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일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R 02

유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2년 11월 30일 | ISBN 9788932023632

사양 신46판 176x248mm · 172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문학과지성 시인선 R

01 이성복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02 유   하 무림일기
03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04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역동적 상상력과 무한한 체험의 반복Répétition,
몸 잃은 거룩한 말들의 부활Résurrection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일련번호 가운데 새로운 기호 ‘R’이 생겨났다. 한국 시의 수준과 다양성을 동시에 측량해 한국 시의 박물관이 되어온 문지시인선이지만 이 완전하고자 하는 노력 밖에서 일어나는 빗발치는 망망한 말의 유랑이 있었음을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거룩한 유랑들이 출판 환경과 개인의 사정으로 독자들에게로 가는 통로가 차단당하는 사정이 있어,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이에 내부에 작은 여백을 열고 이 독립 행성들을 모시고자 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R’. 문지 시인선 번호 어깨 근처에 ‘리본’처럼 달린 R은 직접적으로는 복간reissue을 뜻하며 이 반복répétition이 곧 새로 태어나는 일이기에 부활résurrection의 뜻을 함축한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일련번호 속에서 다문다문 R을 만날 때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낱낱의 꽃잎이 신기한 언어의 화성으로 울리는 광경을 목격하기를 기대한다. 그때쯤이면 되살아난 시집의 고유한 개성적 울림이 시집에 내재된 에너지의 분출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그렇게 수용하고자 한 독자 자신의 역동적 상상력의 작동임을 제 몸의 체험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가장 먼저 만날 문학과지성 시인선 R은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유하의 『무림일기』,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다.


R 02
무림일기

시대라는 무림武林에 중독된
은둔 고수의 키치 권법 풍자 검법

영화감독 유하의 동력은 삶과 시였다.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이후 프로레슬링, 무협소설, 할리우드 영화부터 포르노물까지, 쉽게 소비되는 대중예술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 시를 써온 유하의 첫 시집 『무림일기』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R시리즈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대량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대중예술이 급증하던 1980년대 말, 통속적인 것들의 문화적 의미를 밝히고 반성하는 “키치 소비자, 키치 반성자”로서 당대를 기운차게 읽어내고 현실을 통렬하게 풍자했던 유하의 시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키치 권법― “유하의 키치는 반성하지 않는다”
순수와 통속을 구분하여 무언가를 키치Kitsch적이라 일컫는 건 이제 진부한 표현이 되었지만, 키치는 예술적 트렌드와 무관하게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현상을 설명해주는 가장 적절한 용어다. 영화를 보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거나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쓰는, 이전의 각기 다른 ‘예술’의 영역으로 분류되어 고매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모조리 섞여 대중문화라는 이름 안에 녹아들었다. 대개 문학은 통속에 완강히 저항하는 한 끝과 통속에 깊게 동의하는 다른 끝, 그 사이의 교집합에 위치한다. 유하의 시는 일찌감치 키치를 인정하고, 저급하고 경박하다 평가받는 대중문화와 통속예술에서 또 다른 의미를 생성해내는 방식으로 그 널따란 교집합에 자신만의 위치를 점했다. 결국엔 키치가 생활이 되어버린 지금, 유하의 키치는 다시 생명력을 얻어 새로이 읽힌다. 유하는 통속을 소비하는 일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키치에 파묻히지 않고 키치를 영민하게 이용하여, 부끄러움을 스스로가 키치 소비자임을 부정하고 숨기려 드는 사람들의 몫으로 돌린다. 무협소설의 형식을 빌린 ‘무림일기’ 연작과 영화 전개 방식을 차용한 ‘영화 사회학’ 연작 사이사이에 현실을 삽입하며 현실의 결을 드러낸 유하에게, “키치는 삶이고, 그 삶을 반성할 수 없는 중독자의 시다.”

풍자 검법― “지금 여기의 삶이 전부다. 그는 삶 중독자다”
1989년 시집 『무림일기』가 처음 출간되던 무렵, 유하는 감옥에 갈 각오를 했다고 한다. 말 한마디 글 한 줄에 목숨이 위태로운 시대는 이제 지나갔으나, 유하의 풍자가 깊이 와 닿는 것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곧은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폭력적 상황에서 뒤틀어지는 말의 형태”를 풍자라 일컫는다면 그것은 특정 시대와 무관하게 긴요하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진보한다 한들 사회는 언제나 무림과 흡사하다. ‘무림일기’ 연작 속 저열한 무림맹주 “광두일귀”나 최루탄을 쏘아대는 “녹색 갑옷의 무사들”, 중원무림 절정고수를 꿈꾸지만 정작 “닭 잡을 힘도 없”는 허깨비 같은 중원인들은 이름만 달리한 채 세월을 뛰어넘어 2000년대에 이르렀다.
유하의 풍자는 바깥만을 향하지 않는다. 고궁을 걸어 나오며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스스로의 옹졸함에 치를 떨던 김수영의 뜨거움을 천천히 식혀 얼린 것이 유하의 냉소다. 사진관에 놓인 황소의 명함판 사진을 보고 피식 웃다가 “스물여섯 해의 부실한 생애를/품질 좋은 어금니로 함축시키기 위하여,/황소처럼 눈을 땡글땡글 뜨고/명함판 사진을 찍”는(「명함판 사진」) 자신에 대한 옅은 냉소와, 밤바다에서 “소시민적 낭만을 얻기 위해” 모기들과 싸우다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즐거움이란/없다는”(「피서지에서 생긴 일」) 사소한 깨달음 들을 일상에서 시시때때로 발견한다. 유하에게는 “지금 여기의 삶이 전부다. 그에게 여기인 다른 삶이란 없다. 그는 키치 중독자 이전에 삶 중독자다.”(함성호). “자학하지 않고, 패배주의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세태를 풍자하는 데 성공”했던 유하는, 2012년 지금 여기의 “무혈의 대혈겁”을 어떻게 풍자해 어떤 시로 자아낼 것인가.

담장이란 담장은
벽이란 벽은 온통
정치해보겠다는 잘난 얼골들로
도배되어 있다
될 사람을 밀어달라!

일전에 함석헌 옹이 말씀하시길
부득이하게 나서는 게 정치여
요순시절이 따로 있나
그런 때가 요순시절이지

부득이하게 나서는 것과
부득부득 나서겠다는 것은
얼핏 비슷해 보이는데
결과는 영 딴판이다

요순시절과
요망시절

―「요순시절」 전문

목차

제1부 인생 공부
개나리꽃
인생 공부
살아가기
피서지에서 생긴 일

코 코 코
쏙독새
명함판 사진
태풍 속보
우리는 한배를 탔습니다
역시, 적은 아름다운 꽃밭 속에 있습니다
꽥!
꽃이라 불렀는데, 똥이 될 때
오공 시대
반창고를 떼며

제2부 武林일기
武曆18년에서 20년 사이
무협지 작가와의 대화
空心大師
강시 천하
오늘의 전서구
모기떼의 습격
정통종합검법
중원무림 태평천하
소림사의 광두일귀
프로레슬링은 쑈다!
새마을에 관한 나의 고백
교묘한 닭똥집
동작그만, 원위치
알아서 기는 법

어떤 나라시에 관한 기억

제3부 영화 사회학
전함 포템킨
크로커다일 던디
고성의 드라큘라
13일의 금요일
용팔이
돌아온 외팔이
베드룸 윈도우
그로잉 업
벤허
빠삐용
마지막 황제
파리애마
노스탤지아
로보캅
황 노인의 외출
은장도

동시 상영

제4부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그대로 두겠습니다
바람개비
망굴재 주막에서
지금, 쑥국새는
동전 한 닢
들깨밭에서 똥을 누며
바다에서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원조를 찾아서
자동문 앞에서
요순시절
바늘귀
윈드서핑
세상아, 놀자
물뱀 놓치듯
파고다 극장을 지나며

해설|풍자이고 해탈인,·함성호

작가 소개

유하 지음

시인 유하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세종대 영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영화과를 졸업했고, 1988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武林일기』(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1), 『세상의 모든 저녁』(1993),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995),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1999), 『천일마화』(2000)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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