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계시처럼

이명행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3년 12월 13일 | ISBN 9788932025070

사양 양장 · · 288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신비로운 운행

풍부하게 함축된 설화적 원형들
이성적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기억과 인연의 경이로움

돌고 돌아 마주치는 운명의 신비
장편소설 『사이보그 나이트클럽』 통해 현실과 허구의 ‘익사이팅’한 대결을 보여준 소설가 이명행이 설화적 원형이 풍부하게 함축된 첫 소설집 『마치 계시처럼』(문학과지성사, 2013)을 펴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번 소설집의 작품들을 쓰는 동안 ‘관계’와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다고 밝혀놓았다. 얽히고설킨 그물 안에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맺어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주치는 애틋한 관계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맺어가는 인연들의 닿음닿음마다 신비로운 운명이 어려 있음을 얘기하는 일곱 편의 소설을 만나보자.


 

마치 계시처럼 되돌아온 기억들
소설집의 첫머리에 놓인 「숨결」은 새벽 2시만 되면 모르는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는 치과 의사의 이야기다. 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주인공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댄다. 주인공은 너무나 엉뚱한 이 상황을 생각처럼 쉽게 거부하지 못하고 그가 앓고 있던 불면증은 더욱 심각해진다.
「완전한 그림」에는 불현 듯 현실이 숨 막혀 가출을 감행하는 중년 남자가 등장한다. 제목 ‘완전한 그림’은 홀로그램을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인데, 홀로그래픽 필름의 아주 작은 조각에도 이미지 전체의 정보가 담겨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불발된 인연’과의 옛 기억을 하나하나 채취해가는 남자의 여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표제작 「마치 계시처럼」에서 눈에 띄는 이미지는 하얀 소복을 한 기차다. 주인공이 고향에서 유년에 간접적으로 겪은 열차 사고가 중년에 접어들도록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인데,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고자 고향으로 찾아갔을 때 새록새록 돋아나는 기억들이 아프고도 따스하다.
뒤를 잇는 「통증」 「변신의 끼」 「푸른 여로」 「국경, 취우령 이야기」를 마저 따라가보면, 삶의 경로를 벗어나 떠돌다가 ‘마치 계시처럼’ 느닷없이 엄습하는 기억들로 하여금 예상하지 못한 통증을 겪어내며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인물들을 계속 만날 수 있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인간이 도구 없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기재일 것이다. 『마치 계시처럼』의 수록작들이 모두 특별히 이 ‘기억’을 향해 촉수를 민감하게 뻗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내가 기억해내지 못한 만큼 무엇인가가 조금씩 내 몸에서 허물어져 나가고 있었다. 끝내는 모든 기억이 빠져나가버린 가죽 주머니로 남을 것이었다. 약속을 잊거나 물건을 찾지 못하는 것은 그것의 시작이었다. 언젠가 나는 나 자신에게 물을 것이다. 너는 누구인가. (「숨결」, p. 55)

신화나 설화의 주인공들은 잃었던, 혹은 전혀 가져보지 못했던 기억을 되찾거나 처음으로 움켜쥠으로써 삶의 새로운 가치를 얻는다. 『마치 계시처럼』의 주인공들도 잃었던 기억을 되짚어나가는 끝자락에서 다시 태어나며 관계를 새로이 한다.


 

이야기를 욕망하는 우리 안의 어떤 성질
이명행의 소설들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운명이나 우연과 같은 불확정적인 질서에 내던져진 인물을 통해 그 질문의 답을 찾고자 한다. 우연과 운명은 예측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을 불러일으키고 이 세계를 모순의 연속이자 집합으로 이해하게끔 한다. 그러나 이명행의 인물들은 절망의 끝에 서 있긴 하지만 운명과 우연도 이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의 한 갈래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삶을 경이롭게 맞이하도록 만들어주지 않는가 하는 긍정의 여지를 둔다. 문학평론가 김진수는 이명행의 이러한 작업을 ‘모순의 통일’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 ‘모순의 통일’이야 말로 설화적 이야기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신비로운 속성의 뿌리임을 역설한다. 이명행은 세계의 모순을 통일해내는 힘이 이야기에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읽어내고 있다. 말하자면 『마치 계시처럼』의 소설들은 “이야기를 욕망하는 우리 안의 어떤 성질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본문에서

여자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하소연 같은 것이 깃들어 있다. 이미 다 알잖아요, 그렇다고 말해줘요, 하는 투. 그런 투정에 어떤 믿음 같은 것이 서려 있다. 그런 믿음에 이미 나는 약속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 (「숨결」, p. 9)

생전에 나는 그토록 아름다운 노을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아, 이럴 때 죽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거구나. 그랬다. 딱 거기서 죽고 싶었다. 내가 그 언덕을 향해 휘적휘적 올라가자 형란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 섰다. (「완전한 그림」, p. 56)

맙소사, 기차가 소복 차림이라니. 새하얀 소복을 만들어 입고 기차는, 내 꿈의 저 모퉁이 벽을 허물고 달려들어 오는 것이었다. 내 꿈의 저 모퉁이를 허물고 쳐들어왔다가 다시 반대편 모퉁이를 허물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 무서운 돌진력으로 나를 압도하는 시간은 불과 3초나 될까. 그 3초 동안 기차는 하얀 소복을 펄럭이며 꽥꽥 소리와 함께 달려왔다가 달려가는 것이었다. (「마치 계시처럼」, p. 84)

선산의 양지바른 곳에 두 기의 무덤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두 무덤 앞에 선 그는 갑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그곳에 가기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가 불거져 있었다. 그는 두 무덤 중 어느 쪽이 자신의 생모인지 알지 못했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거기에 두 어머니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 하지만 어느 쪽이 자신의 생모인지 구별해본 일이 없다는 사실을 왜 그곳에 가기 전에 미리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통증」, pp. 132~33)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속에서 퍼덕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 속에서 무엇인가가 퍼덕였던 게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던 점은 두고두고 의문이었다. 귓전에 남아 한동안 나를 괴롭혔던 베토벤 교향곡은 지금도 여전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변신의 끼」, p. 186)

나는 그를 보지 않았지만, 본 것 같았다. 얼굴색이 창백했던, 수줍음이 많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내였다. 내게 옆모습을 보이며 구멍을 빠져나갔던 그 사내였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쩌자고 내 상상력은 이리도 질긴 것일까. 나는 끝내 묻고 말았다. 네가 바로 그냐? 나는 허공 속 사내에게 물었다. (「푸른 여로」, p. 218)

모든 이야기는 평면의 기억에서 오며 입체의 기억을 향해 나아간다. 세상에 기억만큼 이야기를 지켜줄 완강한 성체는 없다. 따라서 이야기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작은 기회라도 그 생존 확률은 매우 높으며, 강한 활성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이야기가 모든 것을 이기게 된 이유이며, 그것이 가진 힘이다. (「국경, 취우령 이야기」, p. 267)

목차

숨결
완전한 그림
마치 계시처럼
통증
변신의 끼
푸른 여로
국경, 취우령 이야기

해설 이야기를 욕망하는, 욕망의 이야기_김진수
작가의 말

작가 소개

이명행 지음

이명행은 1957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장편소설 『황색 새의 발톱』(문학과지성사)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우상의 숲』 『노란 원숭이』1․2 『거위가 자는 방』 『추억 속으로』 『그 푸른 스물하나』 『사이보그 나이트클럽』과 창작동화 『원시 소년과의 평원의 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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