며 한국어를 배우는 이방의 학생들(「발치카 No. 9」)은 떠나지 못하거나 요행이 떠났다가 훼손된 채 돌아오고, 수몰된 고향을 찾아간 아버지와 아들(「판타롱 아일랜드」)은 참극의 실제적인 기억만 꾸역꾸역 되살릴 뿐이다. 비교적 경쾌한 리듬을 타고 출렁이는 「살사댄서의 냉풍욕」마저 마찬가지다. 마을 청년 ‘두용’과 이주 결혼 여성인 ‘흐엉’이 각자의 아픔을 딛고 결합하기 때문에 조금 다른 결을 보이는 듯싶긴 하다. 그러나 흐엉을 사이에 두고 두용과 대결을 벌인 살사댄서 ‘지루박’의 입장에서는 성 불구의 핸디캡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고 특별한 악인이 아님에도 아무것도 인정받지 못하며 늘 은근히 소외된다. 결말에서 그는 오로지 춤이라며 새로이 스탭만 밟을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분나」의 모녀도 모든 것을 잃고 살해까지 저지르는데 마지막에는 평소처럼 분나(커피를 일컫는 에티오피아 어)를 끓인다. 김형중의 해설은 이 장면을 통해 이은선 소설의 유용한 독법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세상은 이제 그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만큼 남자와 불과 쇠의 기운으로 가득 차버렸지만, 그들이 집 주위로 둘러쳐놓은 깊고 진한 원한의 방어막 또한 독하고 강력해서, 거기가 바로 ‘현대의 비극’을 피해 신화적 원소들이 최후로 택한 마지막 보루는 아닌가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끓이는 분나의 향이 바로 그 원소들이 아직 실존함을 증거하는 알리바이다. (p. 345)
카펫
까롭까
톨큰
발치카 No. 9
살사댄서의 냉풍욕
붉은 코끼리
분나
라, La
이화
판타롱 아일랜드
해설| 제사장이 없는 세계의 신화_김형중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