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

현대의 지성 150

대니 노부스 엮음|문심정연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3년 5월 30일 | ISBN 9788932023793

사양 변형판 153x224 · 345쪽 | 가격 18,000원

책소개

대니 노부스, 브루스 핑크, 슬라보예 지젝 등 내로라하는 여덟 명의 정신분석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라캉 정신분석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시도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현대의 지성’ 시리즈로 출간된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이 그것. 이 책은 여덟 명의 정신분석가들이 라캉 이론의 여덟 가지 핵심 개념을 추려 심도 있게 분석한 연구서로, 라캉 개념들이 추동된 이론적・실천적 맥락, 그 개념들이 라캉의 저서를 통해 발전해온 방식,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임상적이거나 사회문화적인 쟁점들과 관련되었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또한 이 여덟 가지 라캉적 개념의 근원 및 그 다양한 차원과 목적을 파고들어가, 이것이 다른 라캉적 혹은 비非라캉적 견해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탐구하고, 또한 이것이 현재의 임상적 혹은 비非임상적 문제들에 대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 묻는다.

그동안 라캉의 이론은 정신분석뿐 아니라 문학 이론, 철학, 페미니즘,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왔다. 그에 반해 라캉의 저작은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고도로 추상적인 데다 부분적으로만 출판되고 번역되었기 때문에 그의 용어와 공식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놓고 학계에서는 계속 논쟁 중이기도 하다. 이렇듯 라캉 이론에 관한 수많은 논의와 연구들이 넘쳐나지만, 엮은이 대니 노부스는 이 책이 일반적인 라캉 입문서나 독자 지침서식의 책들과 차별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책에서 라캉 정신분석을 처음 접한 이들은 단순한 용어 정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며, 다양한 맥락 속에서 등장한 어떤 개념이나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결하게 설명해주는 부분도 접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 그렇다고 이 책이 전문 독자를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미덕은 다름 아닌 “독자가 스스로 라캉을 읽기 시작하도록 이끌어 자기만의 ‘라캉으로의 회귀’를 손쉽게 할 수 있도록” 라캉 이론에 대한 또 다른 독해, 또 다른 서술을 시도한다는 데 있다.

 

여덟 명의 정신분석가가 논하는 여덟 가지 라캉의 핵심 개념들!

이 책은 라캉 정신분석의 후기 면모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즉 초기에 거론되지 않았거나 소홀히 다루어졌다가 후기에 들어와 부각된 개념들 및 개념 틀, 또는 초기와는 다른 의미와 밀도가 부여된 개념들 중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된 여덟 개의 개념을 여덟 명의 정신분석가들이 풀이한 것이다. ‘주이상스’ ‘네 개의 담론(주인기표)’ ‘폐제’ ‘분석가의 욕망’ ‘거울 단계’ ‘보로메오 매듭’ ‘주체’ ‘환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엮은이 대니 노부스는 이러한 개념들을 고르는 기준으로 ‘활용성’과 ‘확장 가능성’을 택했다고 말한다. “라캉 이론과 너무나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서 어떠한 텍스트에서라도 그것만 나타나면 거의 즉각 라캉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용어들”에서 출발했으며, “라캉의 강좌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등장하는 개념”들, 마지막으로 “사회문화적 영역과 임상적 영역, 심리학적 영역과 정신분석학적 영역, 이데올로기적 영역과 철학적 영역 등에 두루 적용 가능한 개념들”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이와 같이 추려진 여덟 가지 라캉의 핵심 개념들은 여덟 명의 정신분석가들에 의해 치밀하게 분석된다. 전문가적인 식견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례와 함께 각각의 개념들이 활용되어온 맥락과 의의를 짚어가며 써내려간 각각의 글들은 한 편의 완성된 글이면서 동시에 촘촘히 연결된 한 권의 완성된 저작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각각의 개념이 발전해오고 변화해온 양상을 통해 바라본 라캉의 이론은 흥미진진할뿐더러 난해하고 파편적으로 보이는 라캉의 이론에 새로운 조망을 제공한다.

엮은이에 따르면 중기와 후기 라캉의 모습들 뒤에서 초기 라캉을 발견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지만, 이는 라캉 이론이 전부 그의 초기 논문들에 잠재된 채 ‘항상 이미 거기에’ 있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런 해석은 ‘초기 개념들’이 ‘후기 맥락’ 속에 등장할 때면 항상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의 이론이 끊임없이 진보하는 것임을 뜻하지도 않는다. 라캉은 절대적인 정신분석학적 지식의 실현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견고하게 확립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지식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라캉이 ‘기성의’ 정신분석학적 지식(자신의 것이든 다른 누구의 것이든)에 끊임없이 도전했다는 사실은 왜 현재 확고하고 단일한 라캉 이론이라는 것이 없는지를 설명해주며, 이것은 이와 같은 라캉 저작에 대한 꼼꼼한 독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1장 「칸트주의 윤리학에서 신비 체험까지」에서 딜런 에번스는 라캉 저작에서 가장 복잡하고 모호한 용어이자 라캉 사유에서 결정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주이상스’를 다룬다. 주이상스가 처음 쓰였던 초기 의미에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뉘앙스의 변화를 차근차근 개괄한다. 제2장 「주인 기표와 네 담론」에서 브루스 핑크는 주인 담론, 대학 담론, 히스테리 담론, 분석가의 담론까지 라캉의 대표적인 네 담론이 가진 기본적인 특징을 서술하며, 그 구조적인 차이들을 해명한다. 제3장 「정신병의 메커니즘에서 증상의 보편적 조건으로」에서 러셀 그리그는 라캉이 정신병과 신경증의 크고 광범위한 차이들을 해명하기 위해 도입한 ‘폐제’의 개념을 흥미롭게 분석한다. 제4장 「정신분석의 원죄」에서 카트리엔 리브레히트는 분석가의 욕망을 논한다. “분석가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그리고 “정확히 어떤 단계에서 우리는 분석가가 되는가?” 이 물음에서 분석가의 욕망은 분석가가 되려는 요구를 지칭하며, 리브레히트는 한 사람의 분석가로서 프로이트의 욕망으로부터 라캉이 말한 분석까지의 여정을 통해 정신분석학에서 결정적 전환을 포함한 중요한 세 가지 주제에 대해 언급한다. 제5장 「거울 속의 삶과 죽음」에서 대니 노부스는 문학,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는 개념인 ‘거울 단계’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거울 단계는 ‘나’의 상상적 구축과 주체의 도래를 위한 ‘나’의 소외 기능이 구체화된 수학소로, 이에 대한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구체적 사례를 들어 흥미진진하게 써내려간다. 제6장 「불가해한 마디성」에서 루크 서스턴은 라캉이 생애 말기 10년 동안 몰두했던 위상학적 탐구의 핵심 도형이자 라캉 이론 중에 가장 논쟁적인 개념이기도 한 ‘보로메오 매듭’에 대해 서술한다. 보로메오 매듭은 라캉 이론의 최상한점, 즉 한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 한계는 수학소가 나타내는 공식화를 향한 야심이 마침내 이론화할 수 없고 번역 불가능한 증상의 실재로 허물어져 내리는 지점을 가리킨다. 제7장 「전-존재론적 비-실체의 원인과 궁핍」에서 파울 페르하에허는 라캉 이론뿐 아니라 지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주체’에 대해 다룬다. 이 ‘주체’ 개념을 통해 우리는 라캉 사유의 전개 과정을 전체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8장 「환상의 일곱 가지 베일」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환상’에 대한 흥미진진한 분석을 시도한다. 이데올로기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어떤 상황에 대한 진정한 공포심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환상-시나리오, 즉 환상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반면 라캉의 환상 공식에 대한 견해는 이와 같이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없으며, 환상과 그 환상이 은폐하고 있는 실재의 공포 사이의 관계가 겉보기보다 훨씬 더 모호하다는 것이다. 즉 환상은 공포를 은폐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환상은 그것이 은폐하려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으로, 지젝은 우리 주변의 구체적 실례를 통해 환상이 가진 일곱 가지 베일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이 책의 번역은 “문학의 심화된 이해를 위한 정신분석 연구 모임”(문심정연)의 첫번째 작업이다. 11명의 연구자가 번역을 맡았으며, 전체적인 감수와 책임은 정과리 교수(연세대학교 국문학과)가 맡았다.

 

 


■ 책 속으로

 

행간을 읽자면, 라캉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주이상스는 개인에게만큼이나 사회에 대해서도 문제가 된다. 프로이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문명은 본능의 포기 위에 세워지므로, 그것이 각 개인으로 하여금 단념하도록 요구하는 본능 만족의 파편들을 처리할 방법을 발견해야만 한다. 다른 문명은 다른 방법으로 이 일을 행한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다른 문명 집단들은 그들의 주이상스를 총체적으로 조직하는 다른 방식들을 지니고 있다. 희생적인 공양으로서의 본능 만족 포기에 관한 프로이트의 지적대로라면, 주이상스가 총체적으로 조직되는 주된 방식 중 하나로 종교가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식, 힌두교식 등의 주이상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라캉은 우리의 주이상스가 ‘궤도를 벗어난’ 지금의 사회 상황에서 다문화주의 사회는 명백히 인종주의의 대두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개별적인 주이상스의 양태들을 가진 집단들이 인접해 있는 상황은, 특히 각 집단이 다른 집단들과 대립하면서 자기식의 주이상스를 정의하려는 경향과 결합될 때, 그 자체로 ‘우리’식 주이상스를 ‘그들’에게 강요하는 경향을 부추긴다. (제1장 「칸트주의 윤리학에서 신비 체험까지」, 44쪽)

 

나머지 세 담론은 주인 담론에서 파생되는데, 각각의 요소를 반시계 방향으로 한 칸씩 이동 또는 ‘회전’시키면 된다. 이러한 심화된 혹은 ‘파생된’ 담론들은 시간상 주인 담론보다 늦게 출현하거나 파악된다고 가정할 수 있겠다. 이것은 최소한 네 담론 가운데 마지막 두 개의 경우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데, 말하자면 분석가 담론이 19세기 말에 출현하자 그 결과로 히스테리 담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논의되는 네 담론 외에 다른 담론들도 지금 사용된 네 수학소의 순서를 변경시킴으로써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만약 수학소들을 주인 담론에서 발견되는 순서($ → S1 → S2 → a)가 아니라 S2 → S1 → $ → a와 같은 순서로 변경한다면, 4개의 추가 담론이 발생한다. 사실상 네 위치에 네 수학소를 사용함으로써 총 24개의 담론이 가능하지만, 라캉이 오직 네 담론만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그가 각 요소들의 순서에 대해 뭔가 특별히 중요한 점을 발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라캉의 4항 구조가 대개 다 그런 것처럼, 그가 정신분석학에 가치 있고 흥미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그 구조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기존의 결합이 아니라 이와 같은 특별한 배치인 것이다. (제2장 「주인 기표와 네 담론」, 53~54쪽)

 

라캉의 명제는 따라서 다음과 같다. 비록 조이스는 정신병자였지만 글쓰기를 통해 정신병의 발발을 막는 데 성공했다. 이때 글쓰기는 조이스에게 병증의 역할을 한다. 실제로 라캉은 조이스가 글쓰기를 통해 분석에서만큼 멀리 나아갔다고 말한다. 그 자신의 정신병을 막아내는 데 조이스가 성공한 것은 정신병적 현상이 그에겐 신경증이나 밝혀진 정신병과는 다른 형식으로 나타난 덕분이다. 라캉은 기초 현상과 수수께끼 경험을, 예컨대 조이스의 ‘현현’에서 발견한다. 엿들은 실제 대화의 파편들을 원래의 문맥에서 떼어내어 서로 다른 종이에 신중히 기록해놓은 것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조이스가 첫번째 소설을 쓰기도 전에 이미 완성되었는데, 수많은 파편들이 훗날 그의 저작에 예고도 없이 재삽입된다. 제 문맥에서 찢겨 나온 현현은 부조리하거나 수수께끼 같은 파편들로 남아, 거기에는 모순과 무의미가 두드러진다. (제3장 「정신병의 메커니즘에서 증상의 보편적 조건으로」, 98쪽)

 

셋째이자 마지막 주제는 분석가의 욕망과 분석가의 담론에 관한 설명을 요약해주는데, 이는 라캉이 1969년에 소개한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분석행위자에게 ‘χ’로 작동하는 분석가의 욕망은 정신분석의 도입부까지, 즉 분석가의 담론 그것으로까지 소급된다. 분석가가 욕망하는 유일한 것은 분석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라캉은 결국 정신분석의 조건으로서 프로이트의 욕망으로 되돌아갔다. 분석가의 욕망에 대한 이 관점이 치료의 출발점에 선 분석가의 위치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분석가는 분석마다 그것이 자신의 첫 분석인 것처럼 임해야 한다. 물론 모든 단일한 케이스에서 분석가는 분석이 새로 발생하게 만들어야 하며, 이는 각 분석가에게 중요한 도전이나 다름없다. ‘원죄’의 끝없는 반복인 것이다. (제4장 「정신분석의 원죄」, 137쪽)

 

정통 정신분석학에서는 환자의 증상이 특기할 만하지만 억압된 (과거의) 인생사적인 사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데 반해, 라캉은 정신분석이 전미래 시제의 시간 구조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개인사에서 실현되는 것은 무엇이 있었다는 식의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그건 더는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은 무엇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식의 현재완료형도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은 변화 속에서 지금의 내가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와 관련된 전미래 시제이다.” 고전적 정신분석의 현재완료와 라캉식의 ‘전미래’ 간의 주된 차이는, 전자가 진리를 과거로부터 유래한다고 보는 데 반해 후자는 진리가 미래로부터 온다고 본다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 정신분석가가 환자로 하여금 과거의 진리를 발견하도록 촉구하는 데 반해, 후자의 경우 정신분석가는 진리란 미래에 달려 있으며 그 본질은 환자 자신의 욕망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지점으로 환자를 인도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과거에 의해 결정되기는커녕 반대로 자신의 미래와 과거 모두를 스스로 결정한다. 제 욕망의 표현을 통해서 말이다. (제5장 「거울 속의 삶과 죽음」, 167~68쪽)

 

요컨대 앞선 시기의 위상학과는 달리, 보로메오 매듭의 위상학은 무엇보다도 정신분석학에서의 주체를 이론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징적인 것, 기표, 구조 등의 핵심 용어를 중심으로 라캉적 주체 형성을 다루는 이론적 영역을 광범위하게 다시 개념화하는 작업의 일부에 해당한다. 이는 언어학적이고 구조주의적인 이론에서 한발 물러나 단순히 이를 수학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쓰는 것이다. 1957년의 라캉에게 말하는 주체를 가리키는 기표로서 주목받았던 문자의 기능은 이제 위상학적인 문자의 대수학으로 다시금 이론화된다. 이때 문자의 대수학의 목적은 수학적 지식이 아니라, “전통적 지식이 옹호해온 그 어떤 것과도 무관한” 정신분석학적 체험의 실재이다. (제6장 「불가해한 마디성」, 180쪽)

 

분열된 주체에 관해서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러한 주체는어떠한 본질도, 존재론적 실체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것은 전-존재론적이고 불확정적인 비-존재이며, 정체성 곧 자아는 오직 사후적으로만 형성된다. 이른바 ‘칵테일파티 경험’을 한번 떠올려보자. 당신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칵테일파티에 초대받았다. 사람들에게 당신을 소개하기 위해, 당신은 기표들을 생산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기표를 생산하더라도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표들을 생산할수록 모순과 틈, 어려움들은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험이 많은 사람은 “이게 나요!”라는 식의 상투적인 표현을 고수한 채 흔하디 흔한 소개를 하게 마련이다.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자기소개의 어려움이 자기 스스로를 제시할 만한 정확한 기표를 찾는 데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정반대로, 우리는 큰 타자의 장으로부터 오는 발설된 기표들에 의해 생산된다. 물론 분열된 방식으로 말이다. 또한 주체를 생산된 기표(들)와 동일하게 여기는 것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큰 타자로부터 오는 수많은 기표들과의 동일시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자아이다. 주체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현실화될 수 없다. 주체는 무의식,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것 등과 같은 전-존재론적인 위상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의 주체는 데카르트적 주체와 정확히 상반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공식으로 데카르트는 그의 생각으로부터 자신이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하지만 라캉이 보기에는, (의식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주체의 존재는 기표 아래로 사라진다. (제7장 「전-존재론적 비-실체의 원인과 궁핍」, 223쪽)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환상은 충동으로부터 욕망을 분리하는 장막이다. 환상은 주체가 어떤 공허, 즉 욕망을 구성하는 원초적 상실로서 충동이 그 주위를 맴도는 공허를 (잘못) 인식하도록 허용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자. 환상은 욕망의 본래적인 교착 상태에 대한 그럴듯한 해석을 제공한다. 즉 그것은 “성관계는 없다”는 수수께끼에 하나의 해답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환상은 단지 성공적인 성적 관계에 대한 환상이라기보다는, 왜 그것이 잘못되어버렸는가에 대한 환상인 것이다. 환상은 우리가 빼앗긴 주이상스가 우리로부터 그것을 훔친 큰 타자에게 집중되어 있는 장면을 구성한다.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의 환상에서, 사회적인 적대는 (재산을 축적하고 우리의 여인들을 유혹하는 등) 우리의 사회적 주이상스를 빼앗아간 숨은 행위자로 유대인을 지목함으로써 설명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도 역시 환상의 개념은 모호하다. 황홀한 환상은, 왜 그 사물들이 잘못되어버렸는지(왜 우리는 그 소녀를 얻지 못했으며, 왜 사회에는 적대가 만연한지)에 대해 말해주는 불안한 편집증적 환상에 의해 지지된다.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은 주이상스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축적되고 있다는 신화를 포기함으로써, 우리가 대상의 공허 주위를 맴돈다는 악순환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주이상스를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8장 「환상의 일곱 가지 베일」, 263~64쪽)

목차

감사의 말

서문

일러두기

 

제1장 칸트주의 윤리학에서 신비 체험까지―주이상스 탐구

_딜런 에번스

 

제2장 주인 기표와 네 담론

_브루스 핑크

 

제3장 정신병의 메커니즘에서 증상의 보편적 조건으로―폐제에 대하여

_러셀 그리그

 

제4장 정신분석의 원죄―분석가의 욕망에 관하여

_카트리엔 리브레히트

 

제5장 거울 속의 삶과 죽음―거울 단계 새로 보기

_대니 노부스

 

제6장 불가해한 마디성―보로메오 매듭에 관하여

_루크 서스턴

 

제7장 전-존재론적 비-실체의 원인과 궁핍―라캉의 주체 개념에 관하여

_파울 페르하에허

 

제8장 환상의 일곱 가지 베일

_슬라보예 지젝

 

미주

역자 후기

필자 소개

역자 소개

작가 소개

대니 노부스

벨기에의 헨트Ghent 대학에서 ‘인문자원관리부장Human Resource Manager’을 지내다가 1996년 영국 브루넬Brunel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심리학 전임강사를 거쳐 2006년 심리학․정신분석학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이후 새로 설립된 사회과학부의 장을 지냈다. 2012년부터 ‘전략․발전․대외관계’ 부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자크 라캉과 정신분석의 프로이트적 실천』 『아무것도 모르기, 어리석게 남기』(공저) 등이 있다.

문심정연

문학의 깊은 이해를 위한 정신분석 연구 모임이다. 이 책이 첫 작업으로서 앞으로 그 이름에 실질을 채우기 위해 힘과 사람을 모으고 있다.

딜런 에번스

언칼리지의 프로그램 디렉터

러셀 그리그

호주 디킨 대학 철학 및 정신분석학 부교수

카트리엔 리브레히트

브뤼셀 자유대학 심리학 교수

루크 서스턴

영국 애버리스트위스 대학 영문학 조교수

파울 페르하에허

벨기에 헨트 대학 심리학부 정신분석학 교수

슬라보예 지젝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대학 사회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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