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알아차린 것일까,
산다는 건 단지 주어진 시간 동안 그림자로 걷는 일임을”
문명의 칼바람을 견디는 무당벌레들
벼랑 끝에서 더욱 간절해지는 생의 날갯짓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왕성한 창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작가 박찬순의 두번째 소설집 『무당벌레는 꼭대기에서 난다』(문학과지성사, 2013)가 출간되었다. 작가는 첫 소설집 『발해풍의 정원』으로 “신진 작가들이 자부하는 신선한 감수성에 더불어 젖어가면서도 자신이 살아온 근대화시대의 리얼리즘 세대가 지녀온 삶의 의미 추구에의 소망을 여전히 잘 간수하고 있는”(김병익) 작가라는 평을 들었고, 이 책에 수록된 단편 「립싱크」는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출간하는 잡지 『AZALEA』에 번역 수록되기도 했다. 이번 책에서는 이전 박찬순 소설의 특징으로도 주목되었던 다문화적인 코드와 더불어 문명의 그늘 속에서 비루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응원을 담은 소설들 아홉 편을 묶었다. 박찬순은 소위 ‘여성작가’로 규정되는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며, 오래도록 생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해온 내공을 바탕으로 단단하고 당찬 문장을 구사한다.
삶의 궤적을 따라 더욱 진해지는 감동
박찬순의 소설 세계에 선연하게 드러나는 언어에 대한 깊은 고민과 질곡에 빠진 생에 대한 아련한 시선은 작가의 삶과도 잘 맞닿아 있어 읽는 이에게 더욱 진실하게 다가온다. 잠시 박찬순의 이력을 살펴보자.
작가 박찬순은 1946년 경북 영주의 보수적인 가풍 속에서 나고 자랐으나 작가의 학구열에 대한 어머니의 지지로 1965년에 상경하여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故 최인호 작가를 비롯한 많은 문청들과 함께 습작하였으나, 생활적인 독립을 위해 학부 4학년에 이른 취직을 하여 MBC 라디오가 개국하던 해 초대 프로듀서가 된다. 1976년부터는 많은 방송사에 외화번역 작가로 활동하며 영화 「아마데우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등 천여 편에 달하는 자막을 번역했다. 또한 『나의 생애 골다 메이어』 『다락방의 등불』 등 여러 번역서를 냈다. 예순이 되던 해 소설 「가리봉 양꼬치」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2010년 소설집 『발해풍의 정원』을 냈다.
소설가 박찬순은 “번역 마감이 다가오면 며칠 밤을 꼬박 새서, 원고를 가져다주러 가는 길에는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누구보다도 숨 가쁘고 바쁜 시절을 살아왔다. 먹고 사는 일에 치열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현실에 발 닿은 희망’이 소설 속에서 순수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항상 언어에 밀착된 삶을 살며 말로 세계를 구현해낸다는 것의 한계를 통감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들로 박찬순은 삶의 가장 농밀한 장면들을 이야기 속에 담아내며,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긴 소설로 독자들에게 성큼 다가온다.
낯선 것을 자기 것으로 읽게 하는 소설의 힘
박찬순의 소설은 다양한 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문화적인 소재를 자기만의 의미로 내면화하고 그것을 삶의 한 깨달음으로 구체화한다. 「나폴레옹의 삼각형」은 나뭇가지에 줄을 묶어 받쳐놓아 폭설에도 두텁게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도록 하는 일본의 유키즈리를 주요 소재로 하여 힘겨운 삶의 무게를 버티게 하는 자신의 유키즈리가 무엇인지 자문해보게 하고, 「책 만드는 여자」는 아이오와의 옥수수밭을 배경으로 문학적 의지가 인간의 사회 경제적 삶과 빚는 갈등에 대한 고통을 짚어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살사Salsa’에 한 획만 더하면 ‘살자’가 된다는 「살사를 추는 밤」, 미국 키웨스트 사람들의 소라고둥에 대한 애착으로 치열하고 세련된 현대적 삶의 공허함을 드러내는 「소라고둥 공화국」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낯선 배경과 함께 선명한 의미로 다가온다.
무당벌레들, 이제 날자!
박찬순의 이번 소설집은 문명의 그림자에 가려진 이들을 조명하며 삶의 고단에도 불구하고 더욱 간절해지는 생의 의지와 확신이 형형히 드러난다. 표제작 「무당벌레는 꼭대기에서 난다」는 드높아가는 마천루로 빼곡해진 도심 속에서 아파트 복도를 청소하고 고층 빌딩의 유리창을 닦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보여주는 생에 대한 절박한 의지는 가장 아름다운 곤충 ‘무당벌레’의 날갯짓으로 형상화된다.
아침에는 꾸물거리던 하늘이 이제는 해가 반짝 난다. 왼손으로 압착기를 잡고 봉대를 세제통에 넣고 오른손을 옆으로 편다. 장갑 속의 퉁퉁 부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려본다. 추워서 얼얼한 작업화 속의 발가락도. 내가 만약 자연의 아이라면 손가락 발가락으로 이 대기 속에서 온갖 자양분을 받아들이리라. 내 얼굴은 나뭇잎처럼 탄소동화작용으로 엽록소를 만들어 몸속으로 내려보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무당벌레처럼 꼭대기에 또 다른 나무로 날아갈 것이다._「무당벌레는 꼭대기에서 난다」에서
표제작 말고도 미처 논문을 마치지 못한 채 유학을 중도 포기하고 돌아온 청년과 스리랑카에서 한국 공장에 일하러 왔다가 동료를 죽인 소년의 따뜻한 연대감을 다룬 「루소와의 산책」, 바쁜 일정에 쫓기며 박봉으로 살아가는 시간 강사와 수배자 신세로 떠도는 제자의 애증을 담은 「아직은 도슭이 필요해」 등도 관계의 회복과 삶다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독자들은 이 소설집을 펼치며 다양한 생의 이력과 연륜을 가진 작가가 펼쳐 보이는 이 따뜻한 세계에서 매서운 추위를 조금 녹여보아도 좋을 것이다.
■■ 본문 소개
“기, 길바닥을 알량한 글 나부랭이로 도, 도배해놓는다고 무, 문학 도시인가요. 어수룩한 작가 지망생들이나 호, 홀리려는 유치한 장난이지.”
그의 구시렁거리는 소리에도 나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
“와우, ‘왜 춤추지 않나. 여긴 내 마당이니 춤 춰라’ 레이먼드 카버.”
웬일인지 이번에는 그도 내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도시에서 가난과 싸우며 글을 썼던 작가에게 잠시 연민이 갔던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 태어나 휘파람 불며 춤추고 노래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평생을 쫓겨 다니는 자신의 처지가 생각나서였을까. 시는 가슴속의 고동으로 쓰는 거라며 이런 꾸며놓은 분위기에 혹해서 몰려오는 문학 지망생들을 비웃던 그였는데._「책 만드는 여자」
“허무 가운데 계신 허무님- 우리에게 일용할 허무를 주옵시고……”
칼루사 인디언들이 쏘는 화살이 내 머리에 와서 꽂힐 것만 같다. 인디언들은 막대기에 꿴 소라고둥의 뾰족한 끝으로 내 정수리를 내려치려고 달려든다. 나를 에워싸고 뚜우뚜우 소라나팔을 불어대는 비쉬누 여신과 인디언들을 피해 나는 숲으로 눈길을 돌린다. 혹시 나무들이라도 내 편이 되어주려나 하고. 하지만 달빛에 시커먼 윤곽만을 드러낸 채 사이프러스 숲은 싸늘한 눈길로 나를 지켜볼 뿐이다._「소라고둥 공화국」
■■ 작가의 말
첫 소설집을 낼 때는 두려움 가운데서도 작은 설렘이 있었다. 문학이라는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찰랑거리는 물에 첫발을 담그는 듯한 느낌. 아마도 무지해서였으리라. 두번째는 나도 몰래 깊은 바다에 풍덩 발을 내딛는 것 같은 공포에 시달렸다. 자기 갱신의 흔적이 없는 글이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강박감에서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또다시 끼적이고 있었다. [……] 매년 가을이면 들려오는 세계 작가들의 시와 소설 낭독 소리를 ‘평원에 쏟아지는 단비 같은 축복’이라 부르던 아이오와의 농부와 독자 들. 그들 모두 남루한 생의 덤불속에 숨어있는 눈부신 조각을 찾아내고 그 너머 깊고 먼 어떤 곳에 도달할 수도 있는, 언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그들에게서 옮아온 그 그리움의 힘으로 쓸 수 있었다. 살며, 사랑하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승리하는 내 이웃들의 이야기. 아니 실수하고 실패하고도 승리하는 삶의 전사들의 이야기를.
무당벌레는 꼭대기에서 난다
루소와의 산책
살사를 추는 밤
소라고둥 공화국
책 만드는 여자
압록 교자점
나폴레옹의 삼각형
아직은 도슭이 필요해
여섯 개의 물방울
해설 회의주의자의 사전 양윤의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