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이란 무엇이며, 소진된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베케트 작품의 감각적 사유를
철학적으로 재해석한 들뢰즈의 독창적 에세이
2012년, 한국 사회에 등장한 ‘피로사회’라는 화두는 성과주의로 인해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번에 문학과지성사에 펴낸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 역시 이 피로와 소진이라는 개념을 문제 삼은 들뢰즈 말년의 예술철학 에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들뢰즈는 피로와 소진 개념을 좀더 엄밀하게 구분하며, 그 차이를 철학적으로 깊이 파고든다.
들뢰즈는 기존 철학사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수많은 기념비적 저작을 남긴 것은 물론, 소설, 시, 영화, 회화 등 장르를 뛰어넘는 방대하고 폭넓은 관심사를 바탕으로, 철학과 예술을 종합하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개진한 인물이다. 『소진된 인간』 역시 그 작업의 일환으로, 베케트의 작품에서 ‘소진’이라는 특이성을 끌어내 철학적으로 분석하며 이미지의 역량에 관한 빼어난 통찰을 보여준다. 짧은 분량이지만 깊이 있는 시적 사유가 농축되어 책의 무게감을 더한다. 한편 옮긴이 이정하가 다소 난해하고 함축적인 들뢰즈의 글에 상세하고 탁월한 해제를 붙이고, 이 책에서 다뤄진 베케트의 작품을 간략히 요약 정리해줌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문학과지성사 刊, 2013)
들뢰즈와 베케트의 만남: 베케트의 비참하고 비천하고 위대한 인간들에 대하여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은 베케트의 네 편의 텔레비전 단편극(「쿼드」 「유령 삼중주」 「한갓 구름만……」 「밤과 꿈」)에 붙인 철학적 해제다. 그러나 들뢰즈의 사유는 네 편의 단편극에 그치지 않고 『몰로이』 『머피』 『와트』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등 베케트의 전작을 꿰뚫으며, 블랑쇼와 카프카, 예이츠, 베토벤까지 그 폭을 확장해나간다. 무엇보다 이 책은 베케트 말년의 작품에 붙인 들뢰즈 말년의 에세이다. 따라서 두 노회한 지성이 평생에 걸쳐 작업하고 사유했던 바, 원숙한 그들의 철학 세계가 이 작은 책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베케트의 극중 인물들에게서 어떤 공통의 특성을 찾아낸다. 피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소진’이 그것. 『소진된 인간』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소진된 인간은 피로한 인간을 훨씬 넘어선다.” 들뢰즈에게 ‘피로’는 더 이상 무언가를 ‘실현’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그러나 가능성은 남은 상태)이지만, ‘소진’은 더 이상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피로한 인간이 누워 있거나 포복하거나 바닥에 버티고 선 채,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소진된 인간은 책상 위에 머리를 푹 숙여 기댄 채 앉은 자세를 취한다. 앉아 있으므로 회복될 수 없다.
베케트의 극중 인물들, 성별도 이름도 나이도 없는 익명의 주체들은 ‘행동’하지 않는다. 가능성을 실현하려 하는 대신, 수동적 주체에 머물며 무용한 왕복 운동을 반복할 뿐이다. 즉 들뢰즈에게 ‘소진’이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생명’ 자체의 순수한 발생적 역량이 역설적으로 함축된 개념인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는 베케트 극의 인물들에게서 추출해낸 ‘소진’이라는 개념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한 뒤, 소진됨으로써 만들어지는 이미지(혹은 공간)에 관해 새롭고 격조 높은 사유를 펼친다.
그런데 왜 베케트였을까? 사실 베케트와 들뢰즈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들뢰즈는 이미 『차이와 반복』에서 베케트 소설의 인물들을 ‘애벌레 주체’로 정의하며 ‘수동적 종합’에 관한 사유를 풀어낸 바 있으며, 『시네마 1』에서는 베케트의 「영화」를 통해 운동-이미지의 유기적 운동의 구도를 추출해냈다. 즉 들뢰즈는 베케트의 작품 세계에 내재한 문제의식을 탁월하게 읽어내며, 자신의 철학 세계를 세우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들뢰즈 철학을 특징짓는 ‘이접적 종합’의 실험실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이 만들어진 1970~80년대는 텔레비전 ‘이미지’의 물질적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다. 들뢰즈는 베케트의 작업이 텔레비전 매체를 통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하는데, 이러한 베케트 극의 형식적 특질은 동시대의 영상적 실험들과 궤를 같이한다. 옮긴이에 따르면, 베케트의 극에서 카메라의 존재감은 매우 두드러진다. 그것은 등장인물과는 다른, 자율적이고 이질적인 움직임을 지닌 ‘야생의 눈’이다. 카메라는 공간을 정교하게 재프레임화하면서 프레임을 강력한 ‘시간의 프레임’으로 만들어내며, 바로 그 안에서 순수한 시간-이미지들을 생성해낸다.
이 책의 독특한 구성 역시 주목할 만하다. 프랑스 미뉘 출판사에서 1992년에 출판된 『쿼드』 선집에서 베케트의 네 편의 텔레비전 단편극 시나리오와 들뢰즈의 해제가 동일한 분량을 차지했던 것처럼, 한국에서 출간된 이 책 역시 들뢰즈의 앞선 시도를 전격적으로 따르고 있다. 즉 들뢰즈의 글과 옮긴이 이정하의 분석적인 해제가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며, 베케트에 관한 들뢰즈의 해제와 그에 대한 이정하의 해제라는 이중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들뢰즈 철학의 특징 중 하나라 할 ‘이접적 종합’이 이 책에서 다시 한 번 시도되고 있다.
『소진된 인간』이 출판된 1992년은 들뢰즈의 오랜 철학적 동지였던 펠릭스 과타리가 세상을 떠난 해이며, 그로부터 3년 후 들뢰즈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면, 마지막 창조 행위인 ‘이미지 만들기’를 위해 자신의 숨을 내주는 ‘소진된 인간’을, 그리고 폭발 직전의 엄청난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는 이미지의 자기소멸에 관해 쓴 이 에세이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이 책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들뢰즈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주며, 들뢰즈 철학의 한 축을 차지하는 이미지론과 그의 예술철학적 작업을 이해하는 데 좋은 교과서가 되어줄 것이다.
■ 책 속으로
베케트의 인물들은,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무언가 가능한 것을 실현하거나 실재화하는 능동적 주체들이 아니다. 실현하고자 하지 않으므로 이들에게는 실패의 가능성조차 없다. 이들은 오로지 주어진 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무화시키는 혹은 소진시키는 집요한 유희에 몰두하면서, 가능한 것의 실현을 무한히 연기시키거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자들, 가능한 것의 가능성 자체를 소진시키는 자들이다. 고치 속에 웅크린 번데기 유충처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가능성을 소진하는 것과 스스로 소진되는 것만이 이들의 주요한 소일거리이자 습관, 그리고 능력이다. (「옮긴이 서문」, 11~12쪽)
작용도 없고 반응도 없이, 이른바 ‘감각-운동적’ 연쇄 밖에서, 신체로 가시화된 힘들의 미세한 변용만으로 이루어진 듯한 베케트의 단편극들은 말 그대로 「영화」 이후에 온, 영화의 잠재태 같은 이미지들이다. 이 이미지들의 역량을 존재론적으로 논파하고 있는 「소진된 인간」은 들뢰즈의 두 권의 영화론 이후에 온 또 하나의 강력한 이미지론이다. (옮긴이 서문, 18쪽)
소진된 인간은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하는 자이다. 피로한 인간은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소진된 인간은 더 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다. “내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기를. 좋다, 그것 말고 내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으랴.” 더 이상 가능한 것은 없다. 철두철미한 스피노자주의. 그 자신이 소진되어 가능한 것을 소진한 것일까, 아니면 가능한 것을 소진해버렸기에 그는 소진된 것일까? 가능한 것을 소진하면서 그는 소진된다. 그 반대이기도 하다. 그는 가능한 것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을 소진한다. 모든 피로 너머에서, “결국 다시 한 번” 가능한 것과 끝장을 본다. (「소진된 인간 I」, 23~24쪽)
이미지는 대상이 아닌 하나의 ‘과정’이다. 대상의 관점에서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일지라도, 우리는 이 이미지들의 역량을 알 수가 없다.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이름이나 목소리 들의 랑그가 아닌, 소리를 울리고 색채로 물들이는 이미지의 랑그, 랑그 III이다. 말들의 언어는 계산, 추억, 이야기 들이 언어에 무겁게 달라붙기 때문에 성가시다. 말들의 언어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순수한 이미지는 언어와 이름, 그리고 목소리 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때로 목소리들이 입을 봉해버린 듯한 순간, 침묵 속에서 일상의 고요함을 틈타 홀연히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소진된 인간 I」, 40쪽)
무엇보다 종말, 모든 가능성의 끝에서야 우리는 우리가 이미 그것을 이뤘음을, 우리가 이제 막 이미지를 만들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공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미지가 본성적으로 아주 짧은 순간 지속하는 것이라면, 공간은 어쩌면 매우 제한된 장소, 즉 위니가 “땅이 꼭juste 적절하군”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고다르가 “단지juste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와 같은, 위니를 옥죄는 만큼의 제한된 장소일 것이다. 가까스로 겨우 공간을 이룬 이 공간은, 미시-시간으로 이루어진 이미지처럼 “바늘구멍” 크기로 수축된다. 동일한 검은빛, “결국 어떤 재로써만 표현될 수 있을 어떤 검은빛” “탁 하고 침묵 자 하고 완료.” (「소진된 인간 I」, 45쪽)
정신적 운동인 이미지는 그 자신의 사라짐, 소멸의 과정(너무 일찍 도래하건 그렇지 않건)과 분리될 수 없다. 이미지는 숨, 호흡이지만 꺼져가고 있는, 숨을 거두기 직전의 숨, 호흡이다. 이미지는 절멸하는 것, 다 타버린 것, 하나의 몰락이다. 이미지는 자신의 고귀함, 곧 영점 너머의 높이에 의해 그 자체로 정의되는 순수한 강도성, 오직 추락함으로써만 표현되는 순수한 강도성이다. 예이츠의 시에서 보존된 것, 그것은 하늘을 흘러가다 지평선에서 사그라지는 구름의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밤의 어둠 속으로 꺼져가는 새의 외마디 외침과 같은 음향적 이미지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잠재적인 에너지를 그러모아 농축하여 이를 자기소멸의 과정으로 이끌어간다. (「소진된 인간 II」, 68쪽)
베케트는 텔레비전에서 일정 정도 말의 열등함을 극복할 방법을 발견한다. 「쿼드」와 「밤과 꿈」에서처럼 대사 없이 가거나, 열거, 소개 혹은 배경으로 말을 사용하여 말의 결을 헐겁게 하고 그 사이에 사물 혹은 운동을 끌어들이거나(「유령 삼중주」 「한갓 구름만……」), 「이봐, 조」의 마지막 부분처럼 멀리 떨어진 몇몇 말들을 간격이나 운율에 맞춰 고정시키고, 나머지는 겨우 들릴락 말락 한 웅얼거림으로 나직이 흘려보내거나, 「밤과 꿈」에서처럼 어떤 말들에 선율을 입혀 말에 결여되어 있던 휴지부를 선율에서 부여받거나 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텔레비전 작품에서는 말이 아닌 다른 것, 즉 음악 혹은 비전이 이렇게 서로 꽉 끌어안고 있는 말들의 결을 느슨하게 하고 그 사이를 벌려놓거나 완전히 갈라놓기도 한다. (「소진된 인간 II」, 74쪽)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역량은 우리 삶 너머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지평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기저에 실재하는 생명의 잠재적 평면, 시간의 발생적 차원에 내재한다. 베케트식 애벌레 주체들, 곧 「영화」의 인물 O나 텔레비전 단편극의 소진된 신체들이 유기체로서의 완전한 소진을 불사하면서까지 제기하는 것이 바로 이 생명의 잠재적 평면에 내재한 창조적 역량, 시간의 형식과의 조우이다. 유기체는 사실 생명이라기보다 “생명을 가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옮긴이 해제」, 117쪽)
들뢰즈는 무엇보다 인물들이 쿼드를 횡단하며 반복하는 특이한 신체 움직임에 주목한다. 이들은 대각선으로 쿼드를 횡단할 때 마치 돌발적인, 그러므로 제어할 수 없는 ‘틱’ 증상이 신체에서 일어나기라도 하듯 쿼드의 중심 부근에서 돌연 몸을 틀어 맞은편으로 이동한다. 인물들의 반복된 움직임과 특이한 리듬으로 인해 쿼드 내부에는 점진적으로 바람개비 모양의 운동의 궤적, 강도적 흐름이 형성된다. 그와 동시에 쿼드의 중심, 즉 모두가 몸을 피하는 ‘위험 지대’이자 불가촉 지대에 폭풍의 눈과도 같은 하나의 잠재적 공간이 구축된다. (「옮긴이 해제」, 132~33쪽)
[경향신문] 소진과 절망서 역설적 희망을 길어낸 ‘베케트’를 되씹다
[한국일보] 베케트가 ‘공허와 절망의 작가’라고? 그야말로 ‘사랑과 행복의 작가’!
[동아일보] ‘베케트의 절망’은 희망이고 새로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