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하지 않은 소년은 가능한가,
입 없는 말은 가능한가,
몸 없는 결혼은 가능한가……
소년 속의 소녀, 아이 속의 노인, 미(美) 속의 추(醜)
중첩과 연결이 만들어내는 쫀득쫀득한 즐거움!
모찌처럼 ‘찰’지고 달큼한 이야기
임수현의 소설은 ‘찰’지다. 저마다의 상처들을 안고 있는 소년/소녀들.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쫀득쫀득하고 달큼한 문장으로 그려낼 줄 아는 그는, 감히 신인답지 않은 기량과 신인으로서의 신선함을 갖춘 놀라운 신인이라 부를 만하다. 2008년 『문학수첩』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등장한 임수현은 3년 동안 꾸준히 써온 그의 단편을 이번 첫 소설집 『이빨을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문학과지성사, 2011)에 한데 묶었다. 작가 임수현은 탄탄하고 밀도 있는 문장력과 인간 관계에 대한 깊은 사유를 그의 소설 속에서 마음껏 펼치며 올겨울 독자들에게 큭큭 웃다가도 눈물 찔끔 흘릴 재미와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우아한 가난 속 유치하지 않은 소년/소녀들
이 소설집 속 인물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하지만 단 한 명도 구질구질하지 않다. 비록 라면을 끓여 면만 건져 먹고 다음 끼니에는 데운 국물과 식은 밥을 먹더라도 “오동통”한 면발과 명함만 한 다시마가 든 라면은 그에게 근사한 요리인 것처럼 말이다. 우아한 가난, 이는 마치 풍성한 꽃다발에 이물이 군데군데 낀 이미지와 흡사하다. 그들의 삶은 어둡고 우울할지언정 화려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 마다 주인공으로 내세워진 소년/소녀들은 단 한 명도 유치하지 않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미성년, 즉 성년이 되지 못한, 완전한 인간의 전단계로서의 소년/소녀로서 존립하지 않는다. 개개인 모두 구체적이고 내밀한 세계를 소유하고 있는 온전한 인물들인 것이다. 결핍이 있을지언정 미숙하지 않은 구체적인 개인들이 바로 임수현 소설의 소년/소녀들이다. 이러한 인물들은 타인에게 강제되지 않은, 사회적으로 포섭되지 않은, 완전한 날것인 인간 본연의 욕망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간다.
입 없는 말, 몸 없는 결혼, 믿음 없는 관계……
이 책을 처음 들었을 때 독자를 사로잡는 질문은 “왜 이빨을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해야 하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 한 번쯤 들어보았을 “농부의 딸과 사자”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이 제목의 의미는 표제작 「이빨을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에서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어리석은 사자의 우화(농부의 딸이 결혼하자고 협박하는 사자에게 두려움을 빙자해 이빨과 발톱을 뽑도록 요구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원치 않은 결혼을 피하였다는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어 ‘관계’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V에게 농락당한 채 버려져 눈물범벅이 된 ‘곡’에게 ‘나’는 셰에라자드처럼 앉아 이 우화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곡’이 내뱉은 한마디, “그래도 약속은 믿음이야”를 통해 독자는 텅 빈 관계에 지친 인간의 공허한 외침을 들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 믿음 없는 관계는 성립 불가능한 것 같지만, 실상 많은 관계에서 믿음은 결여 혹은 결핍되어 있다는 아이러니를 임수현은 아프게 비꼬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곡의 말을 비웃는 ‘나’ 또한 사실은 V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또 하나의 피해자라는 사실에서 이러한 모순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중첩과 연결의 경쾌한 변주곡
이렇듯 그의 소설은 삶의 모순점들을 관통하며 이 아이러니들로 인한 결핍의 고통을 그려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어둡기보다는 경쾌한 분위기를 가진다. 그 어떤 인물들의 본심도 파악해내기 어려운 그의 소설이지만, 글을 읽는 이가 어렵지 않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것은 의미들이 중첩되고 연결되어가며 갖춰진 탄력적인 리듬이 소설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아이 속에 비친 노인의 얼굴, 소년의 내면에 숨겨진 소녀의 면모, 추하고 더러운 똥과 만발한 꽃묶음…… 이처럼 임수현의 소설은 끊임없이 세계를 파고들며 전혀 진지하지 않은 진지한 어조로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본문 소개
나는 앤입니다. 나에게도 오늘 새 옷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람처럼 부푸는 치마입니다. 나는 이 옷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습니다. 바람을 가득 담아 부풀어 오를 수 있으니, 그래, ‘날개’가 어떨까요. 이 치마는 정말 날개처럼 나를 아빠가 있는 높은 곳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다처럼 푸른 하늘을 헤엄치는 날개, 날개를 단 물고기…… 하지만 내가 어떤 상상을 하든 나는 앤입니다.
나를 이제 앤이라고 불러주세요._「앤의 미래」
정말 V는 남다른 사람이었죠. V는 저를 철저하게 감추었고, 저 혼자 몰래몰래 꺼내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저는 V의 그림자처럼, 아니 비밀의 화원처럼, 아니 어쩌면 V의 성기처럼 존재했어요. 누구나 짐작하지만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존재였던 거죠. 정말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아무에게도 드러내놓고 확인시키지 않지만 V의 연재의 정체성은 바로 저였을 거예요._「이뺠을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
V와 만나면 늘 숨바꼭질을 벌이는 것 같았다. 씨앗을 고르고, 야린 나뭇잎을 비비대며 잠시 한눈을 팔았을 뿐인데…… V는 어딘가 숨어버렸다. 진우가 결국 술래를 포기하고 터덜터덜 걷다 보면…… V는 판화가 오윤이 만들었다는 우리은행 외벽의 검붉은 테라코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양손 엄지와 검지로 사진틀을 세우고 있거나, 길모퉁이 쇼윈도 앞에 서서 수의를 입고 망건을 눌러쓴 마네킹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진우와 V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몸과 그림자처럼 골목길을 걸어갔다._「개의 자살」
앤의 미래
지상 최후의 로봇
꼬리총
뱀2
개의 자살
늪의 교육
이빨을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
아이들은 가라
굴뚝
해설 아이와 노인, 상상과 표상 사이_김대산
작가의 말
[연합뉴스] 신간