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켜야지. 어둠을 이길 수 있나?
그 누구라도”
가난하고 고독한 도시, 버려지고 배반당한 삶
가장 어두운 곳에서 더 강렬히 꿈틀대는 생의 의지
“경계에서 세상의 온갖 거짓과 위선을 추문화한다”(문학평론가 우찬제)는 평을 들으며 2007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작가 윤보인의 첫 장편소설 『밤의 고아』가 출간되었다. 등단 8년차에 첫 장편이지만 작가가 유년 시절 겪은 망실과 고독의 정서를 담고 있는 작품인 만큼 오랜 시간 깊은 고민 속에 쓰고 다듬어져 작가의 애정이 남다른 소설이다. 윤보인은 그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독특한 감각의 경신과 꾸준한 자기 세계의 확장으로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섬뜩하리만치 그로테스크한 문장들은 이전의 편혜영‧김이설 등이 보여준 세계의 폭력을 들추어내는 하드보일드한 기법을 떠올리게 하고, 세계를 비틀어보고 우울을 끄집어내는 정서는 비슷한 시기 등단한 염승숙‧임수현과 나란히 읽어볼 수도 있지만, 윤보인은 좀더 개인적인 욕망에 천착해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원초적 본능에 더 충실한 인물과 세계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재작년 출간된 소설집 『뱀』(문학과지성사, 2011)으로 사회라는 거대한 틀에 수렴되지 않는 개인의 고유한 욕망과 충동을 집요하게 추적했던 작가는 이번에는 좀더 긴 호흡으로 삶의 근원에 뿌리박힌 어둠을 길어 올려 보인다. 서늘할 만큼 정적이고 그늘진 소설 속 공간들은 어디라고도 할 수 없는 동시에 모든 곳과 닿아 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우울하고 부정적인 등장인물들 또한 누구도 아닌 동시에 모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깊은 어둠, 생을 관통하는 비루함과 우울, 이 모든 것들을 날것으로 드러내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남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담담하고 당당하게 드러낸다는 점이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일말의 사랑마저 잃은 완전한 고아들이 사는 연립
이야기는 “가난한 신혼부부, 외국인 노동자, 사고로 부인을 잃은 남자, 아이를 버리고 가출한 젊은 여자”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모여 사는 연립에서 시작된다. 이곳에 살고 있는 세 사람, 여, 기, 로의 시선이 교차되며 소설이 진행된다. 이 인물들의 공통점은 실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고아’라는 점이다.
갓 태어나자마나 폐차장에 버려졌던 여는 폐품을 수거하는 여인에게 발견되어 살아남았다. 만성적으로 우울증을 앓던 여인의 손에서 길러지던 그녀는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여인의 오빠인 늙은 사내의 집으로 보내졌고, 병든 사내를 간호하며 최소한의 보살핌조차 받지 못한 채 자라났다. 그녀는 자신만의 아이를 낳기 위해 여러 남자를 전전해왔지만 아이가 생길 때마다 유산을 반복한다.
죽음. 그 앞에서 단 한 명이라도 슬프게 울어준다면.
하지만 여에겐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가족도 심지어 친구도 없었다. 여인이 떠난 후 늙은 사내도 곧 숨을 거두었다. …… 유골을 뿌리던 날, 모처럼 많은 비가 내렸다. 더러운 비였다. 입속으로 자꾸만 모래알들이 들어왔다. 그녀는 삶을 증오하면서 하염없이 바닷길을 걸었다. (p. 28)
기는 비쩍 마른 사내다. 그의 부모는 쌍둥이를 낳다가 한 아기를 잃자 극도의 무기력과 슬픔에 빠져 산다. 기는 그런 부모를 증오했지만, 동시에 살아남은 나머지 동생의 강한 생명력 또한 혐오한다. 기는 결국 자라서 먹고 자는 일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람이 되었다.
“인생은 고약한 것이지.”
언젠가 그의 아버지는 말한 적이 있었다. 옆에 있던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무기력이 기는 두려웠다. …… 어느 날 그의 부모가 일하던 세탁소에서 화재가 나서, 그들이 한꺼번에 변을 당했을 때 그는 몹시 슬펐지만 한편으론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슬픔만 느낀다는 것은 철저한 거짓일 수도 있었다. (p. 46)
그리고 로. 그는 한때 기자였고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해외의 여러 도시를 다니던 중 열여섯 연상의 작가이자 번역가인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 삶에 대한 냉소와 환멸로 가득 찬 그에게 로는 깊게 빠져들었고 아내와의 사이는 급격히 멀어졌다. 어느 날 모스크바에서 유학 중이던 아들이 자살하면서 아내는 정신이상자가 되고, 로 또한 스스로 자기 발목을 총으로 쏘면서 그가 이제껏 누려온 삶 모두를 내려놓게 된다.
모스크바에 있던 아들이 죽었다고 아들의 룸메이트가 전화를 걸어왔다. 독극물에 의한 자살이라고 했다. 아들의 룸메이트는 죄송하다고 반복해서 말할 뿐이었다. …… 그날 꿈에서 아들의 환영을 보았다. 아들의 눈길은 싸늘했다. 원망과 증오가, 적의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로는 아들을 애타게 불렀다. 아들은 좀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았다. (p.84)
부정하고 비정하며 무정한 삶, 그 속에서 고동치는 심장 소리
『밤의 고아』는 어둠이 과잉된 세계의 이야기다. 그곳에서는 좌절과 냉소가 횡행하며 불신과 배반이 당연시된다. 우리의 일상에도 항상 존재하지만 누구도 부러 보려 하지 않는 것들을 계속 노출시킨다. 독자에게 부정성으로 가득한 세계를 발견하게 하고 또한 납득시키려고 한다. 그 이유는 폐차장으로 산책 나가는 여의 행동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는 폐차장 근처를 기웃거렸다. 버려진 타이어, 깨진 유리창, 사고의 흔적이 남아 있는 차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사람이 없을 때마다 그녀는 빈 차의 내부를 살폈다.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낳고 싶었다. 폐차장 안에서 한껏 다리를 벌린 채 생명체를 끄집어내고 싶었다. (p. 31)
여는 완전히 버려진 존재들로 가득한 폐차장에서만 비로소 새 생명을 세상으로 내보낼 수 있겠다고 판단한다. 윤보인은 부정성이 곧 이 세계의 현실이며, 이에 대한 수용을 전제로 한 희망을 긍정한다. 추악한 세계에서 아직 새 생명을 포기하지 않은 여의 모습이 바로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한 삶과 인간의 원형은 아닐까. 소설의 말미에서 로는 아들을 잃어 미치광이가 된 아내를 바라보며 탄식한다. “결국 이런 게 삶이었다니.” 어둡고 우울한 세계 속에서 끈질기고 절박하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한 묘한 소설이다.
■ 작가의 말
스페인의 남부 네르하에 가면 평화로운 바다를 볼 수 있다.
그 바다는 내가 본 풍경 중 가장 아름다웠다.
한 번은 그런 평화 속에 머물고 싶었다.
어떤 것을 상실한 후에야, 뼈아픈 고독을 겪은 후에야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책을 온전히 윤민영을 위해 썼다.
쉽지 않았으나 늘 그녀를 사랑하려 했다.
윤민영은 내 어릴 적 이름이다.
2014년 여름 제주 애월에서
윤보인
1장
2장
3장
4장
5장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