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거장 ‘미셸 투르니에’를 있게 한 문제적 작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로빈슨 크루소를 만나다”
태평양의 외딴섬에 표류한 서구 사회의 문명인 ‘로빈슨 크루소’와 자연과 동화되어 의무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분방한 삶을 즐기는 야만인 ‘방드르디.’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지성이자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야생의 삶』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비판적 시각으로 다시 써내려간 이 책은, 로빈슨 크루소 신화의 단순한 변주가 아닌 문명과 야만, 인간의 뿌리 깊은 관습, 진정한 자유로움에 관한 실존적 물음을 제기하는, 그 자체로 매혹적인 한 편의 소설로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성인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민음사)이 출간되었고, 『방드르디, 야생의 삶』은 투르니에가 ‘청소년’을 위해 다시 쓴 작품으로 2000년대 초반 한국에 소개된 바 있다. 이번에 문지에서 출간된 『방드르디, 야생의 삶』은 충북대 고봉만 교수의 꼼꼼하고 정확한 번역에 더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 충실한 해설, 아름다운 도판이 어우러져 한층 더 완성도 높은 책으로 재탄생했다.
“『방드르디, 야생의 삶』은 군더더기를 빼고 이해하기 쉽게 완전히 다시 쓴 책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책을 아이들을 위한 버전으로 간주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책은 단지 개정판일 뿐이다. 프랑스에서만 육백만 부가 팔리고 35개 국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나의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문명과 야만, 그 이분법적 경계를 허무는 원시적 상상력의 힘
지금껏 세계적으로 출간된 로빈슨 크루소 관련 작품은 700여 종으로, 성서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출판 및 번역되었다. 그 가운데 주제 면에서 가장 큰 혁신과 변화를 만들어낸 작품은 단연코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야생의 삶』으로, 이 책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이야기의 전개나 내용 측면에서 가장 닮은 작품이면서 주제나 세부적인 에피소드 측면에서 보면 가장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선 제목의 ‘방드르디’는 ‘금요일’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잘 알려졌다시피 디포의 작품에 나오는 ‘프라이데이’와 유사 인물. 그러나 투르니에는 이 책에서 ‘방드르디’를 ‘프라이데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묘사한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읽으면 프라이데이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을 알 것이다. 로빈슨이 하는 말은 모두 진리다. 프라이데이는 이를 그대로 따르기만 한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이와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소설을 썼다. 초반에는 원작과 비슷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로빈슨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표류한 태평양의 한 외딴섬은 그가 살던 런던과는 다른 곳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의 전개는 크게 ‘방드르디 이전의 세계’와 ‘방드르디 이후의 세계’로 구분할 수 있다. 방드르디와 만나기 전까지 로빈슨의 삶은 타인이 부재한 절대 고독 속에 있었다. 그는 아무도 살지 않는 섬에서 법을 만들고 시간을 기록하며 규칙적인 삶을 살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법을 적용할 사람이 없고 해가 뜨고 지는 자연의 시간 말고는 시간 구분이 필요 없는 외딴섬에서 문명 세계에서와 같은 시간에 따라 생활하는 것은 모두 무의미한 행동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원시 자연 속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자신이 떠나온 문명 세계와 이어진 끈을 놓지 못하고, 여전히 그곳의 시간과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방드르디 이후의 세계에서 가장 큰 변화는 타인이 부재한 가운데 이루어진 로빈슨의 불완전한 통치와 고독의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줄 타인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방드르디를 동료가 아닌 노예이자 지배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로빈슨은 자기 뜻대로 움직여줄 방드르디가 섬에 도착함으로써 섬을 지배하고 완전한 통치자가 되기를 기대했지만, 그의 의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난다. 섬의 통치와 그 정당성이 의심받던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 바로 동굴의 폭발이다. 투르니에는 ‘동굴의 폭발’이라는 에피소드를 만들어냄으로써 이전의 『로빈슨 크루소』와 완전히 작별을 고한다. 동굴의 폭발은 로빈슨이 섬에서 이룬 문명의 흔적을 모두 날려버리고,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관계마저 변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자연인으로 남을 것인가, 문명인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이렇듯 『방드르디, 야생의 삶』은 문명인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야만인 방드르디를 전면에 내세운다.
“사람들이 나에게 ‘당신의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어요’라고 말하면 화가 난다. 나는 로빈슨 크루소를 쓴 것이 아니라 프라이데이(방드르디)를 쓴 것이다.”
동굴의 폭발 이후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이를 통해 주인과 노예가 아닌 친구 사이로 발전하는 두 사람. 오히려 로빈슨이 방드르디에게 야생의 삶을 배우게 된다. 로빈슨이 섬에 만들어놓은 문명 세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으로 돌아갔으며, 계획된 노동과 일은 놀이와 유희로 바뀌었다. 투르니에는 방드르디를 노예가 아닌 로빈슨과 동등한 관계로 끌어올리며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판이한, 새로운 관점에서 쓴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로빈슨 크루소’ 뒤집어 보기, ‘로빈슨 크루소’ 신화의 현대적인 재해석…… 『방드르디, 야생의 삶』을 지칭하는 전형적인 한 줄 평이다.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인간의 자연 지배, 이성과 합리성의 승리, 식민 지배의 합리화 등 계몽주의적 이념의 정당화 도구로 해석된다면, 투르니에의 이 책은 인간의 뿌리 깊은 관습과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의문을 바탕에 깔고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며 원시적 상상력의 힘을 가감 없이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이를 통해 단순히 로빈슨 크루소 신화의 변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로빈슨 크루소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이 작품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문명과 자연, 인간의 고립과 고독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기보다는 독자들에게 수많은 물음을 제기하는, 철학적 성찰로 가득한 책이라는 데 있다. ‘로빈슨이 섬에서 얻은 깨달음은 현실에서도 실천이 가능한가?’ ‘만약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등등 이러한 물음에 대해 저마다의 대답을 고민해본다면, 이 책을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책 속으로
의식을 되찾았을 때 로빈슨은 얼굴을 모래에 파묻은 채 축 늘어져 엎드려 있었다. 한줄기 파도가 밀려와 그의 두 발을 핥았다. 그는 몸을 돌려 누웠다. 검고 흰 갈매기들이 폭풍이 지나고 다시금 파래진 하늘을 빙빙 돌며 날고 있었다. 로빈슨이 일어나 앉으려고 힘을 쓰자 이내 왼쪽 어깨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해변에는 파도가 던져놓고 간 죽은 물고기와 깨진 조개, 검은 해초 더미가 잔뜩 널려 있었다. 서쪽으로는 바위 절벽이 바다 쪽으로 뻗어 나가다가 암초들과 이어져 있었다. 바로 거기에 돛대가 부서지고 바람에 밧줄이 흔들리는 ‘버지니아호’의 형체가 보였다. (13쪽)
로빈슨은 마침내 진흙탕 속에서의 목욕과 게으른 생활이 그를 점점 미치광이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상의 산물인 그 범선은 하나의 심각한 경고였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을 해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섬에 닿은 이래로 줄곧 마음을 사로잡아 들뜨게 하면서도 한편으로 그에게 고통을 안겨준 바다에 등을 돌린 채 숲과 바윗돌 더미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34쪽)
그는 미소를 지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미소 짓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눈가에 주름을 잡고 입의 양쪽 가장자리를 들어 올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헛일이었다. 불가능했다. 그는 미소 짓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는 지금 침울한 표정 속에 굳어서 뻣뻣해진 얼굴, 나무로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혼자였기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미소를 지을 상대가 없어서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웃어보려 했지만 근육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계속 딱딱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슬퍼 가슴이 조이듯 아팠다. 그는 이 섬에서 마실 것, 먹을 것, 잠자기 위한 집과 침대 등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지만 미소를 지어 보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얼음처럼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58~59쪽)
로빈슨은 인디언을 뭐라고 부를지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는 인디언이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이므로 기독교의 세례명을 붙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로빈슨은 인디언을 처음 만났던 요일의 이름을 붙여주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섬의 두번째 주민은 ‘방드르디’라 불리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나자, 방드르디는 주인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영어를 충분히 익혔다. 그는 땅을 개간하고 밭을 갈며 씨를 뿌리는 방법을 배웠다. 또한 쇠스랑으로 땅을 고르고 모종을 내고 김을 매고 곡식을 거두고 타작을 하고 곡식을 빻고 반죽을 하고 빵을 굽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염소의 젖을 짜서 치즈를 만들고, 거북 알을 주워서 오믈렛을 만들며, 로빈슨의 옷을 깁고 구두를 닦는 법도 배웠다. 그는 전형적인 하인이 된 것이다. (84~85쪽)
로빈슨은 삼나무의 검은 가지 사이에 걸려 있는 달을 바라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섬에서 이룩한 모든 것, 경작지, 가축의 사육, 건축물, 동굴에 비축해놓았던 곡식 들이 방드르디의 실수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는 방드르디를 원망하지 않았다. 사실 로빈슨도 오래전부터 이 지겹고 귀찮은 관리에 대해 진저리가 났지만 때려 부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둘 다 자유로워졌다. 로빈슨은 호기심을 가지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했다. 그는 이제부터 이 세계를 이끌어갈 사람은 방드르디라는 것을 깨달았다. (113쪽)
“뱀과 벌레를 먹는 방드르디를 소개하지” 하고 로빈슨은 그에게 모래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로빈슨은 개암나무 가지를 하나 꺾어서 잔가지와 잎사귀를 제거한 다음, 바로 그런 목적으로 만들었던 ‘모래 방드르디’의 등짝과 볼기짝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넷이서 그 섬에 살았다. 진짜 로빈슨과 대나무 인형, 진짜 방드르디와 모래상, 그들 두 친구는 상대에게 하고 싶은 모든 못된 짓―욕설, 때리기, 화내기―을 상대의 모습을 한 가짜 인형에다 대고 했다. 그들 두 사람 간에는 오직 친절한 행동만이 있었다. (126쪽)
어느 날 밤 방드르디가 찾아와서 그의 발을 잡아당겼다. 폭풍이 밀려왔고, 창백한 하늘에서 원반 같은 달이 조각난 구름 사이로 황급히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을 실편백나무 쪽으로 이끌고 갔다. 나무가 눈에 들어오기 훨씬 전에 로빈슨은 피리 소리와 바이올린 소리가 한데 섞인, 천상의 협주곡 소리가 들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이 노래하는 나무의 발치에 도달했을 때 바람은 아까보다 두 배나 더 거세어졌다.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짧게 매여 있던 연이 마치 북의 가죽처럼 때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가볍게 흔들리고, 때로는 미친 듯이 퍼덕거리면서 흔들리는 것이었다. 변화무쌍한 달빛 아래서 독수리 깃털의 두 날개는 돌풍이 부는 대로 열렸다 닫혔다 하고 있었다. 공중을 나는 앙도아르와 노래하는 앙도아르가 어둠의 향연 속에서 한 덩어리가 되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저 장중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어찌나 애절한지, 그것은 방드르디를 구하면서 죽은 위대한 숫염소의 탄식과도 같았다. (172~73쪽)
로빈슨은 감개무량하여 가슴이 막혔다. 그가 언제부터 이 섬에 살게 되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 느낌이었다. 흔히 사람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자신의 전 생애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한다. 로빈슨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배의 난파, ‘탈출호’의 건조와 실패, 비참한 진흙탕 생활, 섬을 개척하기 위한 동분서주, 방드르디의 출현, 자신이 그에게 강요했던 노동, 폭발 사건, 모든 작품의 파괴, 그리고 방드르디의 놀라운 발명과 격렬하지만 건전한 놀이 덕분에 보낼 수 있었던 행복하고 감미로운 생활 등이 생각났다. 이 모든 것이 이제 끝나게 될 것인가? (177~78쪽)
방드르디, 야생의 삶
작품 해설 로빈슨 신화를 찾아서: 무인도와 난파자에 관한 이야기
신선한 반전
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문명적인 로빈슨의 삶에 회의감이 느껴진다면
지금 사는 삶이 복잡하기만 하다고 생각된다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어렵다면
틈날때 책을 읽어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