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드는 이 소설로 거대한 자화상을 그렸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앙드레 지드
그의 삶과 예술을 이 한 권에서 결산한다!
발레리, 클로델, 프루스트와 함께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4대 작가로 꼽히는 앙드레 지드가 자신의 유일한 ‘소설roman’이라고 한 『위폐범들』(대산세계문학총서 113)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인생이 제시해주는 모든 것, 인생이 가르쳐주는 모든 것을 한 소설 속에 묶어놓고자 했다”고 밝힌 이 작품은 총 여섯 가정과 다섯 세대에 걸친 4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해 기성세대의 위선, 청소년들의 방황, 세대 간의 갈등, 부부 문제, 동성애, 자살, 부르주아의 허위의식, 문학적 논쟁 등 예술과 삶에 관한 한 사회의 총체적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등장인물에 지드 자신의 삶을 투영한 가장 주관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는 이성에 치우쳐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당시 프랑스 소설의 한계를 넘어 인생과 닮은 진정한 소설을 내놓으려는 작가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위폐범들』은 지드의 소설 미학과 인간 지드의 내면을 이해하는 첫걸음이자 결정본에 해당한다.
한 시대, 인간을 담은 총체 소설
공감으로 이루어진 이 통찰력, 우리에게 시대를 앞서가게 해줄 이 통찰력은 우리에게 금지된 것인가? 장차 앞으로 오게 될 사람들을 초조하게 할 문제들은 과연 어떤 것들일까? 내가 글을 쓰고 싶은 건 바로 그들을 위해서다. 아직 선명히 드러나지 않은 호기심에 양식을 제공하는 것, 아직 명료하지 않은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것, 그리하여 오늘날 어린아이에 불과한 누군가가 훗날 커서, 그가 나아가는 길에서 나를 만나 놀라게 되도록 말이다._본문에서
어느 날 자신이 어머니의 외도로 인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집을 떠난 베르나르. 그는 기지를 발휘해 자신의 친구 올리비에가 사모하는 삼촌인 작가 에두아르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한편 올리비에의 형 뱅상의 아이를 가진 채로 버림받은 로라는 옛 사랑인 에두아르에게 도움을 청하고 에두아르, 로라, 베르나르는 스위스로 여행을 떠난다. 에두아르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질투를 느낀 올리비에는 평소 그를 눈여겨보던 파사방 백작과 함께 여름을 보내게 된다. 한편 올리비에의 동생 조르주는 친구 게리다니졸과 어울리며 위조 금화를 유통한다.
지드는 이 소설을 쓰면서 창작과정을 그대로 담은 『‘위폐범들’ 작품 일지』를 병행해 쓴다. 그 일지 첫 장에서 그는 ‘인생이 제시해주는 모든 것, 인생이 가르쳐주는 모든 것을 한 소설 속에 묶어놓으려’ 한다고 의도를 밝힌다. 한 비평가의 해석에 따르면 51개의 주제를 찾아냈다고 할 정도로 삶 전체를 아우르길 원한 지드는 수많은 인물들을 창조해 온갖 주제를 다루며 다양한 소설 유형을 보여준다. 위폐를 유통하는 집단을 다룬 탐정 소설적 측면, 바칼로레아를 준비하는 청소년들이 방황을 거쳐 삶의 방향을 찾는 성장소설, 여러 쌍이 동시에 보여주는 이성애 및 동성애적 연애소설, 사회 풍속을 보여주는 풍속 소설적 측면, 일확천금을 찾아 아프리카로 떠나는 모험소설의 면모 등, 다양한 소설 유형들이 이 한 작품에 총망라되어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
그러나 단순히 우리 인생이 맞닥뜨리는 다양한 문제를 늘어놓는 데에 멈췄다면 이 작품은 오랜 시간 생명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작품이 독자를 흥분시키는 것은 작가의 날카롭고 시원한 통찰력이다. 한 장, 한 장마다 지드가 심어놓은 누구나 살아오며 한번쯤은 느꼈을 감정들, 생각들은 격언처럼 독자의 가슴을 두드린다. 예술과 인생에 대한 그의 고찰이 담긴 명문은 자아를 찾아 고뇌하는 다음 세대에게 읽히고 싶은 글들이다.
지드 삶의 결산
“어떤 작품도 내 작품보다 더 내적인 문제에서 기인된 것은 없다.”
지드가 이렇게 인생에 대한 통찰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작품이 작가 자신의 내면과 경험에서 나온 진실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50세가 넘도록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지드에게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을 ‘재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세계는 바로 이 자아의 진정한, 그리고 총체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전기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삶의 순간순간 내적 갈등의 한 요소를 떼어내어 소설화한 것인데, 그중에서도 『위폐범들』은 지드의 예술과 삶의 결산이라고 평가받는다.
이 작품에서 지드는 다양한 세대의 여러 인물들을 통해 자기 삶의 각 단계별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기 인생을 총망라하고 있다. 어린 보리스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의 문제들, 자위행위, 아버지의 죽음, 신경증 발병에 얽힌 해석을 제시하고, 로라에 대한 베르나르의 정신적 사랑에는 외사촌누나에 대한 지드 자신의 사랑이 드러난다. 자서전에서 동일 이름으로 등장하는 라페루즈 영감의 경우는 나이 든 지드가 삶에 대해 갖는 아이러니컬한 비판을 비관적 색채로 그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지드는 자신의 다양한 삶의 과정과 주변 인물들을 이 소설에 전부, 그것도 자신을 대변하는 에두아르뿐만 아니라 지엽적 인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등장인물 속에 하나씩 분산시켜, 때론 선명하게, 때론 암시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20세기 초 새로운 소설 장르의 혁신이라는 형식적 탐구의 측면에서 지드의 소설 미학의 결론일 뿐만 아니라, 인간 지드의 내면 탐구라는 측면에서도 종결편이 되었다.
지드 소설 미학의 결론 『위폐범들』
“새 책을 쓰도록 날 유인하는 것은 새로운 인물 유형들이 아니라 그들을 제시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위폐범들』은 지드가 스스로 자신의 ‘유일한 소설roman’이라 분류한 작품으로, 소설 장르 혁신을 위한 지드의 노력의 결실로 평가받는다. 『좁은문』『전원교향곡』 등은 발표 당시 ‘소설’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았으나, 지드는 나중에 이를 ‘레시récit’로 분류했다. ‘레시’란 압축의 미학을 바탕으로, 두 세 명의 제한된 인물들의 내적 갈등을 주로 다루는 비교적 짧은 단선적인 이야기를 말한다. 또한 열 명 남짓한 인물들이 갖가지 모험을 펼치는 『교황청의 지하실』은 중세의 풍자적 전통을 이어받은 유희적 글쓰기인 ‘소티sotie’로 규정했다. 이러한 새로운 장르 규정은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지드의 고민을 드러낸다.
프랑스 고전주의 미학의 근거인 이성과 절제에 과도하게 치우쳐 당시 프랑스 소설이 총체적인 인간의 삶을 드러내기 위한 다양한 관점을 소홀히 한다고 생각한 지드는 인생의 모습과 닮은 진정한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고 이 『위폐범들』을 썼다. 그리고 시점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해 최대한의 서술적 유연성을 실행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내적독백, 자유간접화법, 대화 등을 통한 ‘등장인물의 서술’과 함께 ‘화자의 서술’이라는 전통적인 서술 방식을 보여주었고, 등장인물인 소설가 에두아르의 수첩과 일기, 인물들이 주고받는 13통의 편지와 이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라고 자칭하는 자의 해설까지 다양한 글쓰기의 기법들이 총동원된다.
또한 지드는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소설가 에두아르를 등장시켜 ‘소설 속에서 소설 창작의 모든 문제와 소설론’을 펴고 있다. 전통적 소설의 근간이었던 발자크 스타일의 ‘호적부와 경쟁’하는 사실주의, 그리고 졸라가 대표하는 ‘인생의 단면’을 그리는 자연주의를 부정하고, 총체적 삶을 그리되 일상적인 삶의 모사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추출한다는 지드의 ‘순수소설roman pur’ 이론이 에두아르의 입을 통해 설파된다.
대중적 의미에서 소설적 임무라고 하는 ‘환상의 창조’에는 실패했다는 점에서, 하지만 기법적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실패한 성공작’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지드 스스로 “많은 사람들이 『위폐범들』을 실패한 소설이라 보려고 한다. 20년이 지나기 전에 오늘날 내 책에 대해 비난하는 점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난 그걸 확신한다”라고 했듯이, 이 소설은 30년 뒤 누보로망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문제들을 예고했던 문제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모순 속에서 헤매는 치열했던 지드의 삶에 대한 웅변적인 표현이었다. 그의 삶과 예술의 결산인 이 소설은 삶과 예술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하도록, 각자 자기 존재의 의미를 체험하도록 미래의 독자에게 던지는 하나의 문제 제기였다.
■ 본문 속으로
그 보트에는 나처럼 필사적으로 헤엄치다 구조된 몇몇 사람들까지 합해 마흔 명가량이 빽빽이 타고 있었어. 물은 거의 뱃전까지 차오르고 있었지. 나는 보트 뒤쪽에 있었는데 내가 막 구한 그 여자 아이를 품에 꼭 껴안고 있었어. 그건 그 애 몸을 녹여주기 위해서기도 했으나, 나로선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걸 못 보게 하려고 그랬던 거야. 선원이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도끼를, 다른 사람은 부엌칼을 들고 있었어. 그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 밧줄을 잡고 헤엄쳐 와 우리 배에 올라타려는 사람들 손가락과 손목을 내리치고 있었던 거야. 선원 가운데 하나가(다른 이는 흑인이었어) 추위와 공포, 그리고 끔찍한 두려움에 이를 딱딱 마주치며 떨고 있던 나를 향해 돌아보더니 ‘한 사람만 더 올라타면 우리 모두 끝장나는 거요. 배가 꽉 찼으니까’라고 말하더군. 덧붙여 말하길, 난파를 당하면 모두들 이럴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물론 아무도 그런 얘기는 하지 않는다는 거였어. (83쪽)
처음에는 가장 현대적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상 조만간 가장 케케묵은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 그가 상대하는 건 바로 오늘의 세대이다(물론 어제의 세대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하지만 오늘의 세대만 상대하기 때문에 그가 쓰는 글은 그 세대와 함께 사라질 위험이 있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후세에 살아남는 건 기대하지도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공격을 받을 때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의 유보적 태도에도 반론을 제기하며, 그토록 격렬하게 자기변호를 해대는 것이다. 자기 작품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 느낀다면 작품으로 하여금 스스로 변호하게 내버려두지 그렇게 끊임없이 변호하려 들진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와 부당함을 기뻐할 것이다. 미래의 비평가들에게 그만큼 해결할 실마리를 남겨두는 셈일 테니까 말이다. (98쪽)
이 에피소드는 상당히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 정확성은 이야기를 자세히 늘어놓는 것으로 얻어져서는 안 될 것이며, 정확하게 제자리에 놓인 두세 개의 표현으로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 얻어져야 할 것이다. [……] 그런데 내 시선의 무게가 그의 방향을 다소 엇나가게 만든다. 너무 어리고 아직 분별력이 없는 인격은 곧잘 어떤 태도 뒤에 자신을 숨기고 방어하기 마련이다. 막 형성되고 있는 인간보다 더 관찰하기 어려운 건 없다. 그들을 단지 비스듬히, 옆에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113~14쪽)
그라는 인물은 소심하기 때문에 침묵을 견딜 수 없는 나머지 과장된 이야기를 꺼내 그 침묵을 메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그러고 나선 “전 언제나 당신에게 솔직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 축에 낀다. 아! 그렇지만 중요한 건 자신이 솔직한 것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솔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솔직함이 바로 나를 솔직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122쪽)
공감으로 이루어진 이 통찰력, 우리에게 시대를 앞서가게 해줄 이 통찰력은 우리에게 금지된 것인가? 장차 앞으로 오게 될 사람들을 초조하게 할 문제들은 과연 어떤 것들일까? 내가 글을 쓰고 싶은 건 바로 그들을 위해서다. 아직 선명히 드러나지 않은 호기심에 양식을 제공하는 것, 아직 명료하지 않은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것, 그리하여 오늘날 어린아이에 불과한 누군가가 훗날 커서 그가 나아가는 길에 나를 만나 놀라게 되도록 말이다. (124쪽)
“젊었을 때 나는 무척이나 근엄한 생활을 했지. 내가 유혹을 하나씩 물리칠 때마다 내 성격의 강인함을 자랑스럽게 여기곤 했지. 나 자신이 자유롭게 된다고 여기면서 내가 점점 더 내 자만심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거지. 나 자신에 대한 승리 하나하나가 실은 내 감옥 문을 걸어 잠그는 열쇠였지. 그게 바로 아까 하느님이 날 속였다고 했을 때 내가 말하고자 한 걸세. 하느님은 내게, 내 자만심을 덕성이라고 믿게 하셨어. 하느님은 날 갖고 노신 거야.” (153쪽)
그는 작가들이 흔히 보이는 자만심을 극도로 경멸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자만심을 최선을 다해 잘라버렸다. 하지만 타인의 존경 속에서 자신의 겸손에 대한 원군을 기꺼이 찾고 있었다. 따라서 그런 존경이 보이지 않을라치면 겸손은 곧바로 산산조각 나고 마는 것이었다. 베르나르로부터 존경을 받는 게 그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233쪽)
“제 소설에는 주제가 없어요. 원하신다면 단 하나의 주제는 없다고 해두죠. [……] 그 소설 속에 모든 것을 집어넣고 싶다는 말입니다.[……] 제가 보는 것, 제가 아는 것, 다른 사람들의 인생과 저 자신의 인생이 가르쳐주는 모든 것을 말입니다……” (236쪽)
누군가 지금 제게 어떤 덕목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지 묻는다면 전 주저 없이 답할 거예요. 정직함이라고. 아! 로라! 전 한평생을 살아가며 조그마한 자극에도 맑고 정직하며 진실한 소리를 내고 싶어요. 제가 알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짜 소리를 내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똑같은 가치를 갖는 것, 자신의 가치보다 더 크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 것…… (255쪽)
우리 나이에는 사람들을 너무 엄격하게 평가하고 가차 없이 단죄하는 유감스러운 경향이 있지. 단지 우리가 그 동기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많은 행위들이 비난할 만하고 또 가증스럽기까지 한 것으로 보이는 거야. (268쪽)
“이 젊은이들은[……] 자기네 앞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인생 속으로 달려갑니다. 위험을 모른다는 게 바로 그들에겐 힘을 주죠. 하지만 인생이 어떤 건지 아는 우리는, 자식을 가진 우리는 그들 때문에 겁이 납니다. 우리가 걱정하면 그들은 화를 내죠. 그러니 걱정하는 걸 너무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 때때로 걱정하는 게 도리어 어설프고 성가신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걸 알거든요. 불장난이 위험하다고 아이에게 누누이 되풀이하는 것보다 차라리 불에 약간 데게 하는 게 낫습니다. 경험이 충고보다 더 확실히 가르쳐주죠.”(426쪽)
“어떻게 살 것인가 결정하기를 기다리면서 잘못 살면요?”
“그것조차 자네에겐 교훈이 될 걸세. 그게 올라가는 것이기만 하다면 자기 성향을 따라 내려가도 좋아.”(439쪽)
“악마와 하느님은 단지 하나일 뿐이야. 그 둘은 서로 죽이 맞아. 우린 이 세상에서 나쁜 건 전부 악마에게서 나오는 거라고 믿으려 하지.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우리가 하느님을 용서해줄 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야. 하느님은 우리를 갖고 노는 거야. 마치 고양이가 생쥐를 갖고 놀면서 괴롭히듯…… 그러고 나서도 하느님은 우리더러 여전히 감사하라고 요구하지. 뭘 감사하라는 거지? 뭘……?[……] 하느님이 한 일 중에 가장 끔직한 게 뭔지 아나……? 우리를 구원한다고 자기 아들을 희생한 거요. 자기 아들 말이야! 자기 아들……! 잔인함, 그게 바로 하느님의 첫번째 속성이지.”(485~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