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떻게 하나의 기록이 문학이 되는가?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는 무엇 때문이며 누구 때문인가?”
“프랑스가 지구상에 배출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자크 시라크)이자 ‘해체주의’를 창시하여 기존 서양 철학의 전통을 뒤엎으며 현대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자크 데리다. 그의 문학론을 묶어 펴낸 흥미로운 책이 문학과지성사에서 ‘현대의 문학 이론’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한 편의 인터뷰와 열 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문학의 행위』(데릭 애트리지 엮음, 정승훈・진주영 옮김)가 바로 그것.
데리다의 문학론―한 편의 인터뷰와 열 편의 에세이
자크 데리다는 초기작에서부터 문학의 부름을 받아왔다. 희곡, 시, 소설을 포함하여 불어, 독어, 영어로 된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문학’에 대한 데리다의 글은 넘쳐난다. 이 책은 이러한 광범위한 문학 텍스트들에 대한 데리다의 응답들 다수를 몇 가지 기준에 따라 선택하여 한자리에 모은 것이다.
데리다와의 인터뷰를 포함해 모두 11편의 글로 이루어진 이 책은 루소, 말라르메, 카프카, 블랑쇼, 조이스, 퐁주, 첼란, 그리고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철학 사이의 접면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횡단하며 데리다 특유의 해체적 독서를 시도한다. 이렇듯 책에 실린 데리다의 텍스트들이 응답하고 있는 구체적인 작품들은 문학의 모든 행위—행위와 기록—이다. 즉 관습적이고 제도적으로 ‘문학적’이라고 범주화된 작품들이자, 또한 어떤 식으로든 문학을 수행하고 상연하며 그것의 법을 수립하거나 의문시하는 작품들, 제도와 범주를 확인하는 동시에 그것들로부터 내적인 거리를 두고 작동하는 작품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의 텍스트들 또한 ‘문학 행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서두에 실린 인터뷰는 ‘문학’과 ‘철학’의 문제를 비롯해 정치, 역사, 페미니즘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는 데리다 사상의 면모를 그의 육성을 통해 답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운 독서를 제공한다. 엮은이인 데릭 애트리지의 세심한 편집 또한 이 책이 지닌 미덕이다. 상세한 머리말과 한 챕터 분량의 개론, 그리고 데리다와의 인터뷰는 이 선집이 갖는 의도와 의미를 충실히 전달한다. 뿐만 아니라 각 글들 첫머리에 핵심과 맥락을 짚어주는 소개글을 덧붙임으로써,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데리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던져준다.
“문학이라 불리는 이상한 제도”―데리다와 문학의 문제
그렇다면 데리다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 연구에 몸담아온 모든 이들에게 핵심적일 수밖에 없는 이 질문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서양 철학 전통 내에서도 끊임없이 반복하여 제기되어왔다. 이는 결국 문학적 질문이 아니라 철학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은 문학의 본질에 대한 진술을, 문학을 문학이 아닌 모든 것과 구별하는 요소를 추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분리될 수 없으며 문화, 정치, 윤리 혹은 역사를 포함한 모든 고려 속에 내포되어 있다.
이 책에서 데리다가 강조하는 바는 “문학이 하나의 제도”라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자체적으로 문학적인 텍스트란 없”으며, “문학은 자연적으로 혹은 머릿속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지리적으로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사회적, 법적, 정치적 과정에 의해 생겨났다.” 특히 17세기 혹은 18세기 이래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경험해온 문학이라는 제도는, 우리 주변의 여러 언어적 실천 가운데서도 문학을 독특한 어떤 것으로 만드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데리다는 바로 그 특이성을 강조한다. “관습과 규칙 등을 가진 역사적 제도로서의 문학, 그러나 또한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말할 힘을 가진, 이러한 규칙을 어기고 이를 몰아냄으로써 자연과 제도, 자연과 관습법, 자연과 역사 사이의 전통적 차이점을 도입하고 발명하고 더 나아가 의문시하는 그러한 제도로서의 문학.”
이러한 의미에서 거의 최초와 다름없는 이 문학 선집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사고방식을 가능하게 한 숨겨진 조건으로서 ‘문자’를 탐구하는 것이 바로 ‘해체’라 불리는 데리다의 작업이었고, 따라서 그의 작업은 서구 사상을 대표하는 구체적인 작품들에 밀착한 연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데리다의 ‘철학 텍스트 읽기’가 아닌 ‘문학 텍스트 읽기’ 작업을 한데 모은 이 책은, 이런 의미에서 난해하기 짝이 없는 ‘해체’란 현상을 이해하는 또 다른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데리다 작품에 나타난 문학, 즉 문학 텍스트와 문학이라는 제도의 의미를,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의 데리다 저작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루소, 말라르메, 조이스, 퐁주, 카프카, 셰익스피어……
‘문학’과 ‘철학’ 사이를 종횡무진 횡단하는 지적 사유의 모험
이렇듯 문학 텍스트에 대한 데리다의 글쓰기는 어떠한 관습적인 의미에서도 논평이나 비평, 해석이 아니다. 데리다의 글쓰기는 문학작품을 위치 짓거나 장악하거나 철저히 규명하거나 번역하거나 꿰뚫어보지 않는다. 문학에 대한 데리다의 텍스트는 문학적인 정도 이상으로 철학적인 것은 아니라 해도 여전히 철학적인 질문에 사로잡혀 있으며, 문학 텍스트에 의한 철학의 해체가 감지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에서 문학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문학이라는 단어를 글쓰기나 법과 같은 용어로 만드는 그 무엇, 문학이 속한 담론과 제도를 뒤흔들 수 있는 그 무엇 말이다.
1장 「“문학이라 불리는 이상한 제도”」는 엮은이인 데릭 애트리지와 자크 데리다와의 인터뷰로 책 전반을 아우르는 구체적인 질문과 답변을 통해 ‘문학’과 ‘철학’의 문제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인터뷰는 데리다의 제안으로 성사되었으며 이전에 출판된 적은 없다. 2장 「“이 위험한 대리보충”」은 데리다의 주저 『그라마톨로지』 제2부 2장으로, 루소 텍스트들 가운데 ‘대리보충’이라는 단어의 변덕스러운 사용에 주목했다. 3장 「말라르메」는 제목 그대로 말라르메 작품에 관한 짧은 논의를 담고 있다. “문학적”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말라르메의 글쓰기는 문학과 문학 비평의 전통적인 범주를 뒤흔든다. 데리다에게 말라르메가 야기하고 징후화하는 위기는 새로우면서도, 또 아주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4장 「첫번째 세션」에서 데리다는 어떻게 해서 미메시스가 진리 개념과 밀접히 연관되어왔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위해 데리다는 미메시스 개념의 내적 모순들이 분명히 드러나 있는 플라톤의 『필레보스』 발췌본과, 그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말라르메의 짧은 산문시 「미미크」를 겹쳐놓는다. 5장 「법 앞에서」는 이 글에서 인용하는 카프카 우화의 제목과 동일하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자기 심문적 질문은 카프카의 짤막한 우화 「법 앞에서」에 대한 폭넓은 독해에서 다시금 제기된다. 6장 「장르의 법칙」은 5장 「법 앞에서」와 묶여 풍성하게 읽힐 수 있다. 「장르의 법칙」은 다른 문학 텍스트에서 출발하여, 법과 법의 대리인들에 대한 의무의 문제와 씨름하며, 또한 그 문제에 다가가는 데 있어서의 문학의 중요성을 붙잡고 늘어지는 에세이다. 7장 「율리시스 축음기: 소문으로 들은 조이스의 예스」는 조이스에 관한 데리다의 에세이로, 제9회 국제 제임스 조이스 심포지엄의 초청으로 개회 연설을 했을 당시 발표한 글이다. 8장 「「프시케: 타자의 발명」 중에서」에서 데리다는 프랑시스 퐁주를 논하며 ‘발명’이라는 이슈를 통해 ‘타자’라는 문제를 다룬다. 9장 「『시네퐁주』 중에서」는 8장에 이어 퐁주를 다루며, 서명과 고유명사라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에 매진한다. 10장 「『쉬볼렛: 파울 첼란을 위하여』 중에서」는 첼란 시에서 따온 여러 가지 모티프를 통해 그 이중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 글에서는 암호 쉬볼렛, 할례, 재 그리고 날짜가 포함된다. 데리다가 “날짜의 수수께끼”라 부르는 이 특성이 이 글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를 이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11장 「아포리즘 대응시간」은 1986년 『로미오와 줄리엣』 파리 공연에 앞서 다니엘 메스기슈의 초청으로 마련된 데리다의 강연을 계기로 씌어졌다. 이 희곡은 서구 문화 역사 전체에 걸쳐 지속되는 문제점들을 표출하고 있음과 동시에 가장 친숙하고도 재소비되는 아이콘들 중 하나다. 데리다는 이 같은 두 가지 특성에 반응하고 이 둘을 대응시간에 초점을 맞춰 연결시킨다.
■ 책 속으로
이후의 철학적 훈련, 직업, 교수라는 위치 또한 “일반적으로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환하는 우회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 글쓰기의 공간에는 단순히 특정한 경우 이상을 의미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관습과 규칙 등을 가진 역사적 제도로서의 문학, 그러나 또한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말할 힘을 가진, 이러한 규칙을 어기고 이를 몰아냄으로써 자연과 제도, 자연과 관습법, 자연과 역사 사이의 전통적 차이점을 도입하고 발명하고 더 나아가 의문시하는 그러한 제도로서의 문학. 우리는 여기서 사법적이고 정치적인 질문들을 던져야 합니다. 서양에서 비교적 현대적인 형태의 문학이라는 제도는 모든 것을 말할 권위와 연결되어 있고, 의심의 여지없이 현대적 개념의 민주주의의 태동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제 기능에 문학이 종속된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열린 의미의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것과 문학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봅니다. (1장 「“문학이라 불리는 이상한 제도”」, 54쪽)
“해체”의, “해체적인” 질문하기, 읽기 또는 글쓰기의 체험은 “즐거움”을 위협하거나 오해하는 법이 없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향유”가 있을 때마다 거기엔 “해체”도 있는데 이것은 이른바 효과적인 해체입니다. 비록 자신의 임무는 아니라 할지라도 해체에는 금지된 향유를 해방시키는 효과가 있지요. 아마 이 향유가 바로 “해체”의 열렬한 반대자들을 가장 짜증나게 하는 것일 듯합니다. 이들은 이른바 “해체주의자들”이 위대한 작품들과 전통의 풍부한 보고를 읽는 자신들의 습관적인 향락을 박탈해버렸다고 비난함과 동시에 해체주의자들이 지나치게 유희적이며 과도한 즐거움을 좇는다고 하니까요. 자신들도 원하는 이 즐거움을 말이죠. 흥미롭고도 전형적인 모순이죠. (1장 「“문학이라 불리는 이상한 제도”」, 77쪽)
말라르메가 어떤 단절을 나타낸다면, 그 단절은 또다시 반복의 형태를 띨 것이다. 이는 예를 들어 있는 그대로 과거의 문학의 본질을 드러낼 것이다. 지금 이 텍스트에 힘입어, 이 안에서 〔단절과 반복이라는〕 이중 작용의 새로운 논리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논리를 말라르메가 만든 건 아닌데, 그것을 말라르메가 만들었다고 하려면 서명이라는 순진하고 이기적인 개념에 의존해야 하지만, 그는 “조작”이라 부른 것을 정의하면서 이 개념을 끊임없이 해체했다. 텍스트란 애초부터 지칭작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텍스트는 사물 자체에도, 저자에도 참조하지 않는다. 앞으로 보겠지만 저자가 텍스트에 기록하는 것은 자신의 소멸뿐이다. 이 소멸은 적극적으로 기입되며, 그것은 텍스트상의 사고事故가 아니라 오히려 본질이다. 그것은 텍스트에 끝없는 누락의 서명을 새긴다. 책은 종종 무덤처럼 묘사된다. (3장 「말라르메」, 150쪽)
이런 의미에서 카프카의 텍스트는 아마도, 모든 텍스트의 법-앞에-있음에 대해 들려준다. 카프카의 텍스트는 이 점을 밀고 당기면서, 생략을 통해 말한다. 그 자체가 (그것이 표현하는) 법 앞에 있는 한, 어떤 유형의 법 앞에 있는 한, 카프카의 텍스트는 한 시대의 문학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회적으로 문학을 가리키면서, 문학적 효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얘기하는 문학을 넘어선다. 〔……〕
문학은 아마도, 단지 언어적이지만은 않은 역사적 조건들 아래서, 일종의 전복적인 법률성에 늘 열려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학은 얼마 동안 이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나, 그 자체가 완전히 전복적이지는 않았고, 실제로 종종 정반대의 경우가 되기도 했다. 이 전복적인 법률성은 자기동일성이 결코 보장되지도 않고 우리를 안심시키지도 않도록 요구한다. 그것은 또한 단지 문학이 복종하는 법뿐만 아니라 문학일 수도 있는 법의 진술을 수행적으로 생산하는 힘을 가정한다. 그래서 문학은 법을 제정하고, 법이 제정된 그 자리에 나타난다. 하지만 어떤 규정된 조건들 아래서, 문학은 문학을 보호하고 문학 출현의 조건을 제공하는 기존의 법을 피하기 위해 언어적 수행성이 갖는 법 제정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는 어떤 언어적 구조들의 지시적 애매함 덕택이다. 이 조건들 아래서, 문학은 법을 우회하거나 둘러싸고, 법을 되풀이하여 말하면서, 법을 유희할 수 있다. (5장 「법 앞에서」, 284~85쪽)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께 『율리시스』 속의 편지, 엽서, 타자기와 전보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전화를 빼놓았군요. 이제 전화와 관련된 체험을 말할까 합니다. 여태껏—그리고 지금도 여전히—저는 조이스 전문가를 대상으로 조이스에 대한 강연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조이스에 관해 과연 누가 전문가라고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제 의문점입니다. 여전히 두렵고 뒤처진 상태로, 지난 3월, 제 친구인 장-미셸 라바테가 전화를 걸어 제목은 생각했냐고 물었을 때 저는 정말 창피했습니다. 아직 정하지 못했으니까요. 그저 『율리시스』의 예스에 대해 쓰고 싶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었고 그 숫자를 한번 세어보기도 했어요. 222개의 예스가 소위 원본에 나타납니다. 물론 추정에 불과한 이 숫자는 단지 예스만을 고려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예스라는 단어만 포함한 이 숫자는, 꼭 예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똑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다른 형태의 예스들을 제외한 것이기에, 번역본의 예스의 개수와는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생기죠. 불어본에서는 예스가 꽤 많이 추가되었으니까요. 이 중 4분의 1은 몰리의 독백이라고 단순하게 일컬어지는 장에서 나타납니다. 예스가 발생하는 순간, 그 독백 속에 단절이 발생하게 되고 타자는 어딘가 전화로 연결되게 마련인데. (7장 「율리시스 축음기: 소문으로 들은 조이스의 예스」, 284~85쪽)
“날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단어 “날짜”의 의미에 골몰하기 위함이 아니며, 우리 관심사에 어느 정도 부합하긴 하지만 기존의 추정상의 어원을 탐구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첫번째 단어의 흔적으로, 이니셜 또는 편지의 서두로, 편지의 맨 첫 글자와 주어진 무엇 또는 보내진 무엇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날짜를 주어지거나 보내진 뭔가의 의미로 보는 것은 “~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형식을 우리가 넘어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날짜는 출현하기 위해 후퇴하기 때문에 그저 거기 있는 뭔가가 아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시라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그 자리에 날짜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첼란은 말한다. 설령 이들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10장 「『쉬볼렛: 파울 첼란을 위하여』 중에서」, 518쪽)
그녀가 로미오에게 밤중에 말을 건넬 때, 그녀가 “오 로미오, 어째서 당신은 로미오란 말인가요?/아버지를 저버리고 그 이름도 저버리세요”라고 말할 때 그녀는 그를, 그 자신을, 로미오란 이름의 소유자인 로미오, 즉 그의 아버지와 그의 이름과 절연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므로 로미오가 아닌 사람을 부르는 듯하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의 이름 너머의 그를 부르는 것 같다. 그는 현재 거기에 없으며, 그녀는 그가 거기에, 그 자신으로, 그의 이름 너머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밤이고, 이 밤은 이름과 이름의 소유자 사이의 불분명한 구분을 가려준다. 그녀는 그의 이름으로 그를 계속 부른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더 이상 스스로를 로미오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에게, 로미오에게 요청하길, 그의 이름을 포기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지 무엇을 부인하든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인 것이다. 그가 누구냐고? 로미오다. 스스로를 로미오라 부르는 사람, 그 이름의 소유자, 자신만이 이 이름을 소유한 것이 아님에도, 이 이름 바깥에서도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밤에 모습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은 채 스스로를 로미오라고 부르는 바로 그 사람. (11장 「아포리즘 대응시간」, 566~67쪽)
머리말 | 일러두기
개론: 데리다와 문학의 문제_ 데릭 애트리지
1장 “문학이라 불리는 이상한 제도”_ 자크 데리다와의 인터뷰
2장 “이 위험한 대리보충”
3장 말라르메
4장 첫번째 세션
5장 법 앞에서
6장 장르의 법칙
7장 율리시스 축음기: 소문으로 들은 조이스의 예스
8장 「프시케: 타자의 발명」 중에서
9장 『시네퐁주』 중에서
10장 『쉬볼렛: 파울 첼란을 위하여』 중에서
11장 아포리즘 대응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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