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은 톰과 잤다

손홍규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2년 6월 14일 | ISBN 9788932023106

사양 · 317쪽 | 가격 11,000원

수상/추천: 백신애문학상

책소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미로의 한가운데 던져진 존재라네.”

의뭉스러운 얼굴로 도시의 슬픔을 웃어내는 작가 손홍규
삶이라는 미로에서 소설가의 길을 묻다


세번째 소설집, 잔인한 도시를 좀더 날카로워진 눈매로 바라보다

손홍규의 세번째 소설집 『톰은 톰과 잤다』(문학과지성사, 2012)가 출간되었다.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그는 도시의 폭력적 환경 속에서 사라져가는 공동체적인 삶과 인간성 소멸의 현실을 풍자적으로 그려내며 작품집마다 세간의 주목을 모았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지난 11년간의 탄탄한 공력을 담아 좀더 깊어진 고민과 예리한 시선으로 비틀린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면면을 들추어낸다. 낯설고 팍팍한 도시 서울, 그곳에서 가난한 외부자로서의 슬픔과 외로움을 손홍규 특유의 의뭉스런 유쾌함으로 풀어가는 아홉 편의 소설은 보는 이에게 애잔함을 넘어 묘한 위로를 안겨준다.


자신의 증오를 잊지 않으면서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

아무런 과오도 범하지 않은 자신에게 가난이라는 힘겹고 위태로운 몫을 배당해준 폭력적 세계에 대한 증오를 잊지 않는 것. 손홍규 소설의 문학적 원천은 바로 이것에 있다. 동시에 이러한 팍팍한 세상을 함께 살아내는 자들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위무하는 손홍규의 특장 또한 돋보인다. 도시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들, 근대와 반근대 사이의 경계인들이 모여 먹고 놀고 사랑하며 복닥거리는 이야기로 가득 찬 이 소설집은 따뜻한 빛을 내고 있다.

  우리는 키가 다 커버린 나이 많은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매기. 어쩌면 이미 우리가 매이였는지도 모른다. [……] 나는 눈을 뜬 채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므로 영혼이 실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배가 고팠을 그를 어딘가에 누워 깊이 잠들고 싶었을 그를 창밖에 홀로 내버려둔 것만 같았다. 다정하고 귀중했던 나의 그는 오래도록 쓸쓸했던 것이다―내가 오래도록 맹시(盲視)였듯이. (「내가 잠든 사이」)

  나는 분명히 선아를 눕히고 그 위에 올라갔지. 그리고 반쯤 넋이 빠진 상태로 대리석 같은 선아를 탐닉했던 거야. 그런데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순간…… 방금까지 선아가 누웠던 자리에 내가 누운 걸 깨달았어. 이런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순식간에 존재가 뒤바뀐 듯한 기분 말이야. 아니 어쩌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걸지도 몰라. 나는 선아처럼 누워서 내 배 위에서 몽롱한 얼굴로 그 일에 몰두한 나를 올려다보았어. 그때의 내 얼굴은 무척 쓸쓸해 보였어. 사랑을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라고나 할까. 내 몸이 내 몸속으로 들어왔는데 무척 낯설고 아팠어. 나는 나에게 상처를 줬고 나에게 상처를 받았던 거야. (「톰은 톰과 잤다」)

자신의 고통만을 들여다보느라 오랫동안 주변을 서성거렸을 연인의 고통을 살피지 못한 일을 고백하듯, 심지어 그러한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여 느끼는 그의 공감 능력은 도시라는 미로에서 소설가의 길을 찾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비자발적 유목의 삶, 방이 없는 청년들

유난스럽지도 모나지도 않은 소설 속 인물들이 이 세계에 발맞출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가난이다. 대부분 도시 빈민인 이들은 구질구질하고 비좁은, 인간의 거주지라기보다는 거의 짐승의 서식지에 가까운 골방들을 전전하면서 ‘비자발적 유목의 삶’을 살아간다. 민감한 감수성을 가진 청년들은 지나치게 가혹할 만큼 환경적으로 열악하거나, 어긋나고 불편한 관계를 견뎌야 하는 공간들을 거치게 된다.

나는 수집가가 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대학 시절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회실, 동아리방, 선배나 동기의 자취방을 이리저리 떠돌며 살았다. 누군가는 나를 가리켜 도시의 유목민이라고 일컬었지만 나는 결코 유목민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정착민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잠든 사이」)

이사하던 날 나는 손수레에 싣고 온 짐을 혼자 날랐다. 방은 내 짐들이 못마땅했는지 쌀쌀맞게 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인데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다. 책상 서랍 세 칸 가운데 위쪽 두 칸은 텅텅 비었지만 맨 아래 칸 서랍에만 차곡차곡 쌓인 콘돔 상자가 있었다. 쁘띠가 문 앞에서 방을 들여다보았다.
“난 여길 사물함이라 생각할게. 맨 아래 칸 서랍만 건들지 말아줘. 가끔 들를 테니까 너 혼자 사는 거라고 여겨도 돼.” (「증오의 기원」)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서울을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방이 없는 생활, 내일이 없는 삶 속에서도 비애와 향수에 젖는 길 대신, 뼛속까지 녹아든 타자적 감수성으로 서울을 응시하고 문학에 골몰한다. 이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근대의 상처를 피해 전근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이 세계의 균열을 내고 근대에 반하는 길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손홍규의 이러한 자세를 “서울에서 노령을 찾는 길”이라 평하며 “불멸의 형식 찾기 서사”라고 이름 붙인다. 적대적인 세계에서 문학을 하며 살아남기. 이것이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핵심 화두다.
부정성의 세계 내부에서 긍정을 찾기. 아홉 편의 소설들은 미로 한가운데에서 태어났지만 나가는 길은 있다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 가능성을 문학으로써 찾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치열하고 유쾌한 고군분투기. 오늘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슬몃 짓는 웃음 속에 눈물 한 방울이 찔끔 날 만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 본문 소개

그는 스스로를 자신의 몸 안에 은닉했다. 블라인드 너머가 전경들의 집결지였다. 그곳에서 중대 단위의 교대와 얼차려와 배식이 이루어졌다. 식판을 긁는 소리, 라이터 부싯돌 소리, 기합 소리, 그리고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탄식하는 소리와 울음도 들려왔다. 그는 더 이상 그 방에서 평온하지 못했다. 그는 매 순간 그들의 적의를 느꼈다. 그에게 문밖은 적으로  가득한 세계였다. 그가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건 그들 역시 이 방에서 생겨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뜻했다. 방 안의 사물들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방의 보호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 방은 더 이상 학생과 전경 들 사이의 텅 빈 완충지대가 아니었다. 그는 여기에서 죽는다면 자신이 우렁찬 군가에 눌려 죽은 최초의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다._「마르께스주의자의 사전」
나는 앞으로 이런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육체를 내주지만 정신을 내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 그와 정반대인 사람, 육체와 정신 모두를 내주지만 이를테면 발가락을 애무하길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 그 모든 실패를 겪은 뒤에 나는 사랑이란 점령하지 않고 내버려둔 영역에서만 서식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관념이라는 걸 깨닫게 되겠지._「불멸의 형식」
그는 칼을 쥔 채 방을 나섰다. 사물함에 그다지 소중하지 않은 사물 하나를 남겨두고 영영 그 사물함을 잊은 사람처럼. 눈동자 속에 옛사람이 산다. 나는 가끔 내 눈을 들여다본다. 혹시 그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증오를 모르면서 내게 증오를 가르쳐준 쁘띠가._「증오의 기원」


■■ 해설

그는 자신과 연인을 ‘매기’에 비유한다. 매기는 수퇘지와 암소가 흘레붙어 낳는 변종 괴물이다. 그러니까 그는 여전히 노령의 사내다. 스스로를 정상적 상징 질서의 내부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비인이자 괴물, 끔찍한 타자성의 표식을 가진 외부적 존재로 인식하는 노령의 사내다. 그는 애초부터, 그러니까 노령에서 보낸 유소년기부터 이미 자신이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구타유발자란 사실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매기의 존재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로 읽힌다. 그들은 모두 비루하고 졸렬하고 가난하고 엉뚱한 경계인들인데, 그 매기들은 결국 근친혼 속에서 살다 종래에는 소멸할 운명들을 타고났다. 노령의 사내는 서울에서 뼛속까지 타자였던 것이다. _김형중(문학평론가)


■■ 작가의 말

한 편의 소설을 쓰는 일은 눈을 뜬 채 지독한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해서 아직 동살이 잡히지 않은 새벽녘 나는 참 많이도 홀로 쓸쓸했다. 삶은 늘 그 시각에 머문 듯했고 소설은 언제나 멸망 직전이었다. 전멸하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였으나 무엇과 그토록 싸워왔는지 알 수가 없다. 고단하다.
사연이 담긴 말들을 주우며 살아온 지 여러 해 되었건만 돌아보면 거기에 내 사연은 없는 듯하다. 내 삶은 사연이 될 만큼 무르익지도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오랜 세월 헛짚었다. 잃어버린 낱말은 추문이 되었고 간직해서는 안 될 추문을 무척이나 오랫동안 품고 살았다. 손 안에 남은 몇 개의 낱말들만이 내 문장이다. 몸을 둥글게 만 채 살아남은 기억들만이 내 글이다. 기억이 사라지는 날 나 또한 기꺼이 사라지겠다. 그날이 오기를 열망한다. 아무쪼록 어서 오시길.
「투명인간」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은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았으나 이미 시인이다.「내가 잠든 사이」는 세 해 잇따라 구안와사를 앓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마르께스주의자의 사전」은 그해 여름을 잊을 수 없는 이들에게 바친다. 그이들은 충분히 아름다웠다.「불멸의 형식」「무한히 겹쳐진 미로」「증오의 기원」「톰은 톰과 잤다」는 그 시절을 살았던 문청들이 흔히 겪어야 했던 신화 같은 현실을 각색한 것이다.「얼굴 없는 세계」는 용산참사를 지켜보며 무력했던 나날들을 견디기 위해 썼다.「화요일의 강」은 선배 소설가들에 대한 오마주다.
소설집을 묶으려니 앞으로도 계속 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맴돈다. 언제는 안 그랬던가. 앞으로도 고단하겠다. 책을 묶어주신 문학과지성사 편집부에 감사드린다. 해설을 써주신 김형중 선생에게도 감사드린다.

2012년 6월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손홍규

목차

투명인간

내가 잠든 사이

마르께스주의자의 사전

불멸의 형식

무한히 겹쳐진 미로

증오의 기원

톰은 톰과 잤다

얼굴 없는 세계

화요일의 강

 

해설 출노령기(出盧嶺記)_김형중

작가의 말

작가 소개

손홍규 지음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톰은 톰과 잤다』 『그 남자의 가출』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와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청년의사 장기려』 『이슬람 정육점』 『서울』 『파르티잔 극장』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 산문집 『다정한 편견』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등이 있다. 노근리평화문학상, 백신애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채만식문학상, 이상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을 수상했다.

전자책 정보

발행일 2013년 8월 12일 | 최종 업데이트 2013년 8월 12일

ISBN 978-89-320-2427-1 | 가격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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