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갔다네,
터진 주머니에 주먹을 쑤셔 넣고서……”
불멸(不滅)의 시,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고뇌의 노래
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 랭보의 불꽃같은 시혼(詩魂)을 만난다
베를렌의 연인, 십대부터 벼락같이 시를 쏟아낸 천재 시인, 시대와 사회에 반기를 들었던 반항의 시인, 돌연 시를 버리고 아프리카로 떠났다가 일찍 생을 마감한 비운의 시인……
기구한 삶과 함께 ‘위대한 시인’이라는 명성으로 널리 회자되는 아르튀르 랭보.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의 산문시집에만 치중했을 뿐, 그의 사상이 발아되는 초기 운문시를 비롯한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조망할 기회는 드물었다. 이번에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나의 방랑-랭보 시집』(대산문학총서 123)은, 랭보의 초기 시부터 자유 운문시까지 총망라한 랭보의 운문시 전집이다.
소년 랭보가 시인 랭보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천재 시인의 미래를 예견하는 이 책은, 현존하는 다수의 판본을 오랜 시간 비교 연구하며 섬세히 번역하고, 각 시편에 대해 상세하게 주석을 달아 랭보의 참모습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기에 손색이 없다.
보들레르 이후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작가로 평가받는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토해내듯 시를 쏟아낸 1870년부터 1872년 사이의 운문시를 모은 이 책은 랭보가 시대적 혹은 개인적 문제들 속에서 어떤 의식의 변화를 겪고, 어떻게 작품으로 드러냈는지 보여주어, 랭보 시의 태동과 이후의 급격한 진화 과정, 치열했던 그의 삶까지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시편들에서 랭보는 앞으로 펼칠 작품 세계와 통렬한 자기 인식의 세계를 예고하고 있으며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불꽃같은 저항, 통렬한 자기 인식
제1부 운문시(1870~1871)
이 책의 1부에는, 1870년 1월 2일 『만인을 위한 잡지』에 발표한 랭보의 첫 작품 「고아들의 새해 선물」부터, 베를렌의 부름을 받고 파리로 가서 파리의 예술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지은 야심작이자, 상징주의 시와 현대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받는 「취한 배」에 이르기까지 총 44편이 담겨 있다. 랭보는 1년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놀라운 시적 진보를 이뤄내는데, 한 어린 시인이 자신이 대면한 시대적 ‧ 개인적 문제들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고 그것이 어떻게 작품에 드러나는지 이 초기 시편들을 통해 목격하게 된다.
랭보는 시적 진화가 매우 급격했던 시인이다. 랭보의 뛰어난 감성과 지성은 다른 상징주의의 대표자인 보들레르나 폴 발레리와는 달리 완충장치 없이 격렬히 맞부딪히며, 이러한 충돌의 산출물이 랭보 시문학의 본질을 구성하게 된다. 초기의 시편들은 반교권주의가 시의 중심 테마였으나, 보불전쟁이나 파리코뮌을 거치면서 그의 날카롭고 신랄한 어휘는 부르주아 혹은 제국주의의 지배자들을 향한 사회 ‧ 정치 비판으로 옮겨갔다. 1870년의 작품은 이데올로기적 투쟁이라기보다는 사회 지배 세력에 대한 어린 시인의 감성적 항거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으나, 파리코뮌과 코뮌의 처참한 몰락 이후에는 사회를 집단적 진보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시의 사회적 책무와 ‘투시자voyant’로서의 시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처형당한 가슴」이나 「취한 배」와 같은 운명적 시편들의 시적 영감은 대개 파리코뮌에서 온 것이며, 정치 풍자를 바탕으로 한 「파리 전가」에서는 사회 및 정치에 대한 언어의 역할을 웅변하고 있다. 또한 「파리의 향연」과 같은 시편에서는 역사적 중대한 사건을 통해 부르주아와 민중,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사회적 간극이 극대화되면서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카니발적 파괴를 맞이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시인 개인의 운명이 사회와 연결되고 결국 시인과 사회의 시학적 관계를 규정하는 과정이 이 시기의 시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정점에 오른 시적 문체, 현대시의 탄생을 예고하는
제2부 자유 운문시(1872)
1871년 후반부부터 1872년 초까지 베를렌을 비롯한 파리의 예술가들에게 의지하며 생활했던 랭보는, 베를렌의 가정을 파탄냈다는 세간의 비난을 받으며 샤를빌로 돌아갔다 파리로 상경하여 시 작업에 몰두한다. 이때 창조된 것들이 흔히 ‘자유 운문시’라 부르는 시편들인데, 이 시기의 작품 16편이 제2부를 구성한다. 이 시 작법은 정형시에 대한 파격으로 “언어의 연금술”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이전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종교 ‧ 정치 ‧ 사회에 대한 시적 소명은 개인의 존재에 대한 성찰로 승화되어, 이 시기의 작품들은 시인 자신의 시학을 담은 내면성의 시어들로 이뤄진다.
시는 애당초 허구이다. 언어로 지시하는 순간, 시적 대상은 본질을 잃고 만다. 이 시기의 랭보 시들은 이렇듯 과거 혹은 미래의 시적 환상이 현실에 부딪치며 사라지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다다를 수 없는 것에 대한 회한을 담은 채 앞으로 다가올 산문시의 놀라운 시적 완성을 예고한다. 랭보는 과거에 대한 회한과 허무 속에서 소낙비처럼 다가올 삶의 전환을 기대했지만 그저 텍스트 내부에만 존재했던 시의 희망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력함을 깨닫는 이 치열한 과정, 현실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하지만 결국 도달할 수 없는 시의 패배의 과정, 그리하여 현대시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제2부에서 찬란하게 펼쳐진다.
마치 랭보가 살았던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상세하고 친절한 주석
이 책의 저본은 1972년도에 출간된 랭보 전집(Rimbaud, Œuvres complètes, édition d’Antoine Adam, Gallimard, 1972)이며, 보다 정확한 번역과 해설 및 주석을 위하여 여타 전집 판본 및 많은 연구서를 참조하였다. 옮긴이는 상세하고 방대한 양의 주석을 통해 랭보가 살았던 당시 프랑스로 독자들을 안내해 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랭보 시의 참모습은 물론 랭보의 인성과 삶의 아픔과 슬픔마저도 파악하게 한다.
랭보의 시 전체에는, 그의 언어뿐 아니라, 그의 삶이 담겨 있다. 초기 운문시에서부터 자유 운문시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랭보가 어떻게 사회와 세상에 맞섰고, 우주의 사물들은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했는지 차분히 보여준다. 랭보가 떠난 후에도 그가 남긴 문학은 불꽃같은 언어의 혼으로 다시 되살아나 불사조처럼 우리에게 날아오고 있다.
■ 본문 속으로
하늘이여! 사랑이여! 자유여! 그 무슨 꿈이던가, 오 가엾은 광녀여!
불 위의 눈송이처럼 너는 그에게 녹아들었구나.
너의 거대한 환영은 네 언어를 목 졸라 죽였도다.
-그리고 무서운 무한이 네 푸른 눈동자를 놀라게 하였도다!.
[……]
-그리하여 시인은 말한다, 밤이면 별빛 따라,
너는 네가 꺾어두었던 꽃들을 찾아 나선다고,
물 위에, 긴 베일 두르고 누운 채로, 한 송이 큰 백합처럼,
떠내려가는 하얀 오필리아를 제가 보았노라고.
-「오필리아| 중에서
-시민들이여! 시민들이여! 우리가 망루를 점령했을 때,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무너져 내리는 것은 어두운 과거였소!
우리는 가슴속에 사랑과 같은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었소.
우리는 우리의 가슴팍으로 우리의 아들들을 포옹했었소.
그리고 말처럼, 콧구멍으로 숨을 몰아쉬며,
우리는 나아갔소, 당당하고 굳세게, 두근두근거렸소……
우리는 태양을 향하여 전진했었소, 이마를 높이 들고― 이렇게 말이오,―
파리 안으로! 우리의 더러운 저고리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소.
결국! 우리는 스스로 인간임을 느꼈소! 우리는 창백한 얼굴이었소,
왕이여, 우리는 무서운 희망에 취해 있었소.
-「대장장이」 중에서
나는 갔다네, 터진 주머니에 주먹을 쑤셔 넣고서,
내 외투 또한 이상적으로 되었지.
하늘 밑을 걸었고, 뮤즈여! 나는 그대의 충복이었네.
아아! 내 얼마나 찬란한 사랑을 꿈꾸었던가!
내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
-꿈꾸는 엄지동자, 나는 내 길에서 낟알처럼
시의 운을 땄다네. 내 여인숙은 큰곰자리.
-내 별들은 하늘에서 부드럽게 살랑살랑대고
-「나의 방랑(환상곡)」 중에서
일곱 살에, 그는 소설을 지었다, 황홀한 자유가
빛나는 광막한 황야의 삶에 대해,
숲이여, 태양이여, 강기슭이여, 사바나여!
[……]
항성의 숲에 펼쳐진 육신의 꽃들로 그득한,
끊임없이 명상했던 그의 소설을 읽었다,
현기증이여, 붕괴여, 패주와 연민이여!
-저 아래 동네의 소음이 들려오는데 –
홀로, 날 삼베천 위에 누워,
강렬하게 돛폭을 예감하면서!
-「일곱 살의 시인들」 중에서
나는 안다, 번개로 갈라지는 하늘을, 회오리 물기둥과
되밀려오는 파도와 해류를. 나는 안다, 저녁을,
비둘기 떼처럼 솟구치는 새벽을, 그리고
나는 때때로 보았다, 인간이 본다고 믿었던 것을!
나는 보았다. 신비로운 공포로 얼룩진, 낮은 태양이,
까마득한 고대의 연극배우들을 닮은,
보랏빛 기다란 응고물들을 비추는 것을,
파도가 그들 빗살창의 떨림을 멀리 굴리고 있는 것을!
나는 꿈꾸었다, 바다의 눈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입맞춤,
눈부시게 눈 내리는 초록의 밤을,
전대미문의 정기(精氣)의 순환을,
노래하는 인광(燐光)들의 노란 그리고 푸른 깨어남을!
-「취한 배」 중에서
1부
고아들의 새해 선물
감각
태양과 육체
오필리아
교수형에 처해진 자들의 무도회
타르튀프의 징벌
대장장이
“92년과 93년의 전사자들이여……”
음악에 부쳐
물에서 태어나는 베누스
첫날밤
니나의 대꾸
놀란 아이들
소설
악(惡)
황제의 분노
겨울을 위하여 꿈을 꾸었고
골짜기에 잠든 자
초록 선술집에서―저녁 5시
짓궂은 여자
사르브뤼크의 빛나는 승리
장식장
나의 방랑(환상곡)
까마귀 떼
앉아 있는 자들
목신의 머리
세관원들
저녁 기도
파리 전가(戰歌)
나의 작은 연인들
웅크린 모습들
일곱 살의 시인들
교회의 빈민들
어릿광대의 가슴
파리의 향연 혹은 파리가 다시 북적댄다
잔마리의 손
자비의 누이들
모음들
“별은……”
“의인(義人)은……”
꽃에 대하여 시인에게 말해진 것
첫 성체배령
이 잡는 여인들
취한 배
2부
“내 마음이여……”
눈물
카시스의 강
갈증의 희극
아침의 좋은 생각
인내의 축제
(5월의 깃발들, 가장 높은 탑의 노래, 영원, 황금시대)
젊은 부부
브뤼셀
“그녀는 동방의 무희인가?……”
허기의 축제
“들어보라, 아카시아 숲 가까이……”
미셸과 크리스틴
수치
기억
“오 계절이여, 오 성(城)이여……”
“늑대는 나뭇잎 아래서……”
옮긴이 주
옮긴이 해설 · 끝나버린 시, 끝이 없는 시
작가 연보
기획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