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젊은이들의 삶과
시대의 얼룩, 그리고 상처에 대한 이야기
<이청준 전집> 9권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문학과지성사, 2014)은 이청준의 네번째 장편소설이다. 주인공 화자 나(=이준)의 열흘간의 사유와 행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현재를 중심으로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야기로, ‘나’의 글쓰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스스로의 예측은 물론이요, 독자를 향한 예고의 성격을 띈다.한편, 작가가 1968년 여름에 탈고하여 처음 발표했던 이 소설의 당시 원제는 ‘선고유예(宣告猶豫)’다. 장편 『선고유예』는 1969년 3월 『문화비평』 창간호에 1회가 실리고 곧바로 연재가 중단된다. 잡지사의 사정으로 1년 후인 1970년 3월에 연재가 재개되지만 이내 다시 중단되었다가, 이후 1972년에 나온 『소문의 벽』(민음사)에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으로 개제되어 처음으로 전작이 수록되었다.
“소설을 계속한다면 당신에 대한 새로운 선고는 필요한 시기까지 미루어진 것입니다. 각하께서 심증을 얻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진 내가 당신 앞에 나타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나타나지 않는 동안, 그것은 언제까지나 당신에 대한 선고유예 상태가 계속되는 있는 상황이란 것을 말입니다.”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p.289)
평소 ‘작가의 말’에 해당하는 후기를 쓰기 싫어했던 이청준은 이 작품의 첫 단행본(1972)에 한 번, 그리고 1985년 중앙일보사에서 간행된 『쓰여지지 않은 自敍傳』을 거쳐, 다시 1994년 도서출판 장락에서 간행된 단행본에 「작가의 말」을 하나 더 보태는 이채로운 행보를 띤다. 작품 전체에 걸친 대폭 수정을 거쳐 출간된 2001년 열림원 판에는 1985년 중앙일보사 판의 「작가의 말」이 「그해 가을」이란 제목으로 바뀐 채 아예 본문에 편입되어 실렸다.
“그러니까 그 후기라는 것은 이를테면 작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아 씌어지는 또 하나의 픽션으로서, 자기 작품과 작가 자신을 소재로 한 제2의 픽션화 작업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는 그 작가 자신이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그의 본문 작품들에서 행해진 바보다도 더 한층 조심스럽고 교묘하고 그리고 완벽한 픽션화가 행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청준 수필, 「後記의 反省」에서
소설, 가장 성실한 자기진술의 형식
― 이 작품은 자서전이 아니다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은 제목 자체에 ‘자서전’이란 단어를 쓰고 있지만 1인칭 화자(나=이준)가 등장하는 것 외에, 그 서술 방식과 서술된 내용에 있어 일반적인 자서전의 전기적 서술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 소설의 일부분이 유년의 ‘허기’와 ‘전짓불’, 그리고 ‘홀어머니와의 생활’ 등 작가 자신의 실제 유년기의 체험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기억에서 시작하여 화자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전개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나의 생애를 진술하는 부분마저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넘어 세대 문제와 같은 추상적 · 관념적 성격으로 전개되면서 타인과 사회의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인 ‘왕’에 대한 나의 관찰과 분석, 시인 윤일과 여자 친구 정은숙이 겪는 각박한 삶에 대한 진술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여기서 ‘왕’은 이름은 물론 그에 대한 어떤 것도 알 수 없는 유령처럼 모호한 인물이다. 이런 왕이 이준과 단식, 허기, 광기를 공유한다. 다시 말해 왕은 나=이준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처럼 화자인 ‘나(=이준)’가 자서전을 소설로 쓰는 것은 이전에 이청준이 발표한 작품들 가운데 단편 「병신과 머저리」의 형, 역시 단편 「행복원의 예수」의 ‘나’의 경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죽었다던 왕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다방 세느의 마담의 후일담(추측―미래)을 거치며 이 작품은 자서전(과거의 진술과 현재의 기록)이 아닌 소설(허구―열린 이야기)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세느의 동네는 모든 것이 여전히 쑥스러웠다”
― 개인의 삶을 꿰뚫는 정신적 · 사회적 상흔
이 소설은 크게 세 줄기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신문관 사내와 ‘나’와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이야기(진술―과거)가 첫번째를 이루고, 『사상계』사와 『새여성』사에서 겪는 ‘나’의 직장생활이 두번째 축을 이룬다. 열흘간 다방 세느에 드나들면서 만난 ‘왕’이란 인물과 시인 윤일, 그리고 윤일의 애인 정은숙에 대한 이야기(기록―현재)가 나머지 줄기를 이룬다. 세 이야기의 핵심 인물인 ‘나’ ‘갈태’ ‘왕’ ‘윤일’ ‘정은숙’은 모두 동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며 하나같이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며 진행되는 왕의 단식, 사랑을 방해하는 무서운 가난과 정은숙의 자살, 신문관 사내로 상징되는 타인/사회의 억압과 시선에 갇혀 진술을 거듭하는 나의 모습 등, 모두 타인과 세계로부터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자술서를 강요하는 심문관의 존재는 이청준의 이후 작품, 특히 『제3의 현장』 「그림자」 등에서 반복된다. 여기서 신문관(혹은 심문관)의 역할을 검사와 형사가 맡는다.]
소설의 원형, 원형의 소설
―『소문의 벽』 『조율사』에서 『비화밀교』 『당신들의 천국』까지
씌어진 당시의 시점에서 이청준 소설의 현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있는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은 이청준이 이후에 쓸 소설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소설의 원형’이며, 그가 이후에 쓸 거의 모든 소설이 이 소설을 발원지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원형의 소설’이다. 이청준의 소설은 이 소설을 모태로 삼으면서 여기에서 파생된 여러 작품이 유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발전적 확대를 거듭하고 있다. 이청준의 소설을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에서부터 시작하여 주의 깊게 읽은 사람들은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이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란 자기 질문에 대한 가장 성실한 진술이란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까닭이다. (홍정선 문학평론가)
■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소개
인간의 진실과 운명을 향한 도저한 사유, 그 쉼 없는 열정
소설가 이청준이 일궈놓은 40년 문학의 총체 <이청준 전집>
지난 2008년 7월에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 선생의 문학을 보전하고 재조명하고자 문학과지성사는 새로운 구성과 장정으로 <이청준 전집>을 발간해오고 있다. 『당신들의 천국』 『서편제』 『눈길』 등 우리 시대의 한(恨)과 아픔을 사랑과 화해로 승화시키는 데 평생을 바쳐 고뇌한 작가 이청준. 그는 소설가로서 투철한 작가 의식, 지성인으로서 인격, 생활인으로서 겸손함, 남을 위한 배려 정신과 자신에 대한 엄격성 등 삶의 여러 본보기들을 소리 없이 실천하며 우리 곁에 머물다 간, 명실공히 한국 소설 문학사의 큰 표징이다.
말과 말의 질서를 통해 삶을 사랑하기를 문학의 궁극적 행위이자 가치로 놓았던 이청준의 작품 세계는 권력과 인간의 갈등, 집단과 개인의 불화, 언어와 사회의 길항 등 거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부터 고난을 견디는 장소로서의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과 그 밑바닥의 가장 복잡한 심사들의 뒤엉킴이라는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구조에까지 멀리 그리고 깊게 닿아 인간의 한 생을 파노라마로 엮는다. 다시 말해, 『당신들의 천국』이 완성한 지성의 정치학으로부터 『서편제』가 풀어낸 토속적 정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청준 문학이 뻗어 있는 영역은 우리 삶의 전방위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2009년 7월에 발족한 <이청준추모사업회>와 문학과지성사가 정본으로서의 새로운 『이청준 전집』 간행에 한뜻을 모으고, 이청준 문학을 연구하는 문학평론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청준 전집 기획위원회>를 통해 이후 수차례의 논의와 협의를 거쳐 이청준 전 작품과 서지 자료 정리 및 전집 기본 구성안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2008년부터 시작된 기획위원회의 정기회의를 통해 1) (발간과 미발간 작품 모두를 포함한) 이청준 작품 목록 정리, 2) 이청준 연보 정리, 3) 각 작품 연재 지면과 발행 출판사, 작품 분량에 대한 일차적인 세부 목록 조사와 정리가 이뤄졌고, 더불어 각권의 표지 그림과 제자는 생전의 이청준 선생의 절친이자 고향 후배인 김선두 화백이 맡았다. 역시 오랫동안 이청준 문학에 밀착하여 정밀하고도 성실한 비평적 노력을 기울여온 문학평론가 이윤옥 씨가 각 개별 작품들의 텍스트의 변모와 상호 관계를 밝히는 상세한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해주고 있다. 이 주해는 이청준 작품 세계의 소재적, 주제적, 문체적 측면의 특장과 주요 변모를 연대기적 흐름과 출판사, 판면의 변화와 함께 보여줌으로써 이청준 문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더없이 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 더불어 원전과 사료를 두루 살펴 작품의 상세한 역사와 의의를 드러내는 이 작업은 우리 문학 전집 간행사에서 한 뚜렷한 전범이 될 것이다. 『이청준 전집』은 총 서른네 권의 규모로 독자 여러분을 찾는다.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7
제1일 15
제2일 51
제3일 113
제4일 143
제5일 162
제6일 196
제7일 207
제8일 231
제9일 260
제10일 284
그해 가을 303
해설 소설의 원형, 원형의 소설/홍정선 305
자료 텍스트의 변모와 상호 관계/이윤옥 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