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음이여 잘 있거라”
25년간의 강제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고향에서 젊음마저 팔아버린 사내
자기연민으로 주저앉지 않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조용한 영웅의 이야기
소설가이자, 시인, 사회 평론가로 다양한 글쓰기를 해온 복거일의 열한번째 장편소설 『내 몸 앞의 삶』(문학과지성사, 2012)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북한에서 반중 활동 혐의로 긴 시간 동안 강제 노역을 하다 풀려난 윤세인이라는 인물이 딸의 결혼식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거액의 대가를 받고 자신의 젊은 몸을 늙은 몸과 바꾸어 노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담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이후의 조금은 먼 미래 이야기다. 작가는 생명 연장과 노화 방지 기술이 발전된 극단의 미래를 상정하고 이에 따라 발생할 수 있을 문제들을 제시한다. 젊음을 돈으로 사고팔게 된다면 어떨까? 긴 노년을 맞게 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그들의 욕망은 어떠한 것들이고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고 운명을 수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등의 의문이 소설의 줄기를 따라 솟아오른다. 복거일은 사회와 문명의 발전에 따른 문학의 진화와 확산 가능성,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소설의 시공간 확대에 주목해왔다. 이 소설은 그가 천착해온 그 가능성의 사회를 펼쳐내 보이며 인류가 처음 맞닥뜨리게 될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보길 요구한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인물들의 일관된 면모가 돋보이는 이 흠집 없는 이야기를 단숨에 따라가며 읽는 이 누구나 저마다의 답을 찾기를 기대한다.
2074년, 함흥에서 처음 만난 딸
주인공 윤세인은 대학 1학년생일 때 반중국 독립 운동 혐의로 체포된 뒤, 중국에서 25년간 강제노역을 하다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제는 가족도 친구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에서 그는 중국에 있을 때보다 더 큰 고독을 느낀다. 윤세인이 무척이나 머뭇거리며 찾아간 곳은 대학 시절 애인이었던 박민히의 집. 반갑게 맞아주는 그녀 뒤에 윤세인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은 예상치도 못했던 딸 신지다. 자신이 잡혀가기 전 박민히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윤세인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고향에서 유일한 피붙이인 스물다섯 살의 딸을 처음 만나게 되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다진다.
아버지가 건네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
윤세인은 신지가 곧 결혼을 할 예정임을 알게 되었으나 혼인 비용을 댈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해 시댁 식구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까 봐 걱정한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모아둔 재산도 없는 상황에서 강제 노역에 묶여 있던 터라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어 자괴하던 차에 그는 재교육 기관에서 만난 중개업자 전세훈을 통해 육신교환 수술에 대해 알게 된다. 육신교환 수술이란 젊은 몸과 늙은 몸의 뇌를 서로 바꾸는 일로, 중국의 부자들이 북한의 가난한 젊은이들의 몸을 사서 생명을 연장하는 데 이용하며 음성적으로 횡행하고 있는 이 산업에 대한 보안 유지를 위해 안전한 수술과 섭섭하지 않을 만큼의 대가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결국 윤세인은 중국 돈 1,100만 위안이라는 거금을 받고 사십대인 자신의 몸을 팔아 육십의 몸으로 살기를 결정한다.
뇌가 먼저인가 몸이 먼저인가
전세훈과 윤세인이 육신교환 수술에 대한 상의를 하는 대목에서 작가는 이러한 물음을 던진다. 인간의 정체성은 뇌에서 오는가, 몸에서 오는가? 정체성이란 것은 오직 이전까지의 기억과 사고 능력에서만 온다고 볼 수 있는가, 뇌를 바꾼다고 해도 생식 능력은 신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같은 그들의 토론을 읽어가다 보면 독자들은 앞으로 현실에서 직면하게 될 문제들을 예감하게 된다. 윤세인과 거래한 중국인은 30년 전 다른 북한인과 몸을 한 번 바꾼 적이 있어 윤세인의 뇌는 중국인이 아닌 육십대 북한인의 몸에 이식되는데, 소설 후반부에 윤세인이 육신교환 수술을 끝내고 새 신분을 발급받을 때 이전에 몸의 주인이었던 ‘리진호’와 비슷한 ‘리진효’로 이름을 짓고 새로 얻은 육신이 원래 살던 고향에 들러 오랫동안 남편 리진호가 돌아오길 기다려온 여인을 찾아내 새 거처로 함께 떠난다는 점에서 단순히 뇌와 신체는 분리하여 규정지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 본문 소개
“얼마나 돈이 드나요? 신지가 결혼식 올리고 신접살림 차리는 데?” 그녀의 삶에 불청객으로 불쑥 끼어들었다는 죄책감에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떠듬거렸다. 그녀로부터 ‘그건 저그나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라는 핀잔을 들어도 싸다고 생각을 하면서.
“얼마 안 들어. 유리야 가난하잖아? 신랑댁도 우리보다야 낫디만 부자는 아니고. 기래서 결혼식은 검소하게 올리기로 합의했디.” 그녀가 싱긋 웃었다.
“아, 기리 되었시요? 마음이 좀 놓이네요. 기래도, 누님, 딸자식 여의려면, 돈이 안 들 수 없는데, 내레 가딘 것이 하나도 없어서, 누님하고 신지 볼 낯이 없습네다.” 나는 고래를 숙였다. 문득 서러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여 치밀어 올라왔다._「제5장 다리 아래로 흘러간 세월」, p. 65
“네. 의사들이 논쟁하는 것을 보문, 재미있습네다. 여기 무슨 사고로 몸이 둘로 절단된 사람이 있습네다. 뇌하고 나머지 몸으로 분리되었디요. 의사들이 급히 생명 보존 장치 속에 두 부분을 따로 넣었습네다. 그래서 사이보그가 둘 생겨났습네다. 인공 몸속에 사람의 뇌가 들어간 사이보그하고 사람 몸에 인공두뇌가 들어간 사이보그하고. 윤 선생님, 어느 쪽이 원래의 사람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십네까?”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역시 사람 뇌를 가진 쪽이 원래의 사람을 대표하는 것 같습네다.”
“그러문 그 두 사이보그들이 인간 배우자를 만나서 같이 살게 되었다고 상상해봅세다. 여자든 남자든 같습네다. 사람 뇌를 가진 사이보그는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사람 몸을 가진 사이보그는 아이를 낳을 수 있디요. 세월이 지나문, 그 사람은 자식, 손주, 증손주로 대가 이어질 것입네다. 뇌가 없는 사이보그를 통해서 자식들이 나왔다는 사실은 전혀 영향을 미치디 않디요. 이것은 물론 극단적인 경우디만, 논쟁의 본질을 잘 드러내디요.”_「제10장 내 몸과의 마지막 향연」, p. 145
이제 나는 혼자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이었다. 삼십사 년 전에 아내를 떠났다가 막 돌아온 리진호라는 사내의 역할을 너무 오래 한 것이었다. 그냥 여기를 나가서 사라져? 어쩌면 그것이 가장 나은 길일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것을 떠올리면서도 그것이 내게 열린 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_「제17장 유산」, p.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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