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이런 마음을 가져본 적 없나요?”
여기 아닌 어딘가를 그리며
익숙한 외로움을 매만지는 고단한 일상의 기록
누구나 항아리 속에 숨고픈 시절이 있다는 걸 안다.
그것이 다락이든, 옷장 안이든, 가전제품을 포장했던 상자 안이든,
내 몸에 꼭 맞는 비밀을 간직하고 싶은 나이.
고독이라는 말도 모르면서 괜히 마음이 가라앉고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들.
―「푸른 유리 심장」
2008년, 마흔두 살이 되던 해에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 양진채의 첫 소설집 『푸른 유리 심장』이 출간되었다. 등단작 「나스카 라인」과 『우리시대 좋은 소설』에 선정․수록된 「플러그 꽂는 시간」 외 7편의 작품이 담긴 이번 소설집은 나이에서 배어나는 외로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등단 5년차 소설가로서 내적 성장의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다. 거대한 판타지나 기발하기만 한 서사와는 거리가 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차근차근 우리 곁의 “삶의 무늬를 그려나가는 솜씨”(윤후명)가 돋보이는 『푸른 유리 심장』은, 고단한 일상을 하루하루 밀어내며 사는 ‘우리’가 꿈꿀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다.
“Alone en la vida”, 외롭고 외로운 인생을 그리다
고단해서 평범한 일상. 이렇게 하루가 흐르는구나, 싶다가도 그 하루가 오래오래 쌓이다 보면 급작스레 외로움이 엄습하는 순간이 있다. 양진채의 소설 속 사람들은 찌르는 듯한 외로움을 감내해 좀더 깊고 단단해진 고독을 안고 살아간다. 우체국 직원, 백화점 점원, 과외 선생처럼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예민하며 극도의 외로움을 겪는다. 행동반경이 좁고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는 이들에게는 스팸 메일마저 잘 오지 않고, 휴대전화도 없거나 그나마 있더라도 자기 자신이 보내는 메시지만 간혹 도착할 뿐이다.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없이 속으로만 파고들어 외로움인 줄도 모르게 된 감정은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몸에 꼭 맞는 항아리 속에 쪼그려 앉아 있(「푸른 유리 심장」)거나 대형 종이상자 안에 들어가 아늑함을 느끼는(「나스카 라인」) 것은 고독을 몰랐던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방증일 것이다. 불안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여 함께 있는 사람에게 의존하고, 떠날까 두려워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정황을 외면하는가 하면( 「도둑」) 배우자의 뺑소니를 지켜보고도 잘못된 복수로 스스로만 망가뜨린다(「누군가 있다」). 크고 작은 삶의 파열 앞에서 너무도 쉽게 무너져버리는 다분히 신경증적인 등장인물들은 간신히 밥벌이는 하고 있지만 삶을 헤쳐 나가기엔 미성숙하다.
나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자주 그 갈피에 숨은 의미를 해독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말을 이해했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이해 못 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끔 옹알이할 때가 제일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몽돌 같은 그 옹알거림을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아들었을 테니까. 말 대신, 옹알거림으로, 눈빛으로 얘기할 순 없는 건가? 세상은 너무 시끄러워. 나는 말이 어긋날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스카 라인」
여기 아닌 어딘가, 지금 아닌 언젠가, 내가 아닌 누군가를 꿈꾸다
양진채는 미성숙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상처를 헤집기보다는 그들의 외로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여기 아닌 어딘가’를 꿈꾸게 하여 위안을 주는 방식을 선택한다. 양진채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절망적인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지금’ ‘여기’ ‘내’가 아닌 어딘가, 언젠가, 누군가를 향해 떠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연인이 “도대체 너를 모르겠”다며 헤어지자고 할 때 “무슨 말을 해야 내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해 제대로 말 한마디 못 해보고 보내야 했던 「나스카 라인」의 주인공은 책에서 우연히 자신이 혼자 그려왔던 그림과 많이 닮아 있는 나스카 문양을 발견한 뒤, 이어지는 작품 「파르초」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페루로 떠난다. 본연의 모습을 잃고 길들여진 채 일하는 「푸른 유리 심장」의 주인공도, 연인 ‘그’와 그를 닮은 코끼리를 보러 태국으로 간다. 굳이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어딘가로 떠나지 않더라도 엇나가게 표출한 감정의 가면 밑에 숨기도 하고(「도둑」), 지인의 남편과 사랑을 나누는 공상으로 빠져들며(「봄날의 테이블보」) 스스로를 위로한다.
당신. 사실 이렇게 부르고 나니 갑자기 입안이 시원해진 느낌입니다. 입안에 갇혀 있던 당신이란 단어를 이제야 풀어놓습니다. 당신에게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호칭입니다. 당신이 이 호칭을 듣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라니. 이와 비슷하게 불릴 만큼 가깝기나 했나 하고요. 당신은 제 속에서만 자랐습니다.
―「봄날의 테이블보」
지금, 여기, 나라는 ‘현실’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은 죽음일 테다. 양진채의 소설 곳곳에는 죽음이 깔려 있다. 자신이나 곁에 있는 사람의 죽음 언저리에서 방황하든 제삼자의 죽음을 목도하든, “죽음을 정면에서 다루든 하나의 배경으로 다루든 죽음의 그림자는 떠나지 않는다”(이경재). 여행, 공상, 글쓰기, 죽음으로 불완전한 안정을 얻은 등장인물들은 미약하게나마 성장한다. 죽음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플러그 꽂는 시간」(고독사)과 「파르초」(시한부 삶)에 이르러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으려 하기보단 자신이 타인의 외로움을 보듬어주는 비교적 성숙한 인간형이 등장하는 것이다. 두 작품이 작가의 최근작이라는 사실이 작품집 안에서 성장하는 인간관을 지켜보는 묘미를 더한다.
소박한 문장들이 한데 모여 안개처럼 퍼지는 색채의 통일감이 돋보이는 『푸른 유리 심장』. 짜릿하고 기발한 소설들의 향연 한켠에,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파열을 보여주는 공들여 차린 옛날 밥상을 닮은 이 소설집 한 권이 놓이게 될 것이다.
양진채의 ‘푸른 유리 심장’은 소설이다. 현실의 맹독을 거침없이 자신의 몸에 쌓은 후에, 그것도 모자라 분신(焚身)과도 같은 고통을 더 겪은 다음에야 비로소 얻게 되는 결정물이다. 그 고통은 무엇과도 비교 불가능한 지극한 행복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내용화된 형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잘 빚어진 항아리의 전범이다. 양진채는 한국문학의 소설 미학을 갱신해나가고 있는 순수한 빛깔 중 하나다. _이경재(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자고 일어난 아들이 내 옆에 와서 말했다.
요즘 자꾸 날개가 돋는 꿈을 꿔. 어떤 때는 날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못 날기도 하는데 조정 기술이 좀 필요해. 귀를 움직일 때처럼 잘 되기도 하고, 영 안 되기도 하거든.
그 꿈을 샀다.
아마도 오랫동안, 일부러 맹독이 있는 용만 잡아먹고, 결국엔 독이 쌓인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가루다, 그 불탄 자리에 남는다는 푸른 유리 심장을 꿈꿔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 저 어두운 밤바다, 골씨를 따라 이름 없는 포구로 들어오는 고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도록 헤엄쳐갈 것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내 책이 나오길 기다려주었다. 문득 고맙고 든든하다. ‘첫’의 설렘과 상큼함은 내 책을 궁금해했던 이들 몫이다. 나는 그 뒤에 있을 고통과 번뇌를 감당하겠다.
부르고 싶은 이름이 아주 많아서 결국 아무 이름도 쓰지 못함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박 ․ 윤 ․ 문 ․ 신 ․ 조 ․ 최 ․ 김 ․ 이 등. ‘소주한병’. 그대들은 내게 쓴맛과 달콤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오래도록 함께 가길 빈다.
첫 소설집을 내준 문학과지성사, 해설을 써준 이경재 평론가, 이민희 편집자께 각별한 고마움을 전한다. 평생 잊지 않겠다.
등단했을 때, 한 시인이 선물로 도장을 새겨주었다. 첫 소설집이 나오면 서명할 때 꼭 이름 옆에 붉은 인주를 묻혀 찍으리라 다짐했다. 그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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