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에 대한 불안

현대의 문학 이론 44

해럴드 블룸 지음 | 양석원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2년 5월 30일 | ISBN 9788932023083

사양 · 302쪽 | 가격 16,000원

책소개

“비평은 심오한 동어반복의 담론, 자신이 의미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말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을 아는 유아론자의 담론이다. 비평은 시에서 시로 이어지는 숨은 길을 아는 예술이다.”

 

 20세기 최고의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시적 영향에 대한 독창적 이론!

 
문학과지성사에서 ‘현대의 문학 이론’ 시리즈로, 20세기 후반 서구 문학비평을 주도해온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시적 영향에 대한 독창적 이론을 담은 책이 출간되었다. 『영향에 대한 불안』(양석원 옮김)이 그것.
블룸은 “비평 분야의 거인”으로 불리며 20세기를 대표하는 현존하는 최고의 문학비평가로 손꼽히지만, 흥미롭게도 그의 비평은 시대를 지배해온 주류 비평과 궤를 달리한다. 그는 탈구조주의를 비판했고, 신역사주의를 비롯해 문학을 사회역사적으로 해독하려는 모든 비평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며 그만의 독특한 이론을 활발히 펼쳐왔다. 1950년대 말부터 이어져온 블룸의 비평 대상이 주로 자신의 전공 분야인 낭만주의 시인들과 낭만주의 전통을 잇는 현대 시인들이었다면, 이후 블룸의 비평은 바로 이 책 『영향에 대한 불안』(1973)을 전환점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이 책 이후로 블룸의 비평을 지배한 하나의 개념을 꼽자면 그것은 당연히 ‘영향’이다.
『영향에 대한 불안』은 후배 시인이 선배 시인의 ‘영향’에 대한 ‘불안’을 통해 새로운 시를 창조하는 과정을 수사학적 대조 및 심리적 갈등과 투쟁에 주목하여 밝히는 책이다. 블룸 이전의 전통적인 영향 연구가 후배 작가가 선배 작가를 모방하는 것으로 여기고 문학 전통의 연속성을 당연한 것으로 가정해왔다면, 블룸 이론의 특징은 문학 전통의 연속성과 유사성이 아닌 ‘왜곡’과 ‘차이’ ‘오역’에 주목했다는 데 있다. 이 책에서 시인의 상상력을 방해하는 ‘영향’의 장본인은 바로 후배 시인이 독창적 상상력을 펼칠 권한을 선취한 선배 시인으로 나타난다. 블룸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 전통의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성, 즉 선배 작가의 모방이 아니라 선배 작가의 모방을 넘어서 능가하는 것이며, 그는 이것을 ‘시적 오류’라는 창조적 해석을 두고 펼쳐지는 갈등과 투쟁의 미학이라고 지칭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위대한 선배 시인의 영향이라는 방해자와의 투쟁을 통해서만 스스로 독창적인 시인으로 태어나는 위대한 시인의 형성 과정을 극적으로 서술한 이론서이다. (문학과지성사 刊, 2012)

 

 ‘시적 오류’라는 창조적 해석을 두고 펼쳐지는 갈등과 투쟁의 미학

시적 영향에 관한 블룸 특유의 독창적 이론을 날카로운 사유로 종횡무진 풀어내고 있는 이 책은, 선배 시인의 모방을 넘어서 선배 시인의 우선권과 독창성을 찬탈하는 과정으로 ‘시의 창작’을 설명한다. 블룸에 의하면 “강한 시인들은 선구자들에 대한 맹목을 자기 작품의 수정적인 통찰로 변모시킴으로써 그를 따랐다.” 이렇듯 블룸은 영향에 대한 불안이 시적 창작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은 여섯 개의 수정률로 제시한다.
첫번째 수정률은 클리나맨으로 선배 시에서 이탈하여 오독하는 과정의 시작이다. 이는 창조의 과정에 동반되는 선배 시로부터의 이탈, 타락, 오독을 의미하며 수사학적으로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두번째 수정률인 테세라는 원래 고대 신비 숭배에서 인식의 표지로 활용하던 도자기의 파편을 의미한다. 따라서 테세라는 도자기의 파편들이 맞추어져 전체가 되듯이 새로운 시가 선배 시를 대조적으로 완성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해당하는 수사학적 비유는 제유다. 클리나맨이 수축이고 제한이라면 테세라는 복원이고 재현이다. 블룸에 따르면 이런 복원과 재현은 새로운 불안과 수축을 야기하는데, 그것이 바로 세번째 수정률인 케노시스이다. 이것은 ‘비우기’의 뜻을 지니며 클리나맨에 해당하는 “영향의 아이러니가 (선배 시의) 현존의 무효화 혹은 부재화였던 것처럼 (케노시스는) 앞선 언어의 충만함을 비우는 것”이다. 이렇게 선배 시를 비우는 과정은 수사학적으로 환유에 해당한다.
이어서 네번째 수정률은 악마화 로, 여기에서 악마는 선악의 기준으로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악마화는 특히 선배 시인의 시에 나타난 숭고에 맞서는 반-숭고의 미를 자신의 시에서 드러내는 상상력의 분출을 의미한다. 비유적으로 악마화는 과장법에 해당하는데, 이는 선구자의 숭고에 맞서기 위한 반-숭고를 표현하려면 더 많은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섯번째 수정률은  아스케시스로서 블룸은 이 말을 “고독의 상태에 도달하려고 의도하는 자기정화 움직임”이라 정의한다. 악마화로 인해 “반-숭고의 새로운 억압력에 도취한 강한 시인은 악마적으로 고양되어” 선구자와의 투쟁에서 승리하지만, 선구자에 대한 공격 본능이 자신에게 향하게 됨으로써 자기정죄적이 되어 고독의 상태에 도달한다. 블룸은 아스케시스에 해당하는 비유가 은유라 말하는데, 이에 상응하는 방어기제인 승화의 특성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 수정률은 아포프라데스로서, 아스케시스가 자기정죄적인 고독의 상태에 침잠하는 것이라면 아포프라데스에서 젊은 시인은 다시 선배 시인에게로 자신을 개방하고, 죽은 선배 시인은 다시 귀환한다. 이 마지막 수정률에서 블룸의 수정률은 순환을 마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지만, 이 순환은 원점으로서의 회귀가 아니며 젊은 시인은 죽은 시인의 영향의 홍수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후대 시인은 선배 시인이 “자신의 작품에 빚진 것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더 큰 영광에 의해 (필연적으로) 왜소해지도록 선구자를 자기 자신의 작품 속에 배치하여 승리하”게 된다.
이에 대해 블룸은 “나는 이 운동을 여섯 개로 한정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최소한이며 어떻게 한 시인이 다른 시인으로부터 이탈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정률은 블룸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비율들의 정확한 순서가 아니라 재현과 제한이 영구히 서로에게 답하는 대체의 원칙”이다.

20세기 후반 서구 문학비평의 흐름을 주도해왔으면서도 주류 비평과는 일관되게 적대적 거리를 견지해온 블룸의 이론은 무엇보다 독창적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의 시론은 문학 텍스트 외적인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텍스트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인 신비평의 형식주의와는 달리 시를 다른 시와의 관계에서 고려했다는 점에서 탈형식주의적인 미덕을 지닌다. 또한 선배 시와 후배 시의 관계를 논한다는 점에서 탈구조주의적 공시성의 이론을 넘어서 통시적인 이론을 지향한다는 점, 갈등과 투쟁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통시적 영향 관계를 연속성이 아닌 불연속성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장점도 있다. 물론 그의 비평이 고집스럽게 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며 보수적․미학적 문학관을 고수한다는 등 여러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블룸의 이론에 따르면 문학은 “창조적 해석을 두고 펼쳐지는 투쟁과 갈등의 미학”이 아니던가. 날카롭고도 독창적인 블룸의 사유는 지금껏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꾸준히 새로운 사유, 후배 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영향에 대한 불안’을 야기할 것이다.
이 책은 1991년 국내에 처음 소개(고려원)되었으며, 20여년 만에 문학과지성사에서 새롭게 번역하여 독자들에게 다시 선보이게 되었다. 원서 초판은 1973년에 출간되었고 이후 쇄를 거듭하며 수정을 거쳐 1997년 새로운 서문을 덧붙인 2판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97년 새로운 2판을 대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 책 속으로

셰익스피어는 우리를 발명했고 계속 우리를 구속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모든 상상문학을 평가절하하고 특히 셰익스피어를 낮추고 깎아내리는, 소위 ‘문화비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문학연구의 정치화는 문학연구를 이미 파괴했으며 학문 그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는 세상이 애초에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세계에 미쳤다. 원한학파 비평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국가권력이 전부이고 개인 주체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 주체성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것이라도 말이다. 〔……〕 나는 이런 모든 권력을 팔아먹는 자들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를 위해 에머슨에게로 돌아간다. 누가 근대적 삶의 텍스트를 썼는가? 셰익스피어인가, 아니면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1세 시대의 정치제도인가? 우리가 아는 바의 인간을 누가 발명했는가? 셰익스피어인가, 아니면 궁정과 궁정의 대신들인가?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 누가 더 많은 영향을 미쳤는가? 여왕 폐하의 제1장관이었던 벌리 경인 윌리엄 세실인가, 아니면 크리스토퍼 말로인가? (「서문: 오염의 괴로움」, 17~18쪽)

이 책을 읽는 합당한 독자, 즉 좌파든 우파든 인민위원이나 이념가가 아니라 어느 정도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자라면 누구든 영향에 대한 불안이 선구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야기, 소설, 희곡, 시 혹은 에세이에서 성취되는 불안이라는 점을 알 것이다. 불안은 기질이나 환경에 따라 후대 작가들에 의해 내재화될 수도 내재화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강한 시는 성취된 불안이다. ‘불안’은—이미지적․시간적․정신적․심리적—관계들의 모체를 함축하는 은유이며, 이 모든 관계는 궁극적으로 방어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 책의 핵심 논점이기도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영향에 대한 불안이 강력한 오독이라는 복잡한 행위, 내가 ‘시적 오류’라고 부르는 창조적 해석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작가들이 불안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들의 작품이 표현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시적 오류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결과이다. 강한 오독이 먼저 존재한다. 이를테면 문학작품과 일종의 사랑에 빠지는 심오한 해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서문: 오염의 괴로움」, 26쪽)

시의 젊은 시민 혹은 아테네가 불렀던 바와 같이 이피브는 이미 반자연적 혹은 반대적 인간이며, 그의 선구자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시인으로서 불가능한 대상을 추구한다. 이 추구가 필연적으로 시의 왜소화를 포함한다는 것은 정확한 문학사가 반드시 견지해야 할 불가피한 깨달음으로 보인다. 영국 르네상스의 위대한 시인들은 그들의 계몽주의적 후손들이 결코 필적할 수 없으며, 계몽주의 이후 모든 전통, 즉 낭만주의는 모더니스트 그리고 후기 모더니스트 후예들에게서 더 쇠퇴하는 것을 보여준다. 시의 죽음은 어느 독자가 골똘히 생각한다고 재촉되지 않겠지만, 우리 전통에서 시가 죽을 때 그것은 스스로 살해될 것이라고, 즉 자신의 과거의 힘에 의해 살해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정당하게 보인다. 이 책 전체에 함축된 고뇌는 낭만주의가 그 모든 영광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예시적 비극이었을 것이라는 점, 즉 프로메테우스의 기획이 아니라, 스핑크스가 자신의 뮤즈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눈먼 오이디푸스의 자기실패적 기획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눈먼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주는 신이 되는 길을 갔고, 강한 시인들은 선구자들에 대한 맹목을 자기 작품의 수정적인 통찰로 변모시킴으로써 그를 따랐다. 내가 강한 시인의 삶의 주기에서 추적할 여섯 개의 수정 운동은 더 많을 수도 있고, 내가 사용한 이름과 아주 다른 이름을 취할 수도 있다. 나는 이 운동을 여섯 개로 한정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최소한이며 어떻게 한 시인이 다른 시인으로부터 이탈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들은 비록 자의적이긴 하지만 서구의 상상적 삶에서 핵심적이었던 다양한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유용하리라고 기대한다. (「서론: 우선권에 대한 명상, 그리고 개요」, 70~71쪽) 

이제 변증법적 도약을 해보자. 가령 소위 시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들은 실수보다도 더 나쁜 것이다. 아마도 다소간 창조적이거나 흥미로운 오독만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독해가 반드시 클리나맨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정신으로 다시 근본적인 것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시의 연구를 새롭게 하려는 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시에도 근원이란 없으며 어떤 시도 단순히 다른 시를 인유하지 않는다. 시는 인간이 쓰는 것이지 익명의 광채가 쓰는 것이 아니다. 강한 사람일수록 그의 원한도 강하고, 그의 클리나맨도 더 뻔뻔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독자들로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 우리 자신의 클리나맨을 버리려고 하는가?
나는 새로운 시학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실제 비평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의 시를 그 자체의 실체로 ‘이해’하려는 실패한 기획을 포기하자. 그 대신 시를 시인이 시인으로서 선배 시 혹은 시 전체를 고의적으로 오독하는 것으로 읽으려는 탐색을 추구해보자. 시를 그 시의 클리나맨을 통해 알게 되면 그 시의 힘을 상실하면서 지식을 구매하지는 않는 방식으로 그 시를 ‘알게’ 될 것이다. (제1장 「클리나맨 혹은 시적 오류」, 113~14쪽)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육화를 경험할 때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종식시킬지도 모르는 어떤 위험에 대해서 반드시 불안을 경험한다. 영향에 대한 불안이 그토록 무서운 것은 일종의 분리불안이면서 동시에 강박신경증의 시작 혹은 인성화된 초자아인 죽음에 대한 공포이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생각하면, 시가 영향에 대한 불안의 흥분 증가에 대해 운동에 의한 방출로 응답하는 것이라고 (익살스럽게) 볼 수 있다. 그러나—시의 모든 전통, 특히 낭만주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시는 쾌락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험한 상황의 불쾌, 영향에 대한 슬픔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불안 상황의 불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제2장 「테세라 혹은 완성과 대조」, 131쪽)

나는 이제 시의 내적 관계를 특징짓는 수정률의 연구에 세번째의 것, 즉 상상력의 ‘취소하며’ 동시에 ‘격리하는’ 운동인 케노시스 혹은 ‘비우기’를 추가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자신을 ‘겸허히 낮춘’ 것에 대한 성 바오로의 설명에서 케노시스를 가져온다. 강한 시인들에게서 케노시스는 선구자와의 관계에서 ‘비우기’ 혹은 ‘빠져나가기’가 발생하는 수정 행위이다. 이 ‘비우기’는 해방적인 불연속성이며, 선구자의 영감이나 신성의 단순한 반복으로는 불가능한 그런 종류의 시를 가능하게 한다. 자신 속에서 선구자의 힘을 ‘취소하는 것’은 자아를 선구자의 입장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기도 하며, 자신 속에서 또 자신에게 금기가 되는 것으로부터 후발자-시인을 구원한다. 프로이트는 방어기제와 금기의 전 영역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며, 우리는 금기를 만지고 닦아내는 상황이 케노시스와 관련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제3장 「케노시스 혹은 반복과 불연속성」, 166~67쪽) 

시는 자신의 우선권을 결여하고 있음에 대한 시인의 우울함이다. 자신을 낳는 데 실패하는 것은 시의 원인이 될 수 없는데, 이는 시가 자유의 착각에서, 우선권이 가능하다는 인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창조 중의 마음과 달리—만들어진 것이고 그 자체로 성취된 불안이다.
우리는 어떻게 불안을 이해하는가? 바로 스스로 불안해짐으로써이다. 모든 심오한 독자는 어리석은 질문자이다. 그는 “누가 내 시를 썼는가?”라고 묻는다. 따라서 에머슨이 “모든 천재의 작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거부한 생각들을 인식한다—이 생각들은 어떤 소외된 위엄을 갖고 우리에게 되돌아온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비평은 심오한 동어반복의 담론, 자신이 의미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말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을 아는 유아론자의 담론이다. 비평은 시에서 시로 이어지는 숨은 길을 아는 예술이다. (중간 장 「대조비평을 위한 성명」, 176쪽)

피치노의 악마들은 혹성에서 목소리를 가져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존재했다. 이 악마들은 ‘토성’에서 그 밑의 천재에게로 이동해서 가장 관대한 우울을 전달하는 영향이었다. 그러나 사실 강한 시인은 결코 악마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가 강해질 경우 다시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아니 다시 약해질 때까지는 그는 악마가 되며 실제로 악마이다. 앵거스 플레처는 “사로잡힘은 전적인 동일시로 이끈다”고 말한다. 선구자의 숭고에 반대하며 새로 강해진 시인은 악마화, 선구자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능을 지닌 반-숭고를 겪는다. 이피브가 악마화될 때 그의 선구자는 반드시 인간화되며, 새 시인의 변모된 존재로부터 새로운 대서양의 물결이 밖으로 흘러나온다. (제4장 「악마화 혹은 반-숭고」, 180~81쪽)

“죽은 시인들이 다른 이들에게 길을 양보하게 하자.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이미 창조된 것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이라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미친 아르토는 영향과 영향에 반대되는 움직임인 오류가 구별될 수 없는 영역으로 영향에 대한 불안을 가져갔다. 만일 후발자 시인들이 그곳까지 그를 따라가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죽은 시인들이 다른 이들에게 길을 양보하는 데 동의하려고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새 시인들이 더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더 중요하다. 선구자들은 우리에게 범람하여 쇄도하고, 우리의 상상력은 그 안에서 익사할 수 있지만, 그런 홍수를 전적으로 피한다면 어떤 상상적 삶도 가능하지 않다. 〔……〕
필사적으로 아라라트 산을 건져 올리려는 아르토는 적어도 예리한 인물이다. 그의 제자들의 소란은 단지 우리가, 예이츠가 말한 것처럼, 어릿광대 옷을 입는 곳에서 살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여전히 힘 있게 펼칠 수 있는 우리 시인들은 그들의 선구자들이 이제 300년 동안 살아왔던 곳에서, 보호자 거룹의 그림자 밑에 살고 있다. (제6장 「아포프라데스 혹은 죽은 자의 귀환」, 252~53쪽)

목차

 

서문

머리말

서론

 

제1장 클라니맨 혹은 역사적 오류

제2장 테세라 혹은 완성과 대조

제3장 케노시스 혹은 반복과 불연속성

중간 장-대조비평을 위한 성명

제4장 악마화 혹은 반-숭고

제5장 아스케시스 혹은 죽은 자의 귀한

맺음말

 

옮긴이 해설

출처

찾아보기

작가 소개

해럴드 블룸 지음

1930년 뉴욕에서 태어난 유대계 미국 문학비평가이다. 1951년에 코넬 대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에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예일 대학교 인문대학 석좌교수로 셰익스피어와 영시 등을 가르치고 있다. 『셸리의 신화 만들기』 『예시적 친구들』 『탑 속의 종지기』 같은 초기 저작에서 낭만적 상상력의 자율성과 비전을 강조하며 영국 낭만주의 시를 새롭게 해석했다. 1973년 시 창작 과정을 선배 작가의 영향에 대한 투쟁의 과정으로 해석한 대표작 『영향에 대한 불안』을 출판했으며, 『오독의 지도』 『카발라와 비평』 『시와 억압』 『투쟁』에서 이 이론을 발전시켰다. 블룸은 소위 예일 학파라 불리는 폴 드 만, 제프리 하트만, 제임스 힐리스 밀러의 해체론과 일정한 거리를 취하며 정신분석과 그노시스교 등을 접목한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을 전개했다. 1994년 저서 『서구 정전』에서는 셰익스피어를 위시한 서구의 고전문학을 옹호했고 페미니즘, 신역사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문학을 정치, 역사 등 문학 외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비평들을 모두 비판했다. 이후 『어떻게 왜 읽을 것인가』 등 대중 독자들을 위한 다수의 책을 저술했고, 최근에는 자신의 백조의 노래라 부른 『영향의 해부』를 출판했다. 1980년대부터 첼시아 하우스 출판사가 발행하는 서구 문학 작가와 작품에 대한 비평서 모음집의 책임편집인으로 수백 권에 이르는 책을 편집했고 40권 이상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그의 책은 4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양석원 옮김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뉴욕 주립대학교(버펄로)에서 허먼 멜빌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미국소설과 비평이론을 가르치고 있으며,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어바인)와 메릴랜드 주립대학교를 방문했다. 지은 책으로 『탈식민주의 이론과 쟁점』(공저)이, 옮긴 책으로 『주홍글자』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시선과 목소리』(공역) 등이 있으며, 「살인의 진실: 에드거 앨런 포와 미국의 인종담론」 「욕망의 탄생과 존재의 역설: 라캉의 『햄릿』 읽기」 「텍스트와 주체: 해럴드 블룸의 문학이론과 정신분석」 등 미국 소설과 정신분석에 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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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5 =

  1. 몽우리
    2012.08.20 오후 2:34

    통과의례처럼 찾아오는 ‘영향에 대한 불안’을 말끔히 치료할 수는 없고, 또 치료된다 해도 재발할 것이다. 이 책은 불안을 치료하는 책이 아니다. 다만 불안을 공유할 수 있도록 뒷문을 열어둔다. 그리하여 단독자로서 설 수 있게 한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 앞이 자꾸 캄캄해지더라도 물러시지 않도록. 시인을 꿈꾸는 이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