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문학과지성 시인선 R 1
분야 문학과지성 시인선 R
문학과지성 시인선 R
01 이성복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02 유 하 무림일기
03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04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역동적 상상력과 무한한 체험의 반복Répétition,
몸 잃은 거룩한 말들의 부활Résurrection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일련번호 가운데 새로운 기호 ‘R’이 생겨났다. 한국 시의 수준과 다양성을 동시에 측량해 한국 시의 박물관이 되어온 문지시인선이지만 이 완전하고자 하는 노력 밖에서 일어나는 빗발치는 망망한 말의 유랑이 있었음을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거룩한 유랑들이 출판 환경과 개인의 사정으로 독자들에게로 가는 통로가 차단당하는 사정이 있어,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이에 내부에 작은 여백을 열고 이 독립 행성들을 모시고자 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R’. 문지 시인선 번호 어깨 근처에 ‘리본’처럼 달린 R은 직접적으로는 복간reissue을 뜻하며 이 반복répétition이 곧 새로 태어나는 일이기에 부활résurrection의 뜻을 함축한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일련번호 속에서 다문다문 R을 만날 때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낱낱의 꽃잎이 신기한 언어의 화성으로 울리는 광경을 목격하기를 기대한다. 그때쯤이면 되살아난 시집의 고유한 개성적 울림이 시집에 내재된 에너지의 분출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그렇게 수용하고자 한 독자 자신의 역동적 상상력의 작동임을 제 몸의 체험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가장 먼저 만날 문학과지성 시인선 R은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유하의 『무림일기』,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다.
R 01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삶의 풍경들을 분별해나가는 시적 허기의 정체,
인간의 운명과 화해하려는 간절한 열망의 노래
이성복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 첫 출간(열림원, 2003)된 지 십여 년 만에 새 옷을 입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R 시리즈 1번으로 독자 앞에 선보인다. 우리 모두는 익히 1980년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와 함께 이성복의 시가 충격하고 매혹한 한국 현대시사와 한국문학사의 한 장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치욕의 시적 변용”(김현)이라 불리운 그의 시가 상실과 절망, 치욕과 고통, 열망과 환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짙은 체험과 도저한 사유에서 일구어낸 시적 상상력과 현실 형상의 파괴, 폭죽처럼 만개하는 이미지의 파동을 보여줬을 때 그것은 소름이 돋을 만큼 사무치게 우리의 환부로 그리고 영예로 전염되었다. 그 후로도 내내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직관과 삶의 근원, 의혹을 밝히려는 시인의 열망과 성찰의 국면들이 시집 『남해 금산』(1986) 『그 여름의 끝』(1990) 『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3) 『아, 입이 없는 것들』(2003)로 고스란히 들어와 우리 삶의 허기를 달래주곤 했다.
시인은 과연 세상에서 무엇을 보는가, 또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가.
시인이 평소에 좋아하던 외국 시를 인용하고 여기에서 비롯된 시인의 단상과 시적 열망을 기록하고 있는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의 재출간의 의미가 각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를 통해서만 온전히 인간과 세계와 대한 의미 탐색이 가능한 ‘시적 사유’이기에 시인의 시 읽기와 시 쓰기는 따로일 리 없을 것이다. 그간 네르발과 주역 연구,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지드의 『좁은 문』 연구, 산문집과 사진에세이집 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시인 이성복의 체험과 시적 욕망, 감각과 사유의 진폭이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에서는 보다 독특한 시적 형태로 전달된다. 일련번호 1부터 100까지 숫자를 달고 묶인 총 100편의 시들은 대부분 시 본문에서 제목을 취하고, 이들 제목은 각 시에 얽힌 일상의 풍경과 상상의 환영들을 하나의 시구나 문장으로 품어 안으며, 그 중간에는 이 시들을 견인한 이국의 시구와 문장―릴케, 보들레르, 카프카, 프로스트, 만젤쉬땀, 첼란, 로르카, 브레히트, 네루다, 말라르메, 예이츠, 발레리 등―의 파편들이 자리하고 있어 마치 세 개의 문을 통과하는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50
당신은 어느 문으로 나오겠는가
창살 뒤에서
울음 울며 크게 자란
나의 모든 돌과 함께
―파울 첼란, 「쉽볼렛」
붕대로 머리 싸맨 아폴리네르처럼 이끼 낀 돌이 있다. 애초에 괴로울 ‘苦’자를 닮은 돌, 이미 괴로웠던 것 아니고 무작정, 무한정 괴로울 돌. 제 옆의 누구와도 제 괴로움 공유할 수 없다고 겨드랑이까지 팔 치켜올린 돌. 전봇대 가로 막대처럼 제 목을 받치고 깍지 풀지 않는 돌. 비늘 돋은 혓바닥으로 마른 입천장 핥으며 몇 안 되는 이빨을 밀어도 보는 돌. 그러나 돌은 이끼 낀 제 움집에서 빠져 나올 생각이 없다. 온몸이 집이라면 당신은 어느 문으로 나오겠는가.
시인이 그토록 텍스트를 읽고, 세상을 보고,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고자 하는 열망과 이를 말로써 구현하려는 맹목에 가까운 자신의 시적 욕망의 정체를 밝히고자 시작한 작업의 산물이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다. 시인이 “산문의 리듬에 한 마디 말의 뼈”를 세우고, 풍자적인 유머와 반어의 형태로 질문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단호함도 서슴지 않으면서까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이중의 긍정과 부정으로 “사유의 관절을 비틀어 꺾어” 보이는, 바로 “역설의 수사와 이미지들”(‘심재중 해설’에서)로서 가닿고 싶었던 삶과 세상의 풍경, 그 너머의 진실. 세상과의 화해를 갈망하는 시인이 “격렬한 고통”(『남해금산』)의 시 쓰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좀체 사그러들지 않는 시적 열망, 시인의 ‘허기의 정체’, 이 모두가 시집 곳곳에서 파르라한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다.
한 편 한 편, 각각으로도 다시 하나의 전체로도 틈 없이 완결된 구성을 취하고 있는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은 언뜻 간결한 일상 언어의 리듬 속에 겹겹의 이미지와 삶의 상흔―고통, 사랑, 환희, 증오, 끝과 시작이 반복되는 생멸의 의미까지 한데 숨겨놓고 있는 이성복 시에 좀더 친밀하게 접근하는 또 하나의 계기로서, 시인의 일상과 사유의 궤적을 따라 엿보는 흥미로운 사건으로서 기록될 것이다.
1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오, 이것은 존재치 않는 짐승.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면서도 그것을 사랑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 이것은 존재치 않는 짐승」
시의 첫 구절에 무엇이 들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무심코 지나가는 말이거나 심심풀이로 해본 말, 우리가 말하기 전에 말은 제 빛깔과 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 말들의 혼례가 끝나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우리는 정말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목차
시인의 말
1.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2. 풀잎은 약간 시든 채로 풀잎이었다
3. 누이여, 그날 우리가 탄 배는
4. 기다림이 오래 깊어
5. 뭐 그런 소릴 할 수도
6. 내 몸에 떠오르지 않을 물빛
7. 한번 온 적도 없었다는 듯이
8. 짝짓는 일의 고단함이여
9. 눈짓이 없었다
10. 어쩌면 거기 있기나 한 듯이
11.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12. 잔치 국수 하나 해주세요
13. 내게는 오직 한 분
14. 배고픔이란 게 있다
15.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16. 그 순간은 참 길었다
17. 내막이야 잘 모르겠지만
18. 그렇게 소중했던가
19. 왠지 좀 부끄러울 뿐
20.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21. 이 새낀 때릴 데가 없네
22. 내 왼손 가운데 손가락 반지
23. 귀는 위험할 수밖에
24. 다리야, 넌 참 좋겠다
25. 이럴 땐 마냥 속아주기보다
26. 지금은 생이 나를 피해 가는 시절
27. 누군가 짜장면 면발을 틀니로 끊으며
28. 내영혼 흠잡을 데 없네
29. 나는 저 아이들이 좋다
30. 소녀들 철없다
31. 언니라는 말의 배꼽
32. ‘싫어여’, 그건 상주 말이다
33. 우리 애기 옷 하나 해주지
34. 짓던 옷 마저 못 짓고
35.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36. 골목 안 낙원 밥집 딸내미
37. 갑자기 베란다 뒤쪽에서
38. 굵은 소금 등에 처바르고
39. 그저 삥 둘러싸기만 해도
40. 천사들의 판례집
41. 봉분을 만들지 마라
42. 어리석음은 박멸할 수 없는 것
43. 말 한 마디가 척추를 곧추세운다
44. 삶과 죽음이 불편한 자여
45. 보채지 좀 마라
46. 이 들녘에서 누가 우는가
47. 완전 방수의 고무장갑과 달리
48. 밤은 불꽃놀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49. 밤이 나에게 빌려준 힘으로
50. 당신은 어느 문으로 나오겠는가
51. 검다는 것은 갈 데가 없다는 것이다
52. 난 어둠을 믿을 수 없네
53. 영혼의 과일엔 꼭지가 없고
54. 끝내 얼굴에 떠오르는 것
55. 고통의 경계를 표시하려는 것처럼
56. 어떻든 견디기 힘드는 것
57. 사랑은 사랑만을 사랑할 뿐
58. 우리가 안다 해도 조금 아는 것뿐
59. 물은 뭐든 낳고 싶어하는데
60. K와 프리이다의 첫 번째 性
61. K와 프리이다의 두 번재 性
62. 고압의 주문이 걸려 있어서
63. 그것도 부대는 부대다
64. 홍옥의 침묵도, 홍옥의 통곡도
65. 리비도가 배꼽으로 가면
66. 죽음이 권하는 술에는
67. 다만 추억의 할례를 근심할 때
68. 상처받은 새들은 내가 키우겠다
69. 내 귀가 귓밥 몰아내는 소리
70. 내가 마지막 손님은 아니었다
71. 처음 내 눈이 어머니 눈을
72. 칠십년대 유행가 식으로
73. 무슨 天刑인가
74. 애인아, 우리 화해하자
75. 왜 우리가 그를 알아야 하나
76. 꽃피지 말라 하면
77. 어떤 은혜를 말하는가
78. 잊지 못하는 자여, 이제는 잊어라
79. 이래저래 삼십 방
80. 공연히 없는 자두나무 흔들어
81. 잘게 갈라 성냥개비를 만든다는
82. 그는 참 이상한 꿈을 가졌다
83. 떠나려 하면 못 떠난다
84. 쏙아지가 못됐어야 한다
85. 일단 나와 봐야 안다
86. 모든 것은 압력의 차이
87. 무라, 무라
88. 불에는 불 사다리
89. 다단계 사다리 발판 위에서
90. 어디 한번 생각해보자
91. 기도는 협박, 사랑은 봉변
92. 나는 너의 이름을 끊는다
93. 우선, 철저히 부러뜨릴 것
94. 적에게는 눈이 없다
95. 세상에 갈보집은 없다
96. 되도록 안 보는 게 낫다
97. 모든 건 자세의 문제이다
98. 이런 땡초!
99. 放下하라!
100. 별 모양의 열대 과일
해설 | 깊은 오후의 열망 _ 심재중
기획의 말
[한겨레] 시인도 탐낸 자기 책… 절판된 시집들 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