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나르시시즘과 아이의 미니멀리즘
소년, 이상한 나라에서 돌아오다
“배워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어 쓰는”(김기택) 시인 이우성이 첫번째 시집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문학과지성사, 2012)를 출간했다.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무럭무럭 구덩이」가 당선되며 등단한 후 햇수로 4년 동안 써온 시편 중 총 예순한 편을 가려 뽑은 이번 시집에서 이우성은 어른의 시야에 미처 포착되지 못했던 세계의 일부를 소년의 눈을 빌려 발견하고 있다. 무수한 “우성이”들의 경쾌한 나르시시즘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나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 구조의 생략을 통해 시인은 독자들을 자신이 떠나온 세계로 데려다놓는다. 이러한 나르시시즘과 미니멀리즘을 평론가 강계숙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위로의 수사학”이자 “가능성”이라고 해석한다.
이우성의 ‘나’는 현재 한국 사회의 대중적 정서로 만연된 ‘피해자의 나르시시즘’과 정확히 반대되는 자리에 있다. [……] 이우성의 ‘나’는 고통이든 괴로움이든, 그런 감정을 겉으로 표 내는 일에 무심하며, 조금 주저하고, 잠깐 말한 뒤엔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얼른 지워버린다. 피해자의 나르시시즘적 무능과 그것의 거침없는 표현을 조용히 거부하듯 “우성이”(「사람들」)는 작은 목소리로, 가장 적은 말을 사용하여 자기를 이야기하려 한다. [……] 긍정 어법이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과잉 예찬이 아니라 세계의 상실이 객관적 실재로 고착되어버린 이의 유용한 존재 기술(技術)이자 위로의 수사학이라면, [……] 자기 소진의 나르시시즘을 부추기는 현실을 죽거나 도피하거나 망가지지 않고 살 수 있는 힘을,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조금이나마 아름답게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비추는 시적 비전을 찾게 하는 능력을 키운다면, 우리는 이 시인의 자기애를 기꺼이 환대할 필요가 있다. 강계숙(문학평론가)
소년의 나르시시즘 – 백스물여덟 명의 ‘나’
소년은 스스로의 개별성(‘나’)을 강화하며 어른이 된다. 그렇다면 어른은 어떻게 다시 소년이 되는가. 시를 쓰는 이유를 생각하다가 결국 자신을 알기 위해 쓰게 되었다는 시인은, ‘나’에게로 파고들기보다 ‘나’를 확장시키는 것을 그 방법으로 선택한다.
이 시집에서 ‘나’는 백여 번 등장하는데,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처음 여자랑 잤다」) 온 나는 “우월의 기원”(「사과얼굴」)이며 “직장의 정식 직원이고 시도 감각적으로”(「나」) 쓴다. 심지어 점점 “더 잘생겨지는 것 같”(「이우성」)아 “반했니”(「처음 여자랑 잤다」) 하고 능글맞게 묻기도 한다. 그러나 자아도취에 빠진 나 외에도 방 안에 구덩이(「무럭무럭 구덩이」)나 파고 있는 나,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 없고 아무리 해도 “닿지 않”(「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아 고민하는 나도 있다. 때로 ‘나’는 사과나 나무가 되기도 하며, 대개 ‘너’로 함축될 수 있는 다른 누군가, “사람들”과 함께 등장한다. “우성이”(「사람들」)들은 자신을 넘어 내가 말을 건네거나 바라보고 겪은 대상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우성식 나르시시즘의 특별함이 있다. 세계를 안으로 우겨 넣어 억지로 몸피를 부풀리는 게 아니라, 세계를 만나며 곳곳에 ‘나’를 낳는다.
네가 지나온 길을 내가 지나왔어 네가 울 때 나는 아이였고 내가 울 때 너는 어른이 되어야 했어 그러나 너는 돌아볼 수 없고 너를 볼 수 없어
―「마음의 마음」 부분 (p. 84)
나는 나에게서 나왔다 예전에 나는 나로 가득 차 있었다
입안에서 우성이를 몇 개 꺼내 흔든다
사람들은 어떤 우성이를 좋아하지
우성이는 어둠이라고 부르는 곳에 살았다
그때는 우성이가 다를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미남일 필요조차
그러나 가장 다양한 우성이는 우성이었다
공기의 모양을 추측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이 서 있다
우성이가 사실인지 어리둥절하다
우성이를 만진다
우성이가 자신과 똑같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나 우성이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나는 내가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수십 수백만 개의 우성이가 떠오를 거라고 말했다
―「사람들」 전문
아이의 미니멀리즘 – 쉽지만 가장 어려운 말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에 사용된 시어는 ‘나무’ ‘새’ ‘물’ ‘꽃’ ‘친구’ 등 아이답고 천진하다. 무거운 개념이나 추상적인 언어들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고, ‘사과얼굴’이나 ‘가슴주머니’처럼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합성어는 마치 아이가 장난으로 만든 개인어 같다. 이런 시어들을 읽을 때 직관적으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 이미지는 비슷하면서도 달라 말놀이할 때와 비슷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한 수록된 시들의 문장 구조 역시 불완전함을 의도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아이의 말처럼, 연과 연 사이 행과 행 사이는 언뜻 매끄럽게 연결되는 듯 보이지만 묘하게 어긋나 있다. 간단하고 명료한, 그러나 불친절할 정도로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 구절을 잇는 것은 상상력이다. 입 밖으로 꺼내어 낭독할 때보다 눈으로 읽고 머릿속으로 ‘장면’을 그려볼 때 여백은 생동감 있게 메꿔진다.
철봉보다 높이
모자가 하나만 피어 있다
목이 얇은 벼랑
눈과 얼굴을 잇는
조용조용 옷걸이
그저 있는 구멍 안에
깊고 너른 기차들의 방에
沙果였던 것들
놀랍도록 잠이 오고
싱싱하게 걸어와
―「못이 벽을 뚫고 나와」 전문
어른은 권한을 담은 것
쌓이는 구석
겨울의 수영장
세번째 스윙
저녁이 되는 집
―「변신」 전문
험난한 어른의 나라를 버텨내는 모든 소년소녀를 위하여
‘소년’은 확장된 나르시시즘과 복잡한 미니멀리즘을 양손에 움켜쥐고 척박한 어른의 세계를 헤쳐 나가는 나름의 방식을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이우성은 소년의 시선과 어른의 마음을 능숙하게 교차하며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려 시도하며, 이 시도는 “의미의 구현보다 의미의 부재를 낳”기에 더욱 다양한 분화가 가능하다.
수백의 의미를 품은 시어들 사이 홀로 명료한 <시인의 말>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어른”(「진짜 어른이다」) 같은 시인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들은 혼자 쓴 게 아니다./시대가 내 사상이다./[……]/이 시집은 열리고 닫힌다./나는 안에 있다.”
■작품 속으로
나는 내가 많아지는 걸 보았어요
나는 진부해져서 나를 볼 수 없어요
나는 더 어른인 어른과
나는 더 아이인 아이와
―「들어간다」 부분
주머니에 들어 있는 증명사진을 만지며 걷습니다
뒤집히지 않았다면 이쯤이 어깨 여긴 머리
살짝 구겨도 봅니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여전히 방긋
발은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사진관에 간 것만으로
다리든 그 비슷한 것이든 증명됩니다
내가 지금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는 건
우연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일상에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걸을 때 가끔 머리는 어디에 가 있습니다
나는 마침 나도 모르는 사이 집에 다 왔습니다
이렇게 절반이 확인됐습니다만
정신없는 날에는
나머지 반이 잘 있다고 믿는 게 조금 불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웃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진은 필요합니다
―「손끝이 말해줍니다」 전문
■시집 소개 글
이우성의 시는 기성의 언어를 최소한으로 사용하여 기존의 의미 체계를 최대한 지우면서 자신만이 창조할 수 있는 의미를 가까스로 생성하고 힘겹게 움켜잡는다. 그런 시 형식이 설령 오해를 낳는다 해도 오해 또한 시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의미로서 열려 있으며, 그러한 열림에의 지향이나 오해나 오인쯤은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함이 그의 시에 내재된 전위적 실험성을 배가한다. 세계의 잔해, 부스러기, 사소한 파편 들의 불균등한 조합이 만드는 우연의 성좌에, 그것이 만들어내는 예상치 못한 의미의 유비와 내용의 다양성에 그의 시는 기대고 있다.
_강계숙(문학평론가)
■시인의 말
어떤 시는 왜 그렇게 쓰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확신이 든다.
삶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있어야 할 것 같다.
이 시들은 혼자 쓴 게 아니다.
시대가 내 사상이다.
가족과 ‘그들’이 나와 함께
이 시들을 썼다.
이 시집은 열리고 닫힌다.
나는 안에 있다.
2012년 6월
이우성
■시인의 글
왜 시를 쓰는지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알았다.
한동안 나를 알기 위해 시를 썼다.
곳곳에서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내가 찾은 건 나에 대한 새 의문들이었다.
한 권의 시집을 묶는 동안 마음이 멀리 모두 다른 곳으로 뻗었다.
중구난방인 시를 모으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시보다 이 산만한 흔적이 오히려 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