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저트 월드에 도착했습니다”
시공간을 반죽해 환상을 빚어 만든
맛있고 무서운 디저트 월드 탐방기
경계에서
“모처럼 만나는 역작”(이외수), “앞으로 이 작가의 소설을 쫓아다니며 찾아서 읽게 될 것 같다”(성석제)라는 평을 들으며 꾸준히 밀도 있는 소설을 써온 김이환의 열한번째 장편소설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04년 『에비터젠의 유령』을 출간하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이래 김이환은 한국 환상문학의 주요한 지점이 된 『양말 줍는 소년』, 2009년 제1회 멀티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절망의 구』, 김성수 등 여섯 명의 영화감독과 함께 작업한 『동네전쟁』 등을 펴내며 장르의 한계를 넘어 ‘이야기’로서의 소설에 주목해왔다.
배경이 어디고 등장인물이 누구든, 그의 소설에서는 늘 현실과 환상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다. 무엇이고 어디이며 누구에 대한 이야기라고 딱 짚어 말할 수 없어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에서 새롭고도 모호한 소설적 시공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디저트 월드』는 2013년 가을부터 2014년 초겨울까지 두 계절에 걸쳐 문학과지성사 블로그에 연재되었던 작품을 묶어낸 연작 장편소설이다. ‘몽블랑, 당근케이크, 마카롱, 자허토르테, 오렌지쿠키, 레드벨벳컵케이크, 라즈베리타르트’라 이름 붙은 일곱 편의 달콤하고 싸한 이야기들에서 그동안 김이환이 구축해온 흥미로운 상상력, 이야기의 본령에 대한 재능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디저트 월드의 미스터 L, 이상한 나라의 토끼남자
어느 날, 주인공 미스터 L에게 ‘검은 구멍’이 보이기 시작한다. 병원에 가보았지만 손쓸 수 없다. 점점 커져가는 검은 구멍 탓에 그는 생각도 기억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자신의 이름조차 떠올리기 어려워질 무렵, 검은 구멍에서 검은색 정장을 입고 토끼 가면을 쓴 남자 하나가 튀어나온다. 토끼남자는 디저트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면 L의 수명을 연장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때부터 L은 토끼 가면이 눈에 띄지 않는 매년 할로윈에 ‘높은 곳’에서 이곳 ‘디저트 월드’로 내려온 토끼남자에게 맛있는 디저트를 대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디저트와 이야기에 만족한 토끼남자의 “내년 할로윈까지 건강히” 지내라는 안부 인사를 듣고 나서야 L은 나머지 364일을 ‘살아 있는’ 상태로 버틸 수 있다. 일곱 개의 디저트, 최소 7년, 짐작하기론 그 이상의 기간 동안 디저트를 바쳐야 했던 L은 문득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단 생각에 결단을 내린다.
알쏭달쏭하다. 김이환의 표현을 빌리자면 『디저트 월드』는 “접혀 있는” 소설이다. 접혀 있다는 건 “설명되지 않는 부분, 설명할 수 없는 부분, 설명하려고 하면 오히려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태반이란 소리다. 이야기에 끌려들어가 소설을 읽다가도, 현실과 환상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섞여 있기 때문에 “펼치고, 접었다가, 튀어나온 부분이 따로 펼쳐”진다. “거꾸로 뒤집히고 쏟아져 나오는 듯하다”가 혼란을 거듭하고, 그러다 “중심이 보인다. 재정렬된다.”
“접는다는 것이 뭡니까?”
라고 물은 순간, 그는 접는다는 표현을 이해했다. 그의 삶은 펼쳐져 있고 끝나간다. 펼쳐져 있으므로 끝이 있다. 끝이 오면 끝이다. 하지만 접는 순간 끝이 사라진다.
―「당근케이크」 부분
“시간도 접혀 있어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있죠. 앞으로 일어날 일이 과거에 먼저 일어날 때도 있어요. 보통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 미래에 영향을 주지만 높은 곳에서는 그 반대도 가능해요. 그리고 그것들이 한꺼번에 보이기도 해요.”
―「마카롱」 부분
접었다 폈다, 은유들
『디저트 월드』는 은유로 가득 차 있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수수께끼를 나름껏 해독하며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넘어 그 이상을 볼 수 있게 된다. 김이환 특유의 현실과 허구, 실재와 소설의 모호한 경계가 돋보이는 것도 이 지점에서다. 이 소설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펼치다’ ‘접다’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책’을 연상해볼 수 있다. ‘디저트 월드’를 『디저트 월드』라는 한 권의 책 속 세계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디저트 월드’라는 세계 안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토끼남자가 ‘접었다 펼’ 때마다 L은 큰 영향을 받는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책을, 자신의 삶을 접거나 덮게 하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내준다. 새로 이사 간 집이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라든지, 난파되었을 때 바다거북수프인 줄 알고 먹었던 것이 알고 보니 사람고기수프였다는 등, 소설 속에서 L이 토끼남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도시 괴담’류에 속한다. 어디서 들어봤음직한, 주로 일본이나 우리나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작해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 내려온 이런 이야기의 공통점은 귀신이나 피 칠갑 없이도 뒤돌아 곱씹었을 때 소름이 돋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중 하나는 실제로 제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리고 L이 그렇게 말하고 난 다음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저 도시 괴담인지 실제로 L에게 일어난 일을 적어둔 것인지 L과 우리 모두 혼란스러워진다.
“사람들은 말이야, 나를 만나면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고 자기들 멋대로 결론 내려. 환상이나 착각 같은 걸로 알아.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지. 토끼 탈을 쓴 남자를 만났을 리가 없다고 믿어버려. 우리와 헤어지면 우리를 잊어버리려 애쓰다 결국 잊고 말지. 자신을 다시 찾아올 일은 없으리라 믿지. 다른 운 나쁜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어. 하지만 그건 잘못이야. 나는 분명히 존재해.”
―「레드벨벳컵케이크」 부분
한편 시공간을 섞고 확장하여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떠올리게 되는 작품이 있다. 구멍에서 튀어나온 회중시계를 찬 토끼에 이끌려 ‘이상한 나라’에 가게 된 주인공이 그곳의 기이한 존재들과 티 타임을 갖는다든지 카드병정들에게 둘러싸이고 왕과 여왕을 만나는 모험에 휩쓸리게 된다는 이야기의 기본 설정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참고한 듯 보인다. 미스터 L이 운영하는 컵케이크 가게 이름이 ‘스나크’라거나 찰스 도지슨(루이스 캐럴의 본명)의 일화를 대화에 넣는 등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영향을 받았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디저트’라는 요소를 주로 두고 비틀어 재해석한 김이환식 오마주로 읽을 수도 있겠다.
그는 무릎 위쯤 높이의 허공에 떠 있는 검은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었고,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뺀 다음 발부터 들이밀었다. 한동안 발을 휘젓자 발이 디뎌지는 곳이 있었다. 그곳으로 내려갈 때 뒤에서 고양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나크.”
―「오렌지쿠키」 부분
기이하게 재미있고 발랄한 듯 차분한 이번 소설에서 재미와 발랄함을 담당하는 것이 디저트들이다. 일곱 가지 디저트의 레서피나 맛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두드러지는데, 식감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김이환은 직접 홍대와 상수, 삼청동 등 서울 각지의 디저트 카페를 다니며 작품에 등장하는 각종 디저트들을 직접 먹어보고, 레서피를 물었다. 그래서 더욱 생생한 식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토끼’를 주요 캐릭터로 작업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이지은의 일러스트를 곳곳에 삽입하여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를 살렸다. 식감과 색감이 더하는 활기가, 작가의 의도대로 『디저트 월드』를 “부담 없고 재미있는, 그리고 이색적인 글”로 만들고 있다.
토끼남자는 자허토르테의 맛을 음미하고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당연히 마음에 들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다. 자허토르테는 근사하다. 겉을 코팅한 다크초콜릿을 자르면 초콜릿이 들어간 스펀지케이크와 그 사이의 살구잼이 드러난다. 모두 매력적인 검은색이다. 한 입 넣으면 의외로 묵직한 초콜릿의 맛과 스펀지의 거친 식감 그리고 초콜릿의 단맛에 풍미를 더하는 살구잼의 새콤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이것들은 입안에서 그대로 접힌다.
―「자허토르테」 부분
작품 속으로
토끼남자는 머리에 토끼 가면을 쓰고 있다.
촘촘하게 심긴 흰 털과 크고 긴 귀가 인상적인 가면이다. 반지르르한 검은 코는 귀엽고 빨간 눈동자는 가까이에서 보면 무섭다. 가면은 머리 전체를 덮는다. 토끼 가면 밑으로는 검은색 정장과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매고, 검은 구두를 신었다. 검은 구두는 광택은 없지만 먼지가 묻어 있던 적도 없다.
―「몽블랑」 부분
“생선어두운가시고양이를 꼭 찾고 싶습니다. 미스터 L을 만나서 디저트 월드를 돌아다니는 이유도 생선어두운가시고양이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분명히 생선어두운가시고양이가 있을 겁니다…… 디저트 월드에는 분명히…… 그곳에는…… 생선…… 어두운…… 가시…… 고양이……”
토끼남자의 중얼거림을 듣고 안경토끼가 웃었다. 토끼남자는 후추 통을 들어 테이블 밑으로 후추를 뿌렸고, 안경토끼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재채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렌지쿠키」 부분
그는 몽블랑을 만든 적 있다. 당근케이크도 만든 적 있다. 마카롱, 오렌지쿠키, 자허토르테, 컵케이크를 만든 적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디저트, 아메리칸쿠키, 스트로베리케이크, 애플파이, 다크포레스트, 푸딩, 티라미수, 브라우니, 치즈케이크, 마들렌, 오페라, 사과타르트를 만든 적 있다.
[……]
그는 테이블 위에서 잠들어 있는 그 자신의 얼굴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과거일까 미래일까, 그가 겪지 않은 일이니 미래일까, 이건 그냥 꿈이 아닐까, 소파에 앉아 잠이 들었을 뿐일까, 꿈일지라도 왜 하필 테이블 위에서 자고 있는가, 꿈이기 때문일까, 그는 생각했다.
―「라즈베리타르트」 부분
작가의 말
글을 쓰는 동안 카페를 돌아다니며 많은 디저트를 먹었습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이 글 역시 디저트를 먹듯이 부담 없고 재미있는, 그리고 이색적인 글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디저트 월드』가 독자 여러분에게 즐거운 경험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당근케이크」 「마카롱」 「레드벨벳컵케이크」 「라즈베리타르트」에 나오는 무서운 이야기는 도시 괴담을 각색했습니다. 오렌지쿠키 레서피를 알려주신 상수동 카페의 홍수영 사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글에 많은 조언을 해주신 이서영 님, 라키난 님, dcdc 님, 정세랑 님, 배명훈 님, 이원우 님, 이두나 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문학과지성사 관계자 여러분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몽블랑
당근케이크
마카롱
자허토르테
오렌지쿠키
레드벨벳컵케이크
라즈베리타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