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쓴다.”
찰나의 기척, 고요한 침묵을 가장 뜨겁게 새기는
작가 한 강의 세번째 소설집
1993년 등단한 이래 줄곧, 삶의 근원에 자리한 인간 본연의 고독과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에의 추구와 삶을 향한 의지를 특유의 단단하고 시정 어린 문체로 그려온 작가 한강이 『내 여자의 열매』(2000) 이후 무려 12년 만에 세번째 소설집 『노랑무늬영원』(문학과지성사, 2012)을 출간했다. 작가가 2002년 여름부터 일곱 달에 걸쳐 쓴 중편 「노랑무늬영원」을 포함해 2012년 여름에 이르도록 쓰고 발표한 총 7편의 작품을 묶은 이번 소설집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수십 번 계절이 바뀌는 동안 존재의 근원과 실재 세계를 탐문하는 작가의 온 힘과 온 감각이 고통 속에 혹은 고통이 통과한 자취에 머물렀고 그 결과로 우리는 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2002), 『채식주의자』(2007), 『바람이 분다, 가라』(2010), 『희랍어 시간』(2011) 등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는 중에 각각의 장편들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조응하는 중편과 단편들이 씌어졌고 고스란히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에 담겼다.
“막 소설 한 편이 끝나려고 할 때,
괄호 속에 들어가 있던 모든 것이 둑을 넘듯 조용히 몸속으로 다시 흘러 들어올 때,
언제나 나는 더 머뭇거리고 싶어진다.
더 쓰고 싶어진다. 더 숨을 불어넣고 싶어진다.” _한 강
“두 눈을 시큰하게 하는 빛, 생리적인 눈물이 고이게 하는 빛, 어른어른 마성이 피어오르는 빛”(「훈자」) 속을 달리며 액셀과 브레이크를 교차로 밟고, 욕설과 기도를 절반씩 섞어 뇌까리는 당신이 “내가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은 내 삶이야”(「훈자」)라며 스스로를 거칠게 몰아세우면서도 잊지 않는 것은 “제발, 잘못되지 말아줘”라는 당부이다. 화자가 습관처럼 떠올리고 그 미명에 붙들리게 되는, 천 년 전에 멸망한 산간 지방의 오지, 훈자도 실은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해독 불가의 문자나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악몽, 상상 속 고통의 다른 이름이다. 오랜 기억 속의 풀리지 않는 의문들 앞에서 “끈덕지고 뜨거운 그 질문들을 악물고 새벽까지 뒤척”(「회복하는 인간」)이는 당신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입속으로 되뇌는 중얼거림 역시 역설적으로 회복된 생을 갈구하기는 마찬가지다.
때로는 “격렬한 감정들의 파고”(「노랑무늬영원」)를 타고 넘으면서 작가 한강은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하나를 꽉 쥐고 놓지 않는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훼손된 신체의 일부가 압도하는 삶의 나락(「왼손」)에서, 비껴간 인연의 운명에서, 영원히 묻히고 말 기억에서, 파란 물속 같은 꿈에서 “부서진 두 손으로” 한강이 길어 올리는 것은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재생의 의지와 절망 속에서 더 뜨겁게 타오르는 강한 생명력이다.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질 수 없을 차가움” (「에우로파」에서)
두 인물 사이에 오가는 은밀한 교감―이상한 열기와 집요함(「에우로파」) 곁에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몸속 혈관처럼 실재 세계의 근원을 더듬는 목소리가 짓는 노래도, “한차례 파도가 밀려 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랫벌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파란 돌」)도 한결같다. 영원과 무한,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 치르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파편―결락과 고통, 고독과 슬픔은 결국 내가, 당신이 사랑하게 하고 살아 있게 하는 힘이 된다.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던져버린,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들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 그것을 겪으려면. 그것을 견디려면, 그것으로 들어 올려지려면…… 그것이, 되려면 말입니다.” (「노랑무늬영원」에서)
강하게 빛나는 불순물 없는 노랑을 좇아 겹쳐놓은 한지에 물감을 찍듯, 한강의 문장은 “한순간의 빛, 떨림, 들이마신 숨, 물의 정적”을 원고 위에 재현한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질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경험과 관념을 압도하는 작가의 직관은 물감이 올올이 종이의 결 속으로 스미듯 독자인 우리에게 전해진다. 삶과 죽음의 경계, 인간의 광기와 욕망의 실체, 존재론과 예술론에 대한 작가의 오롯한 응시는 치열한 사유와 식물적 상상력 그리고 섬세한 언어 탐구까지 더해져, 시적이고 직관적이며 밀도 높은 한강만의 ‘소설 미학’을 더욱더 단단하게 하고 있다.
“한강의 소설은 아무리 겪어도 무뎌지지 않는 고통 속으로 영원 회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어둠 속에 한 줌의 희미한 빛이 구원처럼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억지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낙망과 두려움을 거친 후에야 서서히 번져 오는 깊고 맑은 빛. 그것이 그녀의 소설을 고통으로 찍어낸 ‘빛의 지문(指紋)’으로 보이게 한다. 세상에는 너무 아프고 아파 기어코 아름다워지는 참혹한 미(美)도 있다는 것을 나는 한강의 소설을 읽으며 처음 깨달았다.” _강지희(문학평론가)
“한강의 소설적 시선은 시간을 앞서 나가 현실 속의 미래를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그 흐름 뒤에 남겨진 사람들을 향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시선으로 한강은 광기로 자신을 표현하던 여성들,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재현되던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그와 같은 젠더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는 과정을, 마치 한 가지 오브제로 평생에 걸친 작업을 하는 장인의 스타일로 서사화하고 있다. ‘식물이 자라는 속도로 글쓰기’의 방식을 통해 한강 소설은 우리에게 문학이 우리 삶에서 갖는 본연적인 기능과 의미를 새삼 일깨우고 있다.”
_손정수(문학평론가)
■ 작품 속으로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 속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밝아지기 전에」에서
이렇게 더 작아져간다. 더 지워지고 뭉개어진다. 다만 이상한 것은, 모든 것이 뭉개어지는 데 비례하여 오히려 감각들은 선명하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회칼처럼 예리해진, 예전에는 가져본 적 없었던 눈과 귀와 코와 피부와 혀의 감각들을 느낀다. 그리고 그보다 명징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 육체에서라고도, 영혼에서라고도 할 수 없는, 그것들이 분리될 수 없는 어떤 부분에서 뻗어 나온, 무섭도록 절실한 촉수를 느낀다.
-「노랑무늬영원」에서
밤의 나무들은 여전히 검고 묵묵합니다.
얼마 안 있어 검푸른 새벽빛이 내리기 시작하면, 두렵도록 비밀스러운 저 내부가 소리 없이 열리며 나무들의 형상과 하나가 되겠지요. 그 짧은 시간을 건너 아침이 오겠지요. 어떤 비밀 따위도 애초에 없었다는 듯 태연히 서 있는 나무들이 남겠지요. 언젠가, 그 경계에 귀신처럼 서 있는 새벽 나무를 그리고 싶습니다.
[…]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라구.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걸어갔지. 개울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물이 맑은데, 돌들이 보이더라구.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정말 예뻤지. 그중에서도 파란빛 도는 돌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주우려고 손을 뻗었어.
[…]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파란 돌」에서
■ 작가의 말
십이 년 만에 소설집을 묶는다.
긴 시간에 걸쳐 있는 소설들이어서인지, 책을 묶는 일이 어떤 작별처럼 무겁고도 홀가분하다.
단편은 성냥 불꽃 같은 데가 있다.
먼저 불을 당기고, 그게 꺼질 때까지 온 힘으로 지켜본다.
그 순간들이 힘껏 내 등을 앞으로 떠밀어줬다.
회복하는 인간 9
훈자 35
에우로파 59
밝아지기 전에 97
왼손 131
파란 돌 189
노랑무늬영원 217
작가의 말 308
[국민일보] 노란 태양빛에 상처를 드러내다… 한강 세 번째 소설집 ‘노랑무늬영원’
[매일경제] 소설집 ‘노랑무늬영원’ 낸 한강
[한겨레21] 새벽까지 심장 타는 냄새
[한국일보] 인간의 근원과 고독에 대한 성찰… 12년 만에 만난 한강, 여전하다
[한국경제] 상처받은 삶은 꽤 예민하다… 그래서 살아갈 이유가 된다
[한겨레] 잘린 앞발 돋아나는 도마뱀에서 본 희망
[서울신문] ‘성냥 불꽃’을 닮은 중·단편 7편을 묶다
[세계일보] 인간의 상처받은 내면을 눈앞서 지켜보는 듯
[동아일보] 손톱이 자라듯 달이 차듯 상처도 아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