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

문학과지성 시인선 443

채호기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4년 2월 25일 | ISBN 9788932025339

사양 변형판 130x205 · 158쪽 | 가격 8,000원

책소개

오로지 나와 언어만이 존재하는 세계
말의 몸, 몸의 말을 향한 깊고 짙은 꿈

‘몸’의 시인이자 ‘수련’의 시인, 시류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뜨거운 상징’을 빚어내온 시인 채호기의 시집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문학과지성사, 2014)이 출간되었다. 1988년 『창작과비평』 여름호로 시단에 나와 올해로 등단 26년을 맞은 채호기는 삶의 복판에서 발견한 실체로서의 몸과 그 신체 일부로서의 언어에 천착해왔다. 그는 네번째 시집 『수련』을 분기점으로 말에 대한 탐구를 더욱 본격화했고, 이전 시집 『손가락이 뜨겁다』를 통해 독특하고 신비로운 ‘언어’의 이미지를 돌출시키며 이러한 형이상학적 탐색을 심화했다. 그의 여섯번째 시집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은 언어를 둘러싼 채호기 특유의 물질적 상상력이 전면화된다. 말에 물질성을 부여하여 독특한 세계를 펼쳐 보이고, 언어를 자기 육체에 안아 밀도 높은 은유를 구사한다. 채호기는 마치 한 명의 구도자처럼 침묵 속에서 정진하며, 언어와 현실이라는 분리되지 않는 두 세계를 함께 살아낸다.


 

말의 몸_물질화된 언어의 세계
시집을 열면 오로지 ‘나-언어’로만 이루어진 세계가 한없이 펼쳐진다. 시인은 자신과 언어를 제외한 세속의 나머지 것들은 환영으로 분리시켜버리고, “창 없는 흰 벽의 독방”(「팽창」)처럼 내면을 향해 있는 형이상학적 공간을 구축한다.

흔적일 뿐인 글자에서 그는 흘러나온다.
사실, 그가 흘러나온 게 아니라, 처음에
얼룩이 번진다, 심장 덩어리의 붉은 얼룩?
노란 알전구와 빛의 원추형 입방체? 그 이전의
무엇, 알 수 없는, 그녀를 붙잡는 번짐, 얼룩,
흔들림, 진동…… 이게 다 우연일까? [……]
아무래도 우연이다. 그가 그녀 생각 속의 그와
너무나 달라 그를 알아볼 수 없었고 오물거리는
글자들이 그녀를 사로잡았지만, 그것들―찢어질
듯 팽팽히 잡아당긴 살빛 껍질, 팔 다리 머리
몸통을 마구 구긴 살덩이, [……]
그녀가 치르는 악몽은 그녀가 질 수밖에 없는
그와의 레슬링, 빠져나갈 수 없는 링 안에서
그녀는 붉은 살덩이에 짓눌리고, 일그러진
불안에 사지가 졸린다.
-「질 수밖에 없는 레슬링」 부분

화자 ‘그녀’는 글자에서 흘러나온 ‘그’와 매일 밤 질 수밖에 없는 레슬링을 벌인다. ‘그’는 글자에서 흘러나온 언어이자 의미 그 자체다. “팔 다리 머리/몸통을 마구 구긴 살덩이”처럼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그’와 화자는 숙명적으로 사투를 계속한다. 그녀(라는 주체)는 영원히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채호기에게 시를 쓰고 언어를 다루는 일 자체가 언어와의 영원한 씨름인 것이다.


몸의 말_ 내 안에서 끌어 올리는 언어와의 조우
당연하게도 ‘나-언어’의 세계에서 언어는 외부자일 수 없다. 이제껏 ‘몸’에 주목해온 시인답게 채호기는 신체의 일부로서 언어를 발견하고 그것이 입술이 열려 말이 태어날 때까지의 과정에 주목한다.

책을 읽다가 밤이라는 단어에 딱 걸린다. 밤이 그 어둠 속으로 시선을 몽땅 빨아들였다. 소리 내어 읽지도 않았는데 입천장에 이빨에 혀에 소리의 여운이 남아 있는 듯 얼얼하다. [……] 살다 보면 끝내 말하지 못하고 입안에 가득 찬 말을 꿀꺽 삼켜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 말은 몸 안에서 떠덜다 몸속 어둠보다 더 어둡고 깊은 밤이 된다. [……] 길을 걷다 발밑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면 주저앉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밤이란 단어를 어루만지며 그 촉감과 소리와 그 양파 같은 의미의 껍질들 앞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 나는 지금 그 돌의 살갗을 만지고, 표면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들으며, 내 안의 밤과 마주한 듯하다. 밤비가 내리는 지금 돌은 빗방울을 튕겨내면서 반짝거리지만, 비에 젖고 마침내 얼마간 비를 빨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처럼 나도 얼마간 내 안의 밤과 친숙해지면서 그 밤과 섞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 순간부터 이제 밤은 더 이상 밤이 아닐지도 모른다. 밤에 돌이 참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 때문이다.
– 「돌」 부분

“침묵의 의미로서의 돌의 말, 언어의 몸으로서의 돌”을 이야기했던 이전 시집의 연장선에서 이 시는 이해될 수 있다. 책에서 발견한 ‘밤’이라는 단어가 의미에 가 닿기까지, 그 기표와 기의라는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몸 안에서 만나 돌로 반짝이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은, 오랜 시간 동안 말에 대해 되묻고 따져 읽으며, 모든 언어활동을 의심하고 전복시켜본 채호기 시인의 오랜 탐구로 가능했던 것이다.


은유의 축제_빙하와 얼음의 말
말의 몸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운 이미지를 시로 빚어내는 긴 여정은, 현실과 분간할 수 없는 깊은 꿈속 단면과 같다. 이렇게 강한 몰입은 시인이 구사하는 독특하지만 친숙한 은유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시인 특유의 물질적 상상력을 통과한 은유의 장이 시 내부의 오묘한 세계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다.

눌러도 눌러도 가라앉지 않고
입안을 미끄러지는 말은 얼음이다.
거대한 유빙이 몸속을 떠다닌다.
-「얼음」 부분

손에 쥐려고 하면 이내 녹아 없어져버리는 것, 실체면서 비실체인, 없지만 있는 거대한 것. 그것은 얼음이고, 곧 말이다. 인간은 제 안에 모두 다 거대한 빙산을 친숙한 영혼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노련한 은유의 기법을 통해 오로지 그만이 만들어 보일 수 있는 빙하의 말을 들려준다. 이로써 자기 스스로의 영혼과 마주할 수 있는 자리를 독자들에게 마련해주고 있다.


■■ 시집 속으로

모자라는 단어가 있다.
단어에서 그녀가, 물컹, 생겼다.
모자 쓴 그녀가 저기 산길을 간다.
책 속에 모자가 그녀를 가리킨다.
따라잡을 수 없다. 그녀가 앞서 간다.
발밑에 뾰족한 돌이 발바닥을 지그시 누른다.
그녀의 허리 밑 허벅지 위에 두 개의 돌
지금 그녀를 보고 있는 이 시간처럼 단단하다.
돌이란 단어를 들추면 그녀가 도둑게처럼 달아난다.
돌을 밟으면 몸속에 그녀의 말이 울려
터질 듯 팽팽해지며 그득해진다.
그녀의 목소리, 녹색의 새로 피어나는 잎
그늘 밑을 걸어간다. 그녀의 그늘에 젖어
처음 생긴 그녀를 알고 싶다.
가쁜 호흡이 그녀에게 말한다.
말없이 땀이 솟고 손안에 잡혀 두근거리는
새처럼 심장이 그녀의 등에 닿는다.
돌아본다. 보라색 엉겅퀴꽃이
회녹색 줄기 위에서 차분하다.
그녀가 말한다. 공동묘지 사이
한 무리 금잔화 위로 바람이 지나간다.
가볍게 손을 흔드는 노란색들
노랑이란 단어가 동공을 물들인다.
노란 현기증이 몸에서 빠져나와
산 위를 활공한다.
공기를 저어 나아가는 노란 해
그녀의 금빛 얼굴이 물 위에 뜨고
앞서가는 그녀의 뒷모습 위에
재빠르게 노을의 커튼이 떨어진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열매를
부리에 머금어본다.
돌이 그녀를 누르고 있다.
흘러가는 그 문장 위에서.
-「모자」 전문


■■ 시집 소개 글

채호기는 마치 한 명의 간절한 구도자처럼 침묵 속에서 정진한다. 이 세계에 자신과 언어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그 외의 것은 그저 흘러 지나가는 세속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듯이. 이 시집은 우리의 입술이 열려 언어가 태어날 때까지의 여정을 고독과 침묵 속에서 탐구한 한 물질론자의 비범한 수상록이다.


■■ 뒤표지글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적·사회적 상황 속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 시 안에서 언어로 살아가는 것, 두 가지다. 시인은 이 두 가지 삶을 사는 것이다. ‘시는 현실적 삶과 밀착되어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이 두 개의 삶이 가장 가까이 붙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시인은 현실을 소재로 하여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어떤 것을 언어로 번역하거나, 압축하거나, 형태 없는 혼돈이나 복잡함을 눈에 보이게 잘 정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시인은 언어를 사는 것이다.
그런데 삶은 두 개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서 한 번 산다’는 문장은, 우리 앞에 펼쳐진 수많은 가능성들 중에서 단 하나만을 살아야 한다는 무서운 현실을 말해준다. 우리는 매순간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절박한 선택 속에서 출구 없는 삶을 살아간다. 산다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함 속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언어를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단어들 중에서 단 하나로 살아야 하니까. 시는 삶 앞의 거울이 아니다. 시인에게는 진짜도 허상도 없다.
그렇다면 두 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같은 삶을 두 개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나의 발을 동시에 두 곳에 내딛는 것이다. 시인에게 언어와 현실은 나눌 수 있는 것도, 다른 세계도 아니다. 시인은 현실을 사는 동시에 언어를 산다. 그런 뜻에서 시인은 단 하나의 삶 속에서 동시에 다른 두 개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물론 그것은 시인만이 할 수 있는 특권적 일은 아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것을 시인이 할 뿐). 신체의 열, 언어의 열, 어떤 열기가 한 발 내딛으며 나를 지우고 무엇이 되어 또 한 발 살아갈 것인가?

목차

시인의 말

피부가 찢어져 노출되는 글자
창문/눈꺼풀/한밤의 침입/질 수밖에 없는 레슬링/중얼거림/항구의 목소리/팽창/눈은 생각한다/휴식/타임머신/모자/고통의 또 다른 여정/어서, 어서 해야만 하는데/trumpeter/사막을 걷는다/울 엄마/이별할 수 없는 단어/세상보다 어미가 필요했던/개머리초원/나무/외로운 여우/나비/글자들이 깨무는 너의 살/만년필/의자/잉크병/손가락/다도해/돌/손가락/파르르 떠는 언어들/음악/어떤 페이지/햇, 빛–볕/?/화가와 모델과 그/유리–글자/신경의 통로/물–가시들/검은 물의 운동/검은 돌/애무의 행로/종이에

종이에 박힌 침묵
얼음

해설 | 물질적 언어와 신비・박상수 137

작가 소개

채호기 지음

시인 채호기는 1988년 『창작과비평』 여름호를 통해 시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지독한 사랑』 『슬픈 게이』 『밤의 공중전화』 『수련』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2002)과 현대시작품상(2007)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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