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사랑을 했고,
그녀는 죄를 지었고,
그것은 서로 다른 마음이 하는 일이었다.”
지옥만큼 힘겹고 질긴 사랑!
주체할 수 없는 격정으로 파멸해가는 한 여인을 그린
피에르 장 주브의 대표작 국내 최초 출간
영혼의 불안과 방황을 그려낸 독특한 시세계로 주목받았던 시인 피에르 장 주브. 주브 스스로 부정한 초기 작품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그의 첫 소설이라 할 수 있는 『파울리나 1880』(문학과지성사, 2012)이 대산세계문학총서의 112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으로서 더 유명했으나 “시의 하늘에서 내려와 현실의 땅에서 소설을 쓰고 싶었다”던 자신의 말대로, 주브는 문학을 통해 추구하던 영적(靈的) 세계를 소설에서 한층 더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 그중에서도『파울리나 1880』은 주브의 삶과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죄의식과 쾌락이 뒤엉킨 사랑”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작이다. 사회 속에서 정체성을 지니는 리얼리즘 소설의 인물들과 달리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하나의 상징적 공간이 되기를 원했던 피에르 장 주브. 도발적인 시선으로 인간 무의식의 심연을 탐색한 주브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뒤엉켜 투쟁을 벌이는 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정념(情念)과 죄의식
– 어렸을 때부터 나는 둘이었고, 그런 나 자신이 무서웠다._본문 중에서
19세기 이탈리아. 보수적인 엄격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숨길 수 없는 열정을 타고난 파울리나. “순결하고 온화”하지만 “밤의 그림자를 닮은” 눈길을 지닌 파울리나는 유년기부터 종교적 열정과 쾌락이라는 상반되는 두 힘에 끌린다. 아내가 있는 미켈레 칸타리니 백작과 사랑에 빠진 그녀는 종교의 빛을 갈구하면서도 쾌락에 탐닉한다. 결국 그녀가 다가가는 종교의 빛에는 늘 어둠이 드리워지고 그녀를 사로잡은 사랑의 쾌락에는 언제나 죄의식이 어린다. 그리하여 그녀의 삶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아버지와 연인의 아내라는 두 금기(禁忌)의 짐을 지고 이어지던 사랑은 두 사람이 죽고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오히려 파국으로 치닫는다.
늘 자신의 사랑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고 있던 파울리나는 미켈레의 청혼을 피해 “가장 은밀하고 또 가장 평화로운 교단”인 성모방문회 수녀원으로 들어가지만, 파울리나가 추구하는 영성(靈性)은 결코 육체의 쾌락과 분리되지 않는다. 파울리나에게 종교적 환희는 성적 환희와 하나이며, 수녀원에서 파울리나가 행하는 고행은 마조히즘적 쾌락의 모습을 띤다. 그리고 피난처였던 수녀원에서 쫓겨나 미켈레를 다시 만난 파울리나는 마침내 마조히즘적 갈망을 살인과 자살이라는 파괴적 행위를 통해 실현한다.
작가의 삶이 드러나는 대표작 『파울리나 1880』
삶의 경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작가의 작품세계에 자리를 남기게 된다. 주브가 작품에서 그린 강렬한 세계관 역시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젊은 시절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주의 시세계에 심취했고 위나니미슴 문학 운동에 참여했던 주브는 30대 중반에 정신분석가인 블랑슈 르베르숑과 사랑에 빠지면서, 그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주브는 블랑슈 르베르숑을 통해 프로이트의 이론에 눈을 뜨고 종교적 신비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과거의 삶, 과거의 작품세계와 결별하고, 심지어 이전에 쓴 자기 작품을 모두 부정한 주브는, 이후 평생의 관심사가 된 죄악 ‧ 성(性) ‧ 죽음 등의 주제에 천착했다. 장성한 후 스스로 선택한 삶의 두 가지 틀, 프로이트의 이론과 종교적 성향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렇게 30대 중반, 스스로 “새로운 삶”이라 부른 두번째 삶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쓴 소설이 『파울리나 1880』이다.
작품 속 세계의 강렬함을 형상화하는 실험적 형식
소설 『파울리나 1880』의 매력은 작품 내용의 강렬함뿐 아니라 그 강렬함을 형상화하는 특유의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장(章)’이라고 부르기도 모호한 119개나 되는 짧은 장들로 이루어지는데(대부분 3페이지 내외이고, 심지어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장도 있다), 각각의 사건은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일관성 있게 연결되지 않고 수없이 끊어졌다 이어진다. 그리고 주인공이 겪는 중요한 내적 변화들은 많은 경우 상세히 묘사되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진 그 부분에 가려져 있다. 또한 직접적으로 이야기된 사건들 역시 하나의 흐름으로 서술되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진 채 여러 번 덧칠하며 진행된다. 그리하여 핵심적인 사건일수록 희미하게 그려지고, 모호한 암시들이 덧칠된 이후에야 전체 모습이 윤곽을 드러낸다.
또한 주어와 동사가 연결된 완전한 문장이 아닌 섬처럼 흩어져 있는 명사들, 감정이 응축된 부사들의 반복, 화자의 말 도중에 불쑥 솟아오르는 인물의 목소리, 이 모든 것이 흩어져 있지만 밑바닥에서 긴밀하게 연결된 사건들이 갖는 감정의 밀도를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이렇게 여백과 생략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독자들은 독서를 통해 이야기를 재구성함으로써만 이야기의 조각들 사이에 가려져 있는 흐릿한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 장르의 ‘디에제시스Diegesis’를 무너뜨리는 실험적 시도를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독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 본문 속으로
대개 저녁 무렵에 우리는, 오늘처럼 실편백 숲에 파묻혀, 『신곡』을, 「지옥」 편과 「천국」 편의 일부를 읽었고, 읽고 읊었고, 그 이후 나는 이 세상보다 더 거대한, 더 끔찍한, 더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곡』 이후 모든 게 변했고, 삶은 더 이상 어린애의 삶이 아니었고, 선한 삶이 아니었다. _45~46쪽
파울리나는 천성적으로 ‘나폴리의 베수비오 화산처럼’ 불과 수증기뿐이어서, 즐거울 때면 눈앞에 하늘이 열리는 것 같았고 슬플 때면 바로 그날 밤 몸을 던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호수 제일 깊은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매번 주어진 역할에 온전히 충실했고 그야말로 진심을 다했다. _49쪽
난 내 사랑을 속이지 않을 거야. 사랑은 내 목숨과도 같아. 기다리던 사랑이 눈앞에 있잖아. 사랑이 내 앞에 있어. 선택해, 선택해.
그녀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_64~65쪽
파울리나는 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격정적으로 갈구했다. 하지만 똑같은 격정으로 그녀를 사로잡은 정념 역시 절대 포기하지 못했다. _92쪽
“나를 지옥으로 던진다고? 그분의 선하심이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길. 하지만 정말로 신이 나를 지옥으로 던진다면 나는 두 팔로 신을 감싸 안으리라. 한 팔은 진정 겸허하게 그분의 밑으로 밀어 넣고 그래서 나와 그분의 성스러운 인격이 하나가 되게 하리라. 그리고 오른팔로는, 그 신성함과 하나가 되게 해줄 사랑의 팔로는, 그분을 꼭 껴안아 함께 지옥으로 가리라.” _138쪽
파울리나 판돌피니.
1849년 6월 14일 밀라노에서 출생. 마리오 주세페 판돌피니와 그 아내 루치아 카롤리나의 막내딸.
독신, 무직.
1877년부터 1879년까지 만토바의 성모 방문 수녀원에서 수련 수녀로 지냄.
1880년 8월 28일 피렌체에서 정부(情夫)인 미켈레 칸타리니 백작을 살해함.
1881년 4월 12일 자로 피렌체 법정에서 25년 형을 선고받음. 토리노의 감옥에서 형을 살다가 1891년 6월 15일 사면됨. _242쪽
푸른 방 / 토라노 / 1870~1876 / 성모 방문 / 검푸른 천사 / 햇빛에서
옮긴이 해설 ‧ 지옥만큼 힘겹고 질긴 사랑
작가 연보
기획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