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의 허위를 기습하고 어린 시절 야만으로 회귀하는 몸짓
한국 현대 시의 새로운 ‘상태’를 세우다
한국 현대 시의 현재, 황병승의 세번째 시집
하위문화의 거칠고 생생한 시적 에너지를 이용해 고급문화를 기습하는 시인 황병승이 세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문학과지성사, 2013)으로 다시 한 번 우리 시단을 뒤흔들 준비를 마쳤다. 황병승은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2005, 문학과지성사, 2012 복간)에서 모호한 상징들로 주류 질서 바깥의 것들을 과감히 동원함으로써 문단으로부터 양 극단에 놓인 평가를 받았다. 호평과 혹평이 뒤엉켜 밀려드는 상황에서 나온 두번째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문학과지성사, 2007)은 문화라고 이름 붙은 것들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하고 덧없는가를 끈질기게 고발했다. 독자는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황병승 특유의 발칙한 화법을 한껏 만나게 된다. 그의 생생한 도발은 언제나 자발적 실패로 귀결되는데 이는 다시 한 번 기성의 질서를 통렬히 조롱하는 효과를 발한다. 총 46편의 시를 통한 황병승과 세계의 밀고 당기는 한판 대결이 볼 만하다. 시인은 이겼다 말하지 않고 세계는 끝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관전 포인트는 거기에 있다.
야생의 언어 앞에 드러나는 세계의 맨살
황병승의 시어는 때로 맹견의 송곳니와도 같다. 이 사나운 이빨이 겨누는 곳은 언제나 세계의 두꺼운 가죽이다. 공격받은 가죽은 순식간에 벌어지며 그 사이로 세계의 맨살이 시뻘겋게 드러난다. “타인의 자유를 강력히 구속하고 체력을 과시하고 난장판을 사랑하며 뒷거래에 주력”하는, 야수보다 무정하고 악독한 사람들의 맨살이다. “셰퍼드가 사람을 구분하는 데 3초”밖에 안 걸린다지만 시인이 보기에 이런 명백한 악을 구분하는 데 3초는 “너무 길다”(「가죽과 이빨」). 시인의 거침없는 공격을 목격한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시집의 해설을 통해 고통과 경이를 동시에 체험했음을 고백한다.
황병승의 유식한 구어와 음흉한 암기 같은 문어와 유창한 저주는 그때마다 고통스럽도록 적합하고, 그 리듬은 자주 책장을 덮도록 아름답다. _해설 「실패의 성자」에서
동세대의 칠흑 같은 삶을 대변하는 실패의 우화들
1970년생 시인의 세대에게 실패는 일상다반사다. 이들의 이십대 중후반을 절망케 한 외환위기는 어느 날 마치 다 극복된 것처럼 호도되더니 슬쩍 신자유주의의 기치가 끼어들면서 끝이 어딘지 모를 터널은 자꾸만 연장되고 있다. 이를 대변하듯 시집은 어두운 우화 속에 실패하는 주체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인다. 특히 「Cul de Sac」(프랑스어로 ‘자루 밑바닥’이란 뜻인데 흔히 ‘막다른 골목’이나 ‘출구 없는 장소’를 가리킨다)에서는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한 남자가 깊은 구덩이에 빠져 죽은 채로 발견되는 일화를 시 쓰는 화자의 절박한 사유와 나란히 전개하면서 동세대의 슬픔과 분노와 공포에 찬 신음을 들려준다.
유기적 연속성 위의 시집들
황병승이 지금까지 내놓은 세 권의 시집은 교묘한 시 배치로 마치 한 권 같은 긴밀한 짜임새를 보인다. 첫번째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의 맨 마지막 시 「첫」과 두번째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의 맨 처음 시 「첨에 관한 아홉소ihopeso 씨(氏)의 에세이」는 첫 시집을 낸 시인으로서(라고 이해해도 좋을) 가졌던 미혹과 망설임이 창작에 대한 강렬한 욕망으로 극복되는 연결을 보인다. 그런가 하면, 두번째 시집의 마지막 시 「잔디는 더 파래지려고 한다」와 이번 시집의 첫번째 시 「벌거벗은 포도송이」의 경우엔 시를 쓰는 주체의 미학적 자각을 ‘잔디’라는 상관물이 꿰뚫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육체쇼와 전집』의 맨 마지막에 배치된, 어쩌면 ‘작가 후기’ 같기도 한 시 「내일은 프로」를 읽는다면 다음 시집의 향방을 점쳐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예상이 무엇이든 결국엔 빗나가고 말 것을 안다. 예상은 관념의 관성일 뿐이므로 섣불리 예단하지 않음으로써 황병승의 시의 속내에 다가갈 수 있음을 이미 체득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시인의 이 비밀스러운 혼돈이 감추고 있는 질서에 무릎을 칠 뿐이다.
■ 시인의 말
어떤 밤에 우리는
연필의 검은 심을 모질게 깎고
이 고독한 밤을 바꿀 수만 있다면
이 고독한 밤을 바꿀 수만 있다면
서로의 얼굴을 백지 위에 갉작 갉작 그려 넣으며
납득이 가지 않는 페이지는 찢었다
■ 시인의 산문
해바라기 꽃잎은 저토록 불타는데
해바라기 씨앗은 타버린 잿빛
시인의 말
벌거벗은 포도송이 / 오징어자수(刺繡) / 톱 연주를 듣는 밤 / 병 속의 좀길앞잡이 / 보람 없는 날들 / 다이아─몬드다 / 굴속의 연인 / 도둑키스 / Cul de Sac / 모래밭에 던져진 당신의 반지가 태양 아래C, 노래하듯이 / 쥐가 있던 피크닉 자리 / 육체쇼와 전집 / 강은아와 은반지 / 아름답고 멋지고 열등한 / 애정을─그리고 동시에─또 그 가운데 / 자수정 / 부식철판(腐蝕凸版) / 솜브레로의 잠벌레 / 가려워진 등짝 / 티셔츠 속의 젖을 쓰다듬다가 / 잼버리 / 카덴차에 이은 긴 트릴 / 호두 없는 다람쥐처럼 / 쓴맛을 알게 되기까지 / 모터와 사이클 / 황소달리기 축제 / 소행성을 지나는 늙은 선로공 / 추모식 날에 / 목책 속의 더미dummy들 / 세상의 멸망과 노르웨이의 정서 / 천사의 집─멧돼지 사냥 / 블루스 하우스 / 당나귀와 아내 / 스무살의 침대 / 塵塵塵 / 목마른말로(末路) 1 / 목마른말로 2 / 앙각 쇼트 / 방과 후 / 신scene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 갈색 글러브 / 모든 진흙과 윤활유가 진실을 끌어당기는군 / 가죽과 이빨 / 앙상블 / 커튼 뒤에서 / 내일은 프로 / 해설_실패의 성자_황현산
[연합뉴스] 전집이 없는 세계…반복되는 실패
[동아일보] 가시 사이사이 핀 가슴 뭉클한 추억의 꽃
[국민일보] 삶의 표면에 일렁이는 실패에 관한 명상… 황병승 시집 ‘육체쇼와 전집’
[경향신문] 실험영화·인디음악 같은 실패의 고백
[한국일보] 루저가 미안해하는 세상… ‘실패의 성자’로 돌아온 전위시인
[한겨레] 실패를 말하려 했으나 난 실패했네
[연합뉴스] 황병승과 박근형…연극으로 시도하는 시 낭송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