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 ㅡ 최후의 날에 관한 12편의 에세이

맬컴 불 엮음 | 이운경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1년 12월 16일 | ISBN 9788932022635

사양 신국판 152x225mm · 456쪽 | 가격 20,000원

책소개

인류의 노년기, 종말의 시대에 관한 성찰!
불안과 우울의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에게 바치는 대안적 세계의 탐구서
2012년은 또 한 번의 종말이 예고된 해다. 종말론은 1999년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등 특히 1990년대에 성행했는데, 이때 한국에서는 휴거설이 크게 유행하며 집단자살을 감행하는 종교집단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종말론은 배반과 어긋남의 이론으로서, 전염병처럼 번졌다가 사라지곤 하는 좌절되는 꿈이었다. 그래서인지 과거에는 종말론이 종교적 신념이거나 신심 깊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데 반해, 최근에는 공상과학 소설이나 재난영화 등의 ‘소재’로서 흥할 뿐이다. 종말이란 과연 오는 것일까? 종말론이란 무엇이며, 사람들은 왜 종말에 관심을 기울이는 걸까? 『종말론―최후의 날에 관한 12편의 에세이』는 종말론의 역사와 시대적 맥락을 짚어봄으로써 이 질문에 관한 답을 찾게 해준다.
종말론은 가장 역사가 오래된 학문 중 하나로, 이미 기원전부터 존재해왔다. 이는 종말론이 인류의 역사와 맥을 같이해왔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는 종교, 역사, 철학,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종말론을 둘러싼 3,000년 역사를 개관하며 심도 있는 연구가 펼쳐진다. 조로아스터, 피오레의 요아킴, 조애나 사우스콧, 사바타이 제비 등 역사 속 예언가들을 비롯해 기독교, 유대교, 퀘이커교 등과 천년왕국설 같은 종교적 묵시 사상을 논한다. 헤겔주의 철학자인 치에슈코프스키의 사상, 생시몽주의, 프로테스탄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칸트·데리다·푸코의 담론 등 세속적 묵시 이론도 이 책의 핵심 주제이다. 나아가 조지 엘리엇, D. H. 로런스, 입센, 스위프트, 베케트, 카프카 등의 작가와 헤겔, 하이데거, 데카르트, 들뢰즈, 그리고 아도르노(그리고 그를 통한 베토벤의 말년성) 등을 집중 탐구하는 등 이 책은 신학, 예술, 정신분석학, 미학, 철학 등을 종횡무진 오가며 종말‘론’의 새로운 장을 개척해냈다.
이 책이 같은 주제의 다른 책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대중을 선동하는 무책임한 종말 예언서 또는 어느 하나의 종교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종말의 개념을 확장함으로써 흔히 생각하는 묵시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년성, 퇴폐, 파국과 같은 모더니즘적 논의도 끌어안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과지성사 刊)

끝과 시작, 절망과 희망의 변증법
종말에 관해 집대성한 이 책은 단순히 절멸의 순간으로서의 끝만이 아니라, 역사의 종점 또는 목적으로서의 끝도 아우른다. 사실 종말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개념이다. 개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순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순간, 어떤 사상이 더는 수정·발전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 순간이나 다른 담론의 등장으로 해체되고 폐기되는 순간, 역사 발전 단계 중 완성이라 부를 수 있는 최종 단계 등. 따라서 이미 종말은 다녀갔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끝을 상상하고 탐구하고 예측하는 일은 사실 허무맹랑하다기보다 과학적인 작업이자, 현실에 대한 치밀한 사유, 냉철한 판단의 결과물일 수 있다. 종말론은 끝을 상상하며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게 한다는 점,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에 대격변을 통한 희망의 끈이 되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끝과 시작, 절망과 희망이라는 변증법적 구조를 띤 이론이다. 실제로도 역사 속 종말론은 종종 힘없는 자들을 대변해 세상의 불의에 맞서왔으며, 규범화된 현실에 감고 있던 눈을 뜨게 해주었다. 즉 종말론의 진정한 기능과 작용은 최후의 날을 위해 예정된 신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풀어놓는 것이다. 묵시적 희망은 종말에 대한 희망이기도 하지만 지속과 안녕에 대한 희망이기도 한 것이다.

세상의 목적과 인간의 진보를 밝혀주는 프리즘으로서의 종말론
이 책은 세상의 종말에 관한 많은 이론과 신념을 검토한 이론가 및 비평가 열두 명의 글을 주제별, 또는 연대기순으로 모은 앤솔로지다.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종교적 종말론과 그 이후 등장한 세속적 종말론(또는 그에 관련된 지적 탐구)의 관계와 경계이다. 1~5장은 종교적 종말론을 탐구하는데, 특히 세상의 임박한 종말에 대한 믿음과 목표 지향적 행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 노먼 콘은 종말론의 기원이 기원전 제2천년기의 후기에 조로아스터교가 전통의 순환적 세계관과 절연하는 것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토퍼 롤런드는 초기 기독교의 묵시 사상은 오로지 세상의 종결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위한 결정적인 기회로서의 현재’에도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한다. 버나드 맥긴은 최후의 심판이 중세 초기 내내 심리적으로 임박해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기독교 사회가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마저리 리브스는 요아킴주의 전통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과 목적론적 해석 사이의 긴장을 묘사하며, 리처드 팝킨은 17세기 프로테스탄트들과 유대인들의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가 지녔던 쇄신의 정치 풍토를 개관한다.
알다시피 종말론의 형성과 발전에는 사실 기독교가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6~8장은 전통적인 기독교 맥락에서 분리되어 있을 때조차 세속적 담론의 형태와 논조, 어쩌면 심지어 본질까지도 형성할 수 있음을, 즉 기독교 종말론의 탈계몽적 재전유를 암시하는 세속적 종말론의 예를 보여준다. 앨리너 셰퍼는 비판적 성서학 덕분에 낭만주의자들이 예언의 망토를 두르고 그들 자신의 묵시 문학 형식을 창조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로렌스 디키는 치에슈코프스키의 역사철학에서 종교적 종말론과 세속적 목적론이 어떻게 융합했는지 탐구한다. 크리샨 쿠마르는 20세기 재앙 예언자들의 ‘타락한 천년왕국 신앙’을 논의한다.
9~11장에서는 묵시적 어조를 사용하든 퇴폐의 시대에 속하든 말년의 양식을 구현하든 어떤 텍스트들은 최후에(의미의 한계들에서, 한 시대를 마감하면서, 삶의 끝에서) 씌어졌다는 느낌이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크리스토퍼 노리스는 계몽운동의 목적론과 핵전략의 종말론에 관한 데리다의 질문에서 나타나는 자의식적인 ‘묵시 어조’에 관해 논한다. 프랭크 커모드는 요아킴의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의 이행이라는 개념과 데카당스의 세기말적 개념 사이의 유사성을 탐구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베토벤과 아도르노에게서 나타나는 말년의 양식들을 연구한다.
이 책은 종말에 관한 당혹스러운 질문들과 담론들에 대해, 그리고 인류의 창조적인 희망에 관해 제한적이나마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 책 속으로

세계가 종점terminus이자 목적telos이라는 의미로서 끝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지 않다. 그러나 설사 끝 혹은 목적 없는 세계라는 발상이 논리적으로는 이치에 맞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히 지속된다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영원한 무목적성이라는 관념은 도덕적 상상력에 불쾌감을 준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계에 적어도 하나의 끝은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 우주의 역사가 어떤 형태를 갖추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우주의 종말을 우주가 붕괴한 결과로 가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세계의 영원성을 믿는 사람은 역사가 어떤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향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 두 이론은 모두 진지하게 제안되었다. 전자의 경우는 우주의 파국을 과학적으로 투사한 것에서, 후자의 경우는 끊임없는 진보에 대한 칸트적 꿈에서. 그러나 미래에 대한 상상은 대부분 이렇다 할 동기 없는 재앙이라는 순수한 종말론과 끝없는 합목적성이라는 순수한 목적론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프롤로그 「종말end과 목적end의 결합에 관하여」, 10쪽)

죽은 자들이 부활한 뒤에는 대규모의 회합이 뒤따를 것이고, 생명이 있었던 모든 것을 맞이할 것이다. 그곳에서 모든 개인은 자신의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흰 양과 검은 양이 구별되듯이 구원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가 구분될 것이다. 그때 언덕과 산의 금속이 녹아 거대한 강을 이루어 지구를 뒤덮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강을 건너야 한다. 선한 인간들에게 그것은 따뜻한 우유 속을 걸어가는 느낌일 것이다. 오직 악한 자들만이 자신들이 정말로 용해된 금속 안에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 결과 사악한 자들은 파멸할 것이다. 조로아스터는 그의 찬가 중 하나에서 바로 이렇게 말한다. “오 마즈다여, 당신께서 당신의 그 환하게 타오르는 불과 용해된 금속으로 그 두 집단에 배당할 보상 혹은 징벌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주는 신호입니다. 사악한 자들을 파멸하고 의로운 자들을 구한다는 신호 말입니다.”  (1장 「시간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45쪽)

격변의 묵시적 이미지들에 자극을 받아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희망을 구가했던 동시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윈스탠리 역시 실망과 환멸을 경험했다. ‘패배의 경험’은 진지한 기대를 가지고 새로운 질서를 고대했던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었다. 일부는 그 경험을 통해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정치권력에 대한 실용적 접근이 진심으로 천년왕국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인류 평등을 향한 꿈보다 더욱 적절해 보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좀더 광범위한 세상의 변화를 위한 고투가 무익해 보이면 내부의 변화로 관심의 방향을 돌림으로써 급진적인 희망을 마음의 신성함에 대한 추구로 전환할 수 있었다.  (2장 「‘말세는 누구에게 오는가’」, 55쪽)

아우구스티누스의 천년왕국 사상 및 종말의 기대에 대한 강력한 공격은 중세 초 몇 세기 동안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2세기 말에 피오레의 요아킴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의 주장을 적어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논박하려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세 초기 사상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지배적인 역할은 많은 역사가들이 기독교 세계의 형성에서 묵시적 믿음이 하던 역할을 경시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였다. 400년에서 1000년 사이 6세기 동안 성직자든 속인이든 대부분의 주요한 사상가들 또한 종말의 시기에 관한 어떠한 예언도 하길 피한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내 요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반反묵시주의가 갖는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단순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 신학이 우세적인 위치를 점했다는 사실이 허용하는 것보다 이야기가 더욱 복잡하다는 사실이다.  (3장 「세계의 끝과 기독교 세계의 시작」, 89쪽)

16세기 초반의 정치가들에게 예언가들은 분명 심각한 골칫거리였다. 사보나롤라에 대한 기억이 그의 문하생들 사이에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예언적 계획의 처음 절반인 징벌은 성취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 즉 세계의 부활은 여전히 기다림의 대상이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천사의 역할이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한 혼란이 여러 번 발생했던 것이다. 1516년에 피렌체를 방문한 레오 10세는 지방공의회에서 사보나롤라의 교리를 정식으로 비난함으로써 이러한 급진적인 요소들을 억누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오히려 콘트라리니를 포함한 몇몇 존경받는 신학자에게서 사보나롤라의 본질적인 교리에 대한 의외의 옹호를 이끌어냈다. 그 시대에 대한 예언적이고 묵시적인 기대는 위협적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간단히 일소될 수는 없었다. 예언자들을 억압하려는 레오의 뒤이은 시도들은 제5차 라테란공의회에서 묵시 설교자들과 예언가들의 통제를 위한 지침들을 공식화하기 위한 위원회의 지명으로 이어졌다.  (4장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의 양식과 목적」, 141~42쪽)

유대인들의 시련은 1492년에는 스페인에서, 그리고 1497년에는 포르투갈에서 비개종 유대인들이 추방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수많은 비극이 있은 뒤에 신이 자신들을 구제해줄 것이라는 메시아적 확신이 점차 자라고 있었다. 그들은 카발라식 계산을 근거로 신의 구제가 (유대인 메시아의 출현이라는 형식으로) 1648년에 발생할 것이라 기대하게 되었다. 대단히 불행하게도 그때 벌어진 일은 히틀러 이전 동유럽 역사상 최악의 유대인 학살이었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몰살되고, 강간당하고, 약탈당했다. 이 일로 인해 일부 유대인들은 신의 역사의 진행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고, 구제가 일어나는 시기를 다시 계산하기에 이르러, 1666년이 결정적인 연도로 낙착된 것으로 보인다.  (5장 「17세기 천년왕국 사상」, 156쪽)

종말의 ‘유예’에 대한 희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계몽운동의 비판적 정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간으로 안내하는 시간의 끝이라는 관념에 철학적 문제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각하고 이용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칸트가 자신의 에세이 「모든 것의 끝The End of All Things」(1794)에서 지적했듯이, “모든 변화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시간 자체가) 멈추는 때가 올 것이라는 관념은 상상력에 불쾌감을 준다.” 인간의 정신은 시간의 끝이라는 관념을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정신의 매개체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의 부정명제로서가 아니면 영원을 파악할 수 없다. 시간 없는 삶은 (만약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오직 멸종으로서만 나타난다. 우리가 감각의 세계에서 한 발짝 빠져나와 지성으로 알 수 있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우리의 정신은 불가피하게 모순에 빠진다. “시간의 끝을 형성하는 그 순간은 또한 영원의 시작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 두 가지가 동일한 시간의 연속 안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그것은 자기모순이다.”  (6장 「세속의 묵시」, 182쪽)

“어떻게 의식이 미래에 대한 지식을 자기에게 맞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치에슈코프스키는 자신이 하는 탐구의 모든 국면을 셋으로 이루어진 짝으로 나누었다…… 치에슈코프스키는 이러한 결정들의 대행자를 각각 “선지자이자 예언자” “역사철학자” “역사의 집행자”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치에슈코프스키는 다음 몇 쪽에 걸쳐 셋으로 이루어진 다른 짝들을 연결시키는데, 그들은 모두 상응하도록 의도되었다. 예를 들어 “느낌, 의식, 행위” “정正……, 반反……, 합合” “외존성外存性-내재성-절대적 목적론” “직관-반성-행위” “아름다움-진리-선함” “존재하기-생각하기-행하기” 등등…… 그런 다음 미래를 아는 세 가지 가능한 방법들에 관한 고찰을 시작하면서, 치에슈코프스키는 자기가 3단계 역사관의 형식으로 시간화하기 시작한 “사변적 삼분법”을 발전시켰다.  (7장 「역사의 종말로서 생시몽적 산업주의」, 221~22쪽)

‘포스트모더니티’는 썩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또 다른 종류의 결말이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거대 서사들의 죽음’과 진리, 역사, 진보, 이성 혹은 (계시는 말할 것도 없고) 혁명에 대한 어떤 가능한 믿음의 종언에 관해 듣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지막의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름으로 해방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출발, 새로운 자유의 느낌은 없다. 우리의 눈을 덮고 있던 환상이라는 비늘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세상에 대해 순전히 실용적이거나 반어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공적인 현실 참여를 피하고 사적인 목표들과 사적인 삶의 추구에 헌신하도록 요청받는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분석에 동의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그러한 분석이 행해지는 분위기이다. 그것은 조용한 체념의 분위기이며, 오래된 확실성의 붕괴에 대한 악의적인 모종의 기쁨이 가미된 싫증의 분위기에 가깝다.  (8장 「오늘날의 묵시, 천년왕국 그리고 유토피아」, 266쪽)

이러한 반전들과 초점의 변화들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양식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 세기의 마지막 몇 년에서 현재의 순간, 그 인공의 시대artificial epoch가 지난 세기의 퇴폐사조와, 사실상 전환기를 인지하고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환영했던 과거의 모든 사람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 말이다. 전 역사를 통틀어서(금의 시대, 은의 시대, 동의 시대 등) 어떤 중대한 시대들을 구분했던 사람들은 위기의 시기에 산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알고 있었다. 이러한 느낌이 강렬해지는지, 그것이 현대성과 더불어 더욱 격렬해져서 그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키르케고르, 사르트르, 야스퍼스에 관해 말해야 하는지는 나도 확실히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은 존재한다. 그리고 회의론이 실패한다면 세기와 천년기가 종언을 고할 때 우리 모두가 그 느낌을 더욱 통렬히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종말을 기다리고 종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인지도 모른다.  (10장 「종말을 기다리며」, 340쪽)

그러나 종말은 생존과 함께한다. 이것이 이 글에서 내가 앞으로 논의하고 싶은 주제이다. 조만간 분명해질 이유들 때문에, 나는 이 다소 독특한 현대의 미학적 형식에 말년의 양식late style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아도르노는 이 표현을 매우 다양하게 사용해왔지만, 그것을 가장 인상적이고 강력하게 사용한 곳은 1937년에 저술하고 1964년에 음악 에세이집 『음악의 순간Moments musicaux』에 수록한 「베토벤의 말년 양식Spatstil Beethoven」이라는 제목의 미완성 에세이다. 아도르노는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들, 즉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다섯 작품, 교향곡 9번, 「장엄미사」, 마지막 현악 4중주 여섯 작품, 피아노 소곡 몇 편 등) 그의 이른바 3기에 속하는 작품들에 관해…… 현대 문화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으로 본다. 그것은 자신의 매체를 완전히 능숙하게 다루는 예술가가 그럼에도 자신이 속한 부르주아 질서와 교류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것과 모순되고 소외된 관계를 맺는 순간이다.  (11장 「말년성 그 자체로서의 아도르노」, 347~48쪽)

지은이
맬컴 불(Malcolm Bull) | 옥스퍼드 대학 러스킨 스쿨 예술사학과 교수
노먼 콘(Norman Cohn) | 서식스 대학 역사학과의 아스토르-울프선 명예교수 역임
크리스토퍼 롤런드(Christopher Rowland) | 옥스퍼드 대학 성서주석학과의 딘 아일랜드 교수
버나드 맥긴(Bernard McGinn) | 시카고 대학 신학 대학원의 나오미 솀스턴 도넬리 교수 역임
마저리 리브스(Marjorie Reeves) | 옥스퍼드 세인트앤스 칼리지와 세인트휴스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 등 역임
리처드 팝킨(Richard Popkin) |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 명예교수, UCLA 역사철학과 겸임교수 등 역임
엘리너 셰퍼(Elinor Shaffer) | 런던 대학 인문 사회과학 대학원 선임 연구원
로렌스 디키(Laurence W. Dickey) | 위스콘신 대학 매디슨 캠퍼스 역사학과 명예교수
크리샨 쿠마르(Krishan Kumar) | 버지니아 대학 사회학과 교수
크리스토퍼 노리스(Christopher Norris) | 카디프 대학 철학과 특별 연구교수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 | 문학비평가. 케임브리지 대학 영문학과 교수 등 역임
에드워드 W. 사이드(Edward W. Said) | 컬럼비아 대학 영문학 및 비교문학과 교수 등 역임

목차

프롤로그 종말end과 목적end의 결합에 관하여 | 맬컴 불 
1장 시간은 어떻게 완성되는가―세계 최초의 종말론 신앙, 조로아스터교 | 노먼 콘
2장 ‘말세는 누구에게 오는가’―묵시적 사조와 신약의 해석 | 크리스토퍼 롤런드
3장 세계의 끝과 기독교 세계의 시작 | 버나드 맥긴 
4장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의 양식과 목적 | 마저리 리브스 
5장 17세기 천년왕국 사상 | 리처드 팝킨
6장 세속의 묵시―18세기 말의 예언가들과 묵시주의자들 | 엘리너 셰퍼 
7장 역사의 종말로서 생시몽적 산업주의―보편사의 목적론에 관한 치에슈코프스키의 고찰 | 로렌스 디키
8장 오늘날의 묵시, 천년왕국 그리고 유토피아 | 크리샨 쿠마르
9장 묵시의 이본異本들―칸트, 데리다, 푸코 | 크리스토퍼 노리스 
10장 종말을 기다리며 | 프랭크 커모드
11장 말년성 그 자체로서의 아도르노 | 에드워드 W. 사이드

옮긴이의 말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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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맬컴 불 엮음

옥스퍼드 대학 러스킨 스쿨 예술사학과 교수. 울프선 칼리지 연구원을 역임했고 천년왕국 사상의 역사, 이론, 그리고 도상학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키스 룩하트와 함께 쓴 『성역을 찾아서Seeking a Sanctuary』(1989)를 비롯해, 『숨겨진 것들을 찾아서: 종말, 비전, 통합Seeing Things Hidden: Apocalypse, Vision and Totality』(2000), 『신들의 거울The Mirror of the Gods』(2005) 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이운경 옮김

연세대학교 대학원 영문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같은 대학원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 『연초 도매상』 『키메라』 『스피박 넘기』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참여 군중』 『Y씨의 최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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