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섬의 여덟 소년들, 그들의 끓어 넘치는 사랑 이야기
요동치는 태풍의 시절, 여린 마음속에 차오르는 솔직한 말들이 쏟아져 내린다.
“모두 사랑해버리지 뭐. 그리고 스무 살에 죽어버리는 거야.”
태풍이 북상할 무렵 우리 앞에 도착한 한 권의 책. 2008년 『문학수첩』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등장한 뒤 탄탄한 문장력과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긴 소설들을 발표하며 주목을 끌었던 임수현의 첫 장편소설 『태풍소년』(문학과지성사, 2012)이다. 그는 지난해 출간한 첫 소설집 『이빨을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를 통해 신인으로서의 신선함과 신인답지 않은 노련한 기량을 겸비한 놀라운 신인이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작년 여름 <웹진문지>에 연재되었던 이 장편소설은 연재 당시에도 웹진을 찾는 많은 독자의 집중을 받으며 찬사의 댓글이 끊이지 않았다. 예민한 감각으로 절망과 희망의 미묘한 교차점과 복잡다단하게 움직이는 감정들을 포착하며 ‘소년’ 그 자체를 온전히 그려낸 임수현의 이번 소설은 독자들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충격을 선사할 것이다.
닻섬, 지옥도의 아름다움을 그리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닻섬의 지도를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육점골목’이라 불리는 홍등가는 퇴락한 관광도시답게 어둡고 쓸쓸하다. 이곳을 배회하는 소년들. 어른을 시늉하기에는 아직 한참 어린 열대여섯 살의 그들은 투견처럼 피를 흘리며 격투를 벌이고 도박꾼들에게 돈을 받아 지내는 아이들이다. 그 안에 섞이지 않은 한 아이, 강우. 엄마는 섬을 떠났고 아빠는 정육점골목 식당 수선화에서 미라언니와 동거하게 되면서 텅 빈 횟집 건물에 홀로 살게 되었지만 진부하게 자기 연민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강우는 오히려 자신만의 독특한 눈으로 세계를 관찰하고 분석하며 주위 사람과 사물들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자아가 강한 아이다.
서로 죄를 떠넘기고 기만하고 다투고 배신하고 사랑하는 정념의 공간 닻섬, 그 안을 활보하는 소년들은 태풍처럼 요동치는 시절을 보내고 있다. 민감하고 여린 감각들로 만들어내는 그들만의 공간, 그곳은 화해나 희망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 아름답다.
적과 동지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보다
강우가 사랑하는 것은 제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강우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알게 되면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그만 사랑해버리고 말자,라고 결심했다. 강우는 만만하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상대는 시시하고 미웠다. 그것들은 대개 자신을 닮아 있었다. 강우는 그 사실을 들킬까 봐, 나약한 상대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몰아세우고 미워했다. 엄마기계처럼. 하지만 강우는 엄마기계를 괴롭힐수록 점점 기쁨으로 충만해졌기 때문에, 그것은 미움이 아니었다. 강우는 아무도 미워할 수 없었다. 미워할 수 없다면, 사랑하는 수밖에 없었다._본문에서
임수현의 특장 중 하나인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이 소설에도 잘 드러나 있다. 내 편인지 적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 폭력의 주체와 객체가 전복되는 관계들, 그리고 어른의 세계를 대하는 소년의 적대와 동경의 혼재. 닻섬 소년들 위에 군림하지만 강우를 지켜주려는 흙. 흙을 받아들일까 흔들리다가도 단호히 거부하는 강우. 우주를 사랑하는 강우와 우주를 소외와 결핍으로 느끼는 강우. 그들의 사랑과 미움의 감정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혼재된 채 찾아온다. 그리고 강우의 결심, “모두 사랑해버리자.”
소년 강우, 새로운 ‘성장’을 말하다
『태풍소년』을 읽는 독자들은 낯선 소년들의 모습에 당황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이 기존 성장소설의 패러다임을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닻섬의 소년들은 성장을 요하는 덜 자란 어른이 아니다. 임수현은 소년은 이러 해야 한다,라는 어른들에 의해 규정된 서사를 시늉하지 않고 소년은 그 자체로 그만의 아름다움을 찾는다. 이는 임수현의 소설들에서 자주 등장한 소녀/소년 들이 공통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입장과도 맞닿는다. 문학평론가 이소연은 이에 대해 “소년들이 상처받는 이유는, 자라기 때문이다. 이들의 자그마한 뒤통수는 언젠가는 부모와 가족들, 자신을 품어주었던 공간으로부터 버림받고야 말 미래를 향해 있다. 버리고 버림받으면서 상처가 새겨진다. 종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거부당한 채 낯선 세계의 질서에 굴복하고 말 때까지, 우리는 이렇게 좌절이 축적된 결과를 가리켜 성장이라고 불러온 것”이라는 점을 집어내기도 하였다. 임수현이 보여주고자 했던 성장은 바로 이 좌절이다. 자신이 매혹된 대상에 대한 환상을 키워가며 집요하게 추구하다가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으로 자라난다는 것. 『태풍소년』은 진정한 성장이 무엇인가 곰곰 되짚어 보는 새로운 관점의 성장소설이다.
■■ 본문 소개
한눈에 봐도 소년은 닻섬의 소년이 아니었다. 더욱이 혼자라니. 빗속에 서서 고개를 수그린 소년은 정말 태풍이 이곳까지 쓸어온 국기처럼 홀로 펄럭이고 있었다. [……] 세 번도 넘게 백을 헤아렸지만 소년은 개천으로 곤두박질치지 않았다. 소년이 머뭇거릴수록 강우는 소년이 개천으로 고꾸라지기를 바라는 것인지,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 헷갈렸다. 강우는 조바심이 났다. 강우는 어금니에 괴는 침을 꿀떡 삼키고 두 발을 굴러싿. 마음 같아서는 두 손을 모아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어서 뛰어내려.’ ‘조심해, 물러서란 말이야.’ 하지만 강우는 두 말 중 어떤 것이 진짜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p. 10)
강우의 머릿속에 사막의 모래알처럼 바글거리던 생각과 얼굴 들이, 지독한 가뭄 뒤 소낙비를 만난 석류처럼 알알이 들어차 상큼한 과일로 열렸다. 태풍의 끝이었고, 과일이 익을 시간이었다. 강우는 두 소년이 실린 고무 튜브를 푸른등대를 향해 힘차게 밀고 나갔다. 강우가 소년 하나가 심긴 반지에 탄광보다 무거운 닻섬을 끌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섬과 부두 사이의 바닷가에 헤매는 강우의 심장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섬 하나가 들어찼다.
강우는 그 섬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p. 169)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지만, 집을 둘러싼 길에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건 무관심이 라니라 의심하기 때문에 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러 오랫동안 그 길로 나서지만, 자신이 돌아가야 할 집의 지도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누군가 하나는 제자리에 남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강우는 한 번도 길을 잃은 적이 없다. 강우는 집과 길 사이를 맴돈다. 강우는 의심하고 기다린다. 강우는 길이고 집이다. (p. 338)
■■ 작가의 말 (부분)
소설은, 시작을 망각하고 과정에서 태어난다.
전자레인지와 책상 사이의 벽에는 2009년 붉덩물이 범람해 도로를 잠근 개천 사진과 옹벽이 무너지면서 주차장이 주저앉아 질흙에 뒤엉킨 자동차 사진이 마치 이 소설의 동기였던 것처럼 붙어 있다. 두 번의 여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이 소설의 시작을 잊었고, 소년(들)은 제가끔 태풍이라는 이름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 키, 몸무게, 허리둘레는 열다섯 그대로다. 더는 자라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그 시간 그대로 멈춰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을 쓴 뒤로, 그것이 물리적인 사실이 아니라, 기억과 등가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나는 돈을 처음 벌고 사용하는 시간부터가 기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대개 (법률적으로) 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어야 하는 열다섯, 소년이라는 시간에 발생하고, 소년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기억이 없기 때문에, 돈으로 자신의 삶(기억)을 발명했다고 오해한다. 죄의 예감마저 공짜라고 기뻐한다. 나는 자주, 가끔 기실 부모에 기생하면서도 허영에 들떠, 아무 노력도 않고 시간만 재촉하는 소년에 흠칫한다. 나는 그 소년이 밉고, 전혀 안쓰럽지 않다.
이 소설은 아마 그런 마음에서 비롯했겠지만, 강우, 우주, 미래, 래오…… 돌림노래처럼 이어진 이름들은 오해 속에서도 어떻든 제 삶을 지속하고, 아마도 끝끝내 자신들의 절망을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열다섯, 소년(들)의 이야기다. 나는 그저 소년(들)에게서 부모와 학교를 생략시켰고, (한 소년만이 가냘프게 흡혈귀와 로봇이 사랑을 나누는 것 같은 부모에게 엄마기계와 아빠백작이라는 별명을 선물한다) 그것들에 적선받은 삶의 서사를 시늉하지 않고, 나약한 육신의 껍데기나마 세상의 부스러기라도 채워 홀로 아름다워지길 바랐다. 그저 소년(들) 서로서로 죄를 떠넘기며, 기만하고, 다투고, 배신하며, 사랑하고, 마주 서도록 부추겼다. 그렇게 소년(들) 스스로 제 허약한 몸과 시간을 밑천으로 두 차례의 태풍을 통과하고 나면, 나는 발기한 성기처럼 딱딱했던 마음을 풀고, 그들의 이야기를 공들여 복기해볼 심사다. 나는 그것을 화해나 희망이라고 발음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때에는 소년(들)이 발명한 지옥도가 조금은 예뻐 보이기를 바란다.
1부
탄생일
전염병축제
사슴태풍
2부
해바라기
물의 교육
꿈의 문제
변신
검고 젖은 맹세
3부
심야극장
평범한 슬픔
거울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