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철학과 김상환 교수의 10년 만의 신작!
—세계화의 무대 위에서 부르는 인문학의 노래, “나는 철학자다”
서울대 철학과 김상환 교수의 신작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헤겔 만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현대의 지성’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서양 철학에 대한 단순 개괄이나 잘 정리된 해설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철학자 김상환의 본격 이론서로, 저자는 이 두툼한 한 권의 책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철학적 세계를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전작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2002)를 통해 동서 사상사를 꿰뚫는 새로운 관점으로 “계사 존재론”을 내세우며 독자적인 철학적 행보를 시작한 김상환의 논의는 이 책에서 한층 더 확장되고 심화되었다. 이와 같이 동서양의 정신을 포괄하는 제3의 정신을 찾는다는 저자의 야심찬 기획은 단순히 자생적 철학을 일구어내겠다는 저자의 개인적 야심이 아닌, 문명사적 요구에 응답하기 위한 시대정신의 발로다.
저자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국가, 계급, 인종 등을 가르던 경계들이 점점 뒤엉키거나 무력화되고 있다. 세계화 시대란 기존의 현실을 규정하던 수많은 구별의 선들이 자본과 테크놀로지의 보편성 안에서 추상화되는 시대다.” 그러나 “추상화된다는 것은 소멸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롭게 그려지기 위해 보류의 상태에 놓인다는 것뿐이다…… 어떤 엉클어짐, 유례를 찾기 힘든 엉클어짐에서 비롯되는 아우성. 이 소리 없는 아우성은 오늘의 인문학에 대하여 위기이자 또한 기회일 수 있다.”
이렇듯 저자는 모든 것이 동요하고 기존의 질서가 뒤얽히며 미증유의 변화를 겪는 이 시대가 인문학이 처한 위기인 동시에 “미래의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출발점”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저자의 귀에 오늘날 인문학자들에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적 요구는 진짜 철학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요구, 다름 아닌 「나는 철학자다」에 참여하라는 요구처럼 들린다. “지식생산의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나 비판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현재의 인문학에서 벗어나, 인문학의 존엄을 직접 증명해 보이라는 요구. 이 책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한 철학자 김상환의 적극적인 응답이다.
헤겔 만가輓歌, 상여를 메고 부르는 비탄의 노래
그동안 꾸준히 동양과 서양의 사유를 아우르며 양자를 뛰어넘는 새로운 길, 제3의 정신을 모색해온 김상환의 문제의식은 이번 책에서 더욱 깊이와 밀도를 더했다. 동서양의 사유를 상호 번역하는 수준과 그 폭도 변화를 겪었으며, 한편에 플라톤 이래의 서양 전통 철학과 해체론의 흐름이, 다른 한편에는 『주역』에서 발원하는 동양 사상의 전통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짜인 텍스트는 더욱 촘촘해졌으면서도 더욱 넓은 외연을 망라한다. 600여 쪽의 두께에 담긴 밀도 높은 열일곱 편의 글들은 저자의 깊이 모를 사유의 폭과 그 진정성을 짐작케 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인문적 상상력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인간, 언어, 역사 등 인문학의 구심점을 이루는 사태들에 대해 두루 언급하는 한편, 이 사태들을 상호 교차 및 삼투시키면서 새로운 인문주의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가 “헤겔 만가”인 것은 헤겔의 역사적 위치 때문이다. 20세기 후반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탈서양 담론이나 탈근대 담론은 헤겔 철학을 저승으로 보내기 위한 만가였다. 이번에는 우리의 자생적 인문학 담론이 그 상여를 대신 멜 차례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저자의 인식이다. 그것은 “서양의 정신을 절대화하기 위해 동양의 정신을 살해, 애도, 매장했던 장본인”이 바로 헤겔이었으며, 이후 서양의 해체론이 향하는 듯 보이는 철학의 동쪽이 실은 서쪽의 서쪽이었다는 자각에서 비롯됐다.
서양 철학의 꽁무니를 쫓기보다 동서양을 뛰어넘는 새로운 정신을 찾고자 하는 철학자 김상환이 본격적인 무대 위에 오르기 전 부르는 노래는 다름 아닌 “헤겔 만가”다.
Stand By Your Man! 이것이 인문학의 노래다
“당신의 사람 곁에 서세요.” 본격적으로 무대 위에 오른 철학자 김상환은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노래라고 말한다. 인문학의 본성은 사람 옆에 서는 데 있고, 그 옆을 지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위치, 그 정체성이 확인되는 장소는 다름 아닌 인간의 옆 혹은 곁이다. 인문학은 사람 곁을 떠나지 말라는 명법 아래에서 탄생했고, 그 명법을 따르는 한에서 비로소 인문학일 수 있다.
이는 인문학의 본성이 단순히 인간의 존엄을 증명하는 데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문학은 무엇보다 상상력의 차원에서 사물 옆으로 비스듬히 서는 습성이 있고, 이 점에서 다른 종류의 학문과 구별된다. 저자는 인문학에 대한 독창적인 글을 남긴 이태수 교수의 말을 빌려 자연학에서 주체와 대상이 ‘직지향’의 관계에 있다면, 인문학에서 그 관계는 ‘사지향’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직지향의 사고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외시의미라면, 사지향의 사고는 주체가 처한 상황과 판단의 주관적 계기 일반을 함축하는 함축의미를 추구한다. 사랑이 넘치는 눈이나 욕망으로 들끓는 눈은 대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관심하고 중립적인 시선, 이른바 객관적인 시선에는 아무 의미가 없던 대상이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위대한 발견이나 창조도 이런 역설을 따른다. 새로운 진리는 기존의 논리와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이 제대로 보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점을 일탈한 시각, 기존의 관점을 기준으로 할 때는 삐딱한 시각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던지는 탁월한 철학적 물음, 인문적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동서양 사상을 포괄하며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문주의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는 저자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대과大過시대’라 명명할 수 있다. 이는 저자가 『주역』에서 끌어낸 시대진단으로 “어떤 안정된 척도로 질서가 조직되는 시대가 아니라 척도 자체가 흔들리고 굴절되는 시대, 위대한 개혁을 기다리는 과도기”의 시대를 일컫는다. 물질적 풍요가 기술적․정신적 풍요로 이어지며 마침내 기존의 제도적 질서를 초과하는 시대로, 다시 말해 “새로운 인문적 교양의 탄생”이 요구되는 시기인 것이다.
이 책은 다름 아닌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철학자 김상환의 독창적인 이론서다. 도대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괴로운 침잠을 강요하고 철학자의 위치로 납치해가는 물음, 이 탁월한 철학적 물음 앞에서 저자는 “모기만 한 소리라 해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자신의 노래를 시작”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문적 상상력의 발원지인 인간의 내면성 혹은 내면적 인간성은 홀로 발아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대타자) 옆에 서야만 비로소 자기 고유의 차원을 획득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인문적 상상력은 “엄마 곁과 같이 세계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가늠할 수 있는 어떤 원초적인 장소를 찾고 또 지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서양 인문주의의 역사적 기원에 있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그런 장소를 고전 문헌에서 찾았으며, 동양 인문주의의 역사 또한 철두철미 고전 주석의 역사였다. 그것은 바로 전승되는 위대한 언어야말로 엄마 곁과 같은 장소, 나아가 인간 일반의 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꾸준히 “동서 존재론의 바탕을 한데 얽을 실마리”로서 계사 존재론을 제시하며 동서양을 뛰어넘는 제3의 정신을 추구해온 저자의 작업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다름 아닌 “미래의 인문적 상상력은 동양 고전의 주요 장면 속에서 서양 사상사의 위대한 성취를 생생하게 회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나 들뢰즈․과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서 모습을 드러낸 존재론적 계사를 『주역』의 계사와 함께 엮어나갈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철학과 더불어 비로소 완결된 모습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은 그런 미래의 인문적 상상력에 부응하는 철학적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시도이자 실험으로, 독자들에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인문적 사유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책이다. 특히 동서양의 철학 사상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박학다식과 전체를 굽어보는 조망의 높이, 동서를 갈라놓는 심연을 훌쩍 뛰어넘는 통찰력, 텍스트의 정치함과 세심함, 문인 못지않은 유려한 글쓰기는 이 책이 가진 큰 미덕이기도 하다.
■ 책 속으로
인문학은 무엇보다 상상력의 차원에서 사물 옆으로 비스듬히 서는 습성이 있고, 이 점에서 다른 종류의 학문과 구별된다. 인문학에 관하여 독창적인 글을 남긴 이태수 교수에 따르면, 자연학에서 주체와 대상은 직지향intentio recta의 관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인문학에서 그 관계는 사지향intentio obliqua에서 시작된다. 바로 이것이 인문적 사유의 유별난 특징이자 한계다. 〔……〕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2막 2장 도입부)에는 “슬픔에 잠긴 눈은 눈물로 흐려져 단 하나의 사물도 여러 개로 보이는 법입니다. 마치 사선 원근법 화면과 같이 그것을 정면으로 보면 무엇인지 가릴 수 없지만, 비스듬히 삐딱하게 보면 그 형태가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어떤 대상은 역설적으로 눈물 같은 것 때문에 강요된 사지향의 시선에서만 비로소 똑바로 나타난다. 반면 맨눈으로는 오히려 맹점으로 보일 뿐이다. 사랑이 넘치는 눈이나 욕망으로 들끓는 눈도 대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관심하고 중립적인 시선, 이른바 객관적인 시선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던 대상이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위대한 발견이나 창조라는 것도 이런 역설을 따를 것이다. 새로운 진리는 기존의 논리와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이 제대로 보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점을 일탈한 시각, 기존의 관점을 기준으로 할 때는 삐딱한 시각에 서야 한다. 그러므로 위대한 창조자를 지칭하는 천재는 하늘이 부여한 재능이라기보다 경험의 세계에서 강제된 재능일 수 있다. 어떤 후천적인 조건이나 환경 때문에 사시斜視의 수난을 통과해야 하는 비극적 주체가 천재 아닐까? (「프롤로그」, 12, 20~2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에서 체계적인 정념론은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처음 등장할 수 있었다. 자연에 대한 수학적 해석을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하면서 근대적 세계관의 초석을 놓은 데카르트가 정념에 대한 이론적 탐구의 길을 연 최초의 철학자다.
데카르트가 개척한 이 길은 이후의 철학자들에 의해 때로는 더 멀리, 때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어져 갔다. 스피노자, 칸트, 프로이트, 들뢰즈 등은 이런 정념의 역사에서 빛을 발하는 이정표다. 이 이정표는 칸트-푸코적인 의미의 인간학이 탄생, 소멸하는 과정과 겹친다. 그것은 근대적 인간의 개념이 어떤 상승과 하강의 주기를 거쳐 다시 박제화되기에 이르는 여정과 같다. 하지만 그 부침의 여정 속에서도 정념의 위상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왔다. 인간학의 종언이 선언되는 시점에서도 정념은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을 구성하는 적극적인 요소로 긍정되고 있다. 인간을 보려거든 우선 정념을 보라. 이것이 어쩌면 서양의 인간학이 도달한 마지막 결론인지도 모른다. 인문학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면, 인간의 중심에는 정념이 있다. (제1부 1장 「데카르트의 정념론과 그 이후」, 27~28쪽)
새롭고 신선한 자극을 유발하는 사물이 위대해 보이거나 왜소해 보인다면, “이 두 정념은 일반적으로 모든 종류의 대상에 관계할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특히 주목하고자 했던 것은 이 존중과 멸시가 우리 자신에게로 향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의식이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는 인격적인 외형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다. “사람들의 표정이며 몸짓, 걸음걸이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거동”은 그런 자기평가에서 비롯된다. 의식의 자기관계는 의식의 빛깔뿐만 아니라 의식의 대상관계 일반을 조율하는 위치에 있다. 의식의 대상관계(직지향)는 의식이 자기관계에 의해 굴절되고, 여기서 사지향이 발생한다.
우리는 물론 우리 자신을 남보다 과대평가할 수 있다. 근거 없이 자신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근거 없는 자기우호적인 평가는 교만을 낳는다. 교만한 자는 부당한 근거에서 자기 자신을 높인다. 이와 달리 부당한 근거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있다. 이는 굴종적인 자기의식의 형태로서 지나친 겸손을 낳는다. 굴종은 “자신이 약하고 결연하지 못하다는 느낌” “자기 스스로 존립할 수 없다거나 남이 얻어놓은 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느낌” 등에서 기인한다. 교만과 지나친 겸손은 서로 뒤바뀌기 쉬운데, 그런 상호 역전 가능성은 양자가 모두 부당한 근거에 의존하여 자기를 평가한다는 데서 온다. 둘은 모두 표류하는 자기의식에 해당한다. (제1부 1장 「데카르트의 정념론과 그 이후」, 56~57쪽)
인문학자는 고래를 향해 던진 작살에 자신을 묶어 바다로 침잠하는 아합 선장처럼 참을 수 없이 무거운 문제 때문에 자신의 내면으로 잠수하는 주체다. 한 공동체가 질서정연하게 구조화되고 활력적으로 조직화되는 영점은 그런 광적인 잠수의 경쟁 속에서만 서서히 형성될 수 있다. 헤겔은 그 영점을 사태Sache라고 부르고, 그의 저작에서 사태는 공동체 정신(시대정신)의 원시적 형태에 해당한다. 예술을 포함한 인문학은 시대정신이 발아되는 뿌리와 같다. 인문적 주체는 비사회성의 극치에서 사회성의 가능성을, 고립의 극치에서 소통의 가능성을 여는 역설적인 주체다. 광기와 도착을 운명으로 하는 이런 역설적 주체가 없다면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가 납득할 수 있는 의제가 성립할 수 없다. 이는 일상의 사회적 소통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문적 상상력은 사회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거품 같은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한 사회가 사회로서 성립하기 위해 가장 먼저 있어야 하는 일차적 조건이다. (제1부 2장 「칸트의 상상력 이론과 그 주변」, 109쪽)
나르시시즘은 심리학적 증상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증상이다. 이 증상의 특성은 “시선이 어떤 보충적인 시선 혹은 어떤 다른 시선에 의해 이중화된다”는 데 있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동일성”으로 요약될 수 있는 나르시시즘. 하지만 그것은 정태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동태적인 동일성, 동일하게-되기에 가까운 동일성이다. 이 동일화의 운동 속에서 보는 자와 보이는 자는 각각 능동과 수동, 안과 밖으로 이중화된다. 그리고 그런 이중화를 통해 자기 자신과 멀어지는 동시에 자신으로 돌아간다. 견자는 가시적 대상을 보면서 그 대상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보고, 이런 외부의 시선을 우회하여 자기 자신으로 복귀한다. 가시적 대상의 경우도 마찬가지. 견자가 대상을 볼 때 가시적 대상은 견자를 보고, 견자의 시선을 매개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근본적인 나르시시즘은 무엇보다 “나를 바라보면서 나를 통과하고 나를 구성하는 가시자의 자기관계”를 가리킨다. 견자로서의 나, 바라보는 나는 이 근본적인 나르시시즘 안에서 구성된다. 나를 바라보고 구성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사물. “나의 몸을 지나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공간 자체.” 이것이 “객체와 주체를 형성하는 환경”이며, 메를로-퐁티는 그런 환경을 세계의 살이라 명명한다. (제1부 3장 「프로이트, 메를로-퐁티, 그리고 새로운 신체 이미지」, 141~42쪽)
분열적 코기토, 이미지 없는 사유는 근본적으로 감성적이다. 마주침을 통해 시작하는 감성적인 사유. 그 사유의 대상은 공통감에 종속된 감각에 대해서는 감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각 불가능자는 분열적 코기토에 대해 오로지 감각밖에 될 수 없는 대상이고, 따라서 다른 인식능력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대상이다. 게다가 반드시 감각되어야만 하는 대상. 왜냐하면 감성은 그 대상을 통해 충격에 빠지되 어떤 문제를 수태하기 때문이고, 이런 강요된 문제의 해결 속에서만 감성은 다른 인식능력 속에 최초의 폭력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감각 불가능자를 감각하는 감성은 기억을 강요해서 오로지 기억밖에 될 수 없는 기억 불가능자를 기억하도록 만들고, 이 기억은 다시 사유를 강요해서 오로지 사유밖에 될 수 없는 사유 불가능자를 사유하도록 만든다. 사유 속에서 태어나는 사유란 바로 이런 것이다. (제1부 4장 「들뢰즈와 새로운 사유 이미지」, 175쪽)
『주역』을 기준으로 명명하자면, 이 시대는 대과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어떤 안정된 척도로 질서가 조직되는 시대가 아니라 척도 자체가 이렇게 저렇게 흔들리고 굴절되는 시대, 위대한 개혁을 기다리는 과도기가 대과의 시대다. 대과 괘(011110)는 이 괘(100001) 다음에 온다. 대과 괘는 강한 선(양효)들이 중심에 있고, 바깥에 약한 선(음효)들이 놓여 있지만, 그 이전의 이 괘에서는 거꾸로 부드러운 선들이 한가운데 있고 바깥에 강한 선이 자리한다. 이것은 음식을 잘게 씹는 턱의 모양을 닮았다. 그것은 엄청나게 축적된 물질적 자산을 소화하고 내면화하는 국면을 상징한다. 이 괘는 물질적 풍요가 기술적․정신적 풍요로 이어지는 시기를 가리킨다. 풍요의 시기에 배태되는 대과의 시대는 발전된 기술과 확장된 정신적 잠재력이 누적되어 마침내 기존의 제도적 질서를 초과하는 시대다. 몸이 성장하면 입던 옷이 작아진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새롭게 획득한 잠재적 역량이 커지다 보면 그것을 담아내지 못하는 기존의 제도적 질서와 불균형을 이룬다. 그런 불균형의 시기가 대과의 시기다. (제2부 1장 「대과시대의 정치」, 183쪽)
『주역』이 말하는 인문의 글쓰기는 어떤 응시의 교차를 기록하는 글쓰기다. 사물의 응시에 자신을 내맡기는 글쓰기, 타인의 시선을 열기 위해 자신의 시선을 사물화하는 글쓰기. 이런 글쓰기가 어떤 예언과 치유와 보살핌의 힘을 갖는다면, 그 힘은 자신이 스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이 보게 하고 타인과 타인이 서로 보게 하는 데서 온다. 『주역』이 어떤 분수의 학이라면, 그 분수란 이런 상호 객체적이고 상호 타자적인 시각을 가져오는 능력의 크기에 있다. 상호 사물적인 시선, 상호 타인적인 지각, 그리고 거기서 유발되는 상호 습합習合, 이것이 문학이 연출하는 최고의 장면인지 모른다. (제2부 3장 「대과시대의 글쓰기」, 233쪽)
선물은 수행적인 사건이자 기록의 사건이고, 따라서 그 자체가 텍스트의 사건이다. 선물이 성립한다면 필연적으로 텍스트로서 성립한다. 선물이 주는 것은 텍스트이고, 텍스트가 선물 증여의 현실적 과정(행동)이자 구조 자체다. 요컨대 텍스트 밖에는 선물이 없다.
따라서 텍스트를 뒤져야 한다. 선물에 대해 말하기 위해, 말하고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출현-소멸하는 글쓰기의 장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물론 아무 곳이나 들여다보면 안 될 일. 선물이 불가해한 위족을 드러내는 희귀한 장면을 찾더라도 거기서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글쓰기의 주체가 실수하는 곳, 계산을 못 하거나 착오에 빠지는 지점이다. 선물이 주체에 대하여 감당할 수 없는 것, 믿을 수 없는 것,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대목. 바로 그런 곳을 들어가 보아야 한다(주체는 선물의 중지, 방어, 망각을 핵으로 한다). 주체가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곳, 그래서 미칠 지경인 곳. 바로 그런 곳이 선물이 선물로서 출현-소멸하는 곳이다. 선물의 서사는 광기의 서사, 주체가 광기에 빠지는 대과의 서사다. (제2부 4장 「해체론의 선물과 용서」, 263쪽)
전통적인 인문학에 있어서 언표 불가능한 것은 예술에서 오거나 종교에서 왔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의 무한성은 첨단 기술이 가로챘고 신적인 무한성은 자본이 앗아갔다. 마술과 기적의 원천은 예술이나 종교가 아니라 첨단 기술과 자본이다. 이제 무한한 것은 첨단 기술과 자본이 만들어가는 세속 사회의 역사적 현실인 것처럼 보인다. 현대 인문학은 그 어느 때보다 역사적 현실에 주목해야 하고, 그 현실이 일으키는 역설과 아이러니에 주목해야 한다. 그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장면화할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서사적인 구조 속에 극적으로 연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새롭게 경험되는 사건들 앞에서 개념화와 명명의 기회를 포착하는 길이다. 그리고 새로운 명명의 기회를 포착한다는 것은 시적인 지혜로 돌아간다는 것과 같다. (제3부 1장 「새로운 인문적 상상력의 조건」, 281~82쪽)
대타적 관계에 놓인다는 것, 끊임없이 타자와 대립하고 이로써 어떤 변별적 차이(규정)를 획득한다는 것은 자신의 대외적 정체성의 부피를 획득한다는 것과 같다. 사물은 타자와의 인연에 힘입어 자신의 위치나 가치를 획득한다. 대자적 자기관계는 그렇게 발생한 대외적 규정성을 단순화하는 운동이다. 이런 이중의 운동 속에서 대타적 부정은 대자적 내면성을 낳는 동시에 일그러뜨린다. 단순화라는 자기관계적인 복귀는 자기정립의 운동이되 자기 자신을 타자로 만드는 자기부정의 운동이다. 자기는 타자가 되면서 자기가 되고 자기가 되면서 타자가 된다. 자기는 자신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고유한 실체성을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속한 것들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유래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을 엮어내고 있는 타자들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고유한 내면성을 회복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새로운 형식 속에 단순화하는 내적 부정성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성이다. 반성은 타자화 속의 자기화이자 자기화 속의 타자화이다. (제3부 1장 「새로운 인문적 상상력의 조건」, 295쪽)
구조주의는 인문학에 학문적 엄밀성을 선물했다. 그 대신 실존주의 시대에 그토록 중요했던 주체나 체험의 범주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데리다는 구조가 그 자체의 내적 필연성에 따라 어떤 균열을 노출할 수밖에 없음을 논증했다. 구조의 중심은 언제나 닫힘과 열림, 조임과 풀림의 이중회기 속에 놓여 있으며, 그런 한에서 구조에 대하여 틈은 환원 불가능한 구성요소라는 것. 이런 이야기가 라캉으로 건너가자 그 환원 불가능한 균열은 주체의 탄생지이자 서식지가 된다. 그 균열은 언어적 구조의 내부에서 잊혀졌던 실재(죽음충동)가 구조 안으로 침투함으로 인해 발생한다. 실존적 주체는 그 침투하는 실재에 대한 방어적 접촉(환상)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구조는 주체의 범주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생산한다. 진정한 욕망의 주체, 환상의 주체는 오로지 구조의 자기전개 논리 속에서만 태어날 수 있다. 구조와 주체는 상호 규정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범주다. 구조 없는 주체, 주체 없는 구조는 다 같이 생각할 수 없다.
데리다의 독자라면 라캉의 이런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받을 것이다. 그런 의미의 주체는 구조의 입이거나 항문일 것이다. 구조가 소화 가능성이 불확실한 실재를 삼키거나 내뱉는 입, 혹은 구조로서는 소화 불가능했던 실재의 잔여들을 배설하는 괄약근. 그것이 주체 아닌가? 말이 이렇게 이어질 때 사르트르의 독자가 다시 끼어들 기회가 생긴다. 그렇지, 구멍이지. 주체는 존재의 촘촘한 인과적 사슬에 단절을 가져오는 구멍이야. 이것이 현대 정신분석과 더불어 실존적 주체가 죽었다 살아나는 과정이다. (제3부 2장 「인문학과 정신적 동물의 왕국」, 306~307쪽)
이런 헤겔 정신철학의 전체적인 구도에서 볼 때 몇 가지 점이 분명해진다. 먼저 사회과학(객관정신)은 한 역사적 시기의 문화적 패러다임이나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모두 표현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 화룡첨점이란 말을 기준으로 하면, 사회과학은 용의 몸통까지만 그릴 수 있다. 용의 그림을 최종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눈동자, 그 빛나는 눈동자를 그리는 것은 예술이나 종교 혹은 철학의 몫이다. 헤겔에게서 절대정신을 표현하는 예술, 종교, 철학은 동아시아적인 용어로 옮기자면 문․사․철에 해당한다. 요즘 말로 옮기자면 그것은 광의의 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번역에 착오가 없다면 다음과 같은 언명이 가능할 것이다. 인문학 없는 사회과학은 눈동자 없는 용에 불과하다. 사회과학은 자기들끼리 아무리 합하고 섞여도 어떤 점에서는 맹목을 벗어날 수 없다. 특정 시대의 역사적 제약이나 이데올로기적 욕망을 깨뜨리기 위하여, 인류적 차원의 보편성을 새롭게 개진하는 독창적인 문화적 패러다임을 개시하기 위하여 사회과학은 인문적 상상력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어떤 일방적이거나 종속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헤겔의 정신철학에서 실천과 분리된 관조, 객관성과 분리된 절대성이란 언제나 추상적이고 공허한 형식에 불과하다. 헤겔이 정신적 동물의 왕국에서 드러내고자 한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그것은 대타적 관계를 경시하는 대자적 초월의 기만적 성격에서 온다. 인문적 상상력은 이상에 취하거나 의무감에 짓눌려 세상에 밀착하지 못하기 쉽다. 헤겔은 내면으로만 향해서 바깥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인문주의자의 눈, 자폐적 이상주의의 눈을 비판한 셈이다. 눈동자 없는 용도 불완전하지만, 몸통 없는 눈동자는 더 불완전한 어떤 것, 거의 무의미한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눈동자는 몸통이 있을 때만 빛을 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문적 상상력은 사회적 실천의 장 속에서, 사회과학적 현장 속에서 다시 눈을 떠야 한다. 인문적 상상력은 사회적 상상력의 내적 진화의 논리 속에서 부화될 때에만 실체적 내용과 객관성을 지닐 수 있다. 바로 그런 조건에서만 현실적 타당성을 발휘하는 학문적 이론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제3부 4장 「낭만주의 시대의 인문적 상상력과 사회적 상상력」, 450~51쪽)
탈서양을 함축하는 탈근대는 표면적으로 서양적 가치의 패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친다. 그렇지만 탈근대가 동양적 가치에 대한 옹호나 동양적 사유의 부활인 것은 결코 아니다. 탈근대의 근본 물음은 서양의 외부로 향하되 그 외부를 여전히 서양 자체의 내부에서 찾고 있다.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로 이어지는 해체론적 전통의 일정한 정체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바로 이 점에서 탈근대 담론이 헤겔적 패권주의와 일정한 공모관계에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탈근대가 추구하는 서양의 저편은 헤겔의 서쪽보다 먼 서쪽, 서쪽의 서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탈근대는 헤겔이 도달한 서양을 기준으로 해서 다시 서쪽으로 뱃길을 열어가는 모험에 찬 항해다. 지구는 둥글므로 서쪽의 서쪽으로 향하는 탈근대의 항해가 다시 동쪽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 해도, 서쪽의 서쪽에 해당하는 동쪽과 그냥 제자리에 있는 동쪽은 헤겔적 의미의 동양과 서양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제4부 2장 「탈근대의 동과 서」, 474쪽)
머리말
프롤로그 Stand by Your Man! 이것이 인문학의 노래다
제1부 근대인—정념적 코기토의 역사
1장 데카르트의 정념론과 그 이후
2장 칸트의 상상력 이론과 그 주변
3장 프로이트, 메를로‑퐁티, 그리고 새로운 신체 이미지
4장 들뢰즈와 새로운 사유 이미지
제2부 대과시대—모더니티의 경계에서
1장 대과시대의 정치
2장 시뮬라크르와 탈근대의 두 양상
3장 대과시대의 글쓰기
4장 해체론의 선물과 용서
제3부 인문적 상상력—헤겔의 추억
1장 새로운 인문적 상상력의 조건
2장 인문학과 정신적 동물의 왕국
3장 헤겔의 불행한 의식과 인문적 주체
4장 낭만주의 시대의 인문적 상상력과 사회적 상상력
제4장 동양과 서양—Xx를 위하여
1장 철학의 동쪽
2장 탈근대의 동과 서
3장 노장과 데리다
4장 박동환의 3표론과 현대 차이의 철학
원문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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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 ‘나는 철학자다’… 세계화의 무대 위에서 부르는 인문학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